휴대폰 전원을 꺼 놓은 걸 알면 전화를 안 하면 되지 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큰형한테 그 논리가 통할 리 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 대표님이 조용하시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회사 건물 앞이었다.
도보로 1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서, 은색의 거대한 건물을 바라보던 윤 팀장이 조금 섭섭한 듯 “벌써 포기하셨나?”라고 중얼거리자 수현이 그의 기우를 무심히 쳐냈다.
“아뇨. 그냥 오늘은 저희 아버지랑 싸우느라 정신없으신 걸걸요.”
혼외자 찌라시에 주총 얘기까지 나왔으니 그걸 현규 형의 공격이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이혼시키고야 말겠다고 화를 내며 아버지와 싸우고 계실 게 뻔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절대 이혼 못 시키니 애부터 낳으라고 하신 거고.
“신혼인데 매일이 전쟁이네.”
“그러니까요…….”
휴대폰을 꽉 채운 큰형의 메시지들을 보며, 수현은 새삼 아버지의 급한 성격에 감사했다. 아버지는 성격이 너무 급해서 메시지 따위는 안 보내신다.
무조건 통화다.
그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버지까지 메시지를 보내셨다면 휴대폰을 없애고 유선의 세계로 돌아갔을 거다.
지금이라도 원시로 컴백할까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때마침 메시지가 도착했다.
큰형인가 싶어 순간 화들짝 놀랐지만, 다행히 큰형이 아니었다.
담당의다.
[현규 아직이야?]
또 부부 클리닉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긴 가야 한다.
횟수를 좀 줄이긴 해야 하니까.
이러다 진짜 근무 중에 19층 수면실로 끌려갈 수도 있다.
대표님의 무시무시한 번식력과 정력으로 보아 현규 형도 대표님과 비슷하거나 강한 수준일 텐데…… 이러다 회사에서 큰 사고라도 치면 집안 망신이다.
이젠 더 수치스러울 게 없다고 마음 놓는 순간 그 최악을 갱신하는 게 인생이라는 걸 이번에 뼈저리게 배운 채였다.
[내일 오후에 돌아올 테니 다음 주 중으로 들를게요. 예약 잡아 주시면 시간 맞출게요.]
형이 과연 순순히 따라가 줄지는 모르겠지만 잘 꼬시면 될 거다.
이번에 나흘 만에 돌아올 걸 생각하면 그냥 내일 오후에 끌고 갈까 싶기도 하지만…… 그건 너무 못 할 짓이다.
그럼 다음 주 초가 가장 적절한 시기인데…… 내가 과연 주말에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흘 만의 귀국이라는 걸 감안하면 위험하다.
그냥, 약 먹여 재워 버릴까?
아니, 약은 그러니까 술을 먹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형도 피곤할 테니 한잔하고 뻗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내가 형을 덮칠 것 같은데…….
진지하게 형한테 뭘 먹일까 고민하던 중 드디어 회사 앞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점심을 먹고 회사 앞에 서니 오늘은 유독…….
“들어가기 싫으네요…….”
“나도 싫어. 날은 더럽게 좋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시원해 계속 걷고 싶은 날씨였다. 이런 날 아예 안 나왔다면 몰라도 나왔다가 들어가면,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다.
이대로 반차 내고 드라이브나 갈까 하는 강렬한 충동이 일기는 했지만 어차피 차도 없다. 차량 렌트는 일부러 주영이 돌아간 뒤로 미룬 채라, 지금은 한시적 뚜벅이 상태다.
“그래도, 들어가야죠…….”
더럽게 들어가기는 싫지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참고 빨리 여기서 경험 쌓아서 내 회사를 차리면 된다. 그럼 날씨 좋으면 나가서 일해도 되니까.
그렇게 자신을 달랜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다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슬슬 점심시간이 끝나가니 큰형에게 연락해야 한다. 정확히 점심시간 끝나기 1분 전에 하는 건 너무 속 보이니까 3분 전에 전화할 생각으로 번호를 찾는데,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이 울려왔다.
기막힌 타이밍에 화면을 확인해 보니, 최 변호사님이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혼후 계약서 검수를 안 맡겼다는 게 떠올랐다.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혼후 계약서의 존재 자체를 까먹고 있었다.
낭패다.
실수했다는 생각에 출입구를 통과하며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이수현입니다.”
- 너, 지금 어디야?
인사도 없이 다급히 나온 그 질문에 수현은 당황해 눈을 껌뻑였다.
“어…… 회사요.”
- 강민혁 만났어?
“……대표님이요?”
- 그래.
혼후 계약서 때문에 전화하셨나 했는데 왜 뜬금없이 대표님을 찾는 건가?
예상과 너무 다른 용건에 순식간에 여러 가지 의문이 일긴 했지만 수현은 일단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아니요. 잘 피해 다니고 있는데요.”
- 그럼, 그대로 퇴근해. 반차 써.
역시나 아버지의 친구다웠다. 기승전 없이 결만 나오는 게 똑같다.
괜히 40년 넘게 아버지와 친구로 지내신 게 아니다.
“갑자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 오늘 내가 오전에 재판이 있어서 법정에 갔다 방금 돌아왔는데 강민혁이 오전에 서류를 하나 가져오라고 했대.
“무슨 서류요?”
- ……이혼 서류.
“대표님 이혼하세요?”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말에 윤 팀장님이 놀라 이쪽을 휙 하니 돌아본다.
방금 내 주식 곤두박질친 거냐는 물음과 경악이 깃든 눈빛이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 일단 기다리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곤 다시 통화에 집중하자 변호사님이 재빨리 윤 팀장님의 주식 그래프를 상승 곡선으로 바꿔 주신다.
- 아니, 너희 거.
“……이제요?”
지난주 내내 이혼시키겠다고 난리시길래, 당연히 혼인 신고했다고 하자마자 이혼 서류를 작성해 두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역시 일 처리가 많이 허술하다. 이 회사가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의 순서가 엉망인 데다 많이 느리고 또 과정도 대충대충이다.
쉽게 말해 주먹구구다.
심각하게 빨리 퇴사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옆에 선 팀장님이 옆구리를 쿡 찌른다.
대표님 이혼하시는 거냐고 묻는 그 제스처에, 괜찮다고 손을 까닥여 보였다.
순간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팀장님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문득 앞이 막혔다.
지금은 출퇴근 시간 다음으로 직원들이 가장 많이 움직이는 점심시간이니 통행에 방해되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위화감이 느껴지는 건 상대가 움직이지 않아서였다.
마치 일부러 길을 가로막은 듯한 기분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 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안요원들이다.
“안녕하세요?”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고 인사를 건넨 뒤 자신이 옆으로 피하려 하는데, 또 앞을 막는다.
그게 묘하게 불쾌해 인상을 쓰자 그들 중 한 남자가 말을 건넨다.
“잠깐 대표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대표님이요?”
“네. 함께 가시죠.”
안 간다는 건 네 선택지에 없다는 듯 위압적으로 말을 건네는 남자의 뒤로 두 명의 남자가 더 붙더니 자신의 뒤에서도 검은 그늘이 졌다.
“저 지금 포위당한 건가요?”
지금 강압적인 유인 행위를 하시는 거냐는 질문에 최 변호사님이 바로 되물으신다.
- 포위라니?
“어…… 보안 요원분들이 절 에워싸서요.”
- ……강민혁 짓이야?
“네.”
- 저런, 강민혁이 눈이 뒤집히긴 했나 보네.
“눈이 뒤집혀요? 왜요?”
- 혼외자 건 터져서 회장님께 불려 가 새벽부터 된통 깨지고 오전에는 너희 아버지가 약 올려서 둘이 한바탕한 모양인데, 그 와중에 주총까지 소집된다니 눈이 뒤집혀도 안 이상하지.
“아, 그래서 아버지도 화나셨던 거구나…….”
- 이정현은 늘 화가 나 있는 상태긴 하지만…… 뭐, 오늘은 특별히 뚜껑 열릴 만했어. 회장님한테 깨지고 강민혁이 이정현한테 화내서 이정현이 왜 나한테 지랄이냐고 하다 또 못 할 말까지 해 가며 대판 한 것 같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것도 웃기긴 하다. 시작은 현규가 했는데 엉뚱한 둘이 싸우고 있는 게.
“……현규 형이요?”
- 그럼 누구겠어? 아무리 우스워도 강민혁한테 이럴 수 있는 건 현규뿐이지. 매일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도 이정현은 이런 짓은 안 해. 아니, 그 정도로 머리를 안 쓰지.
그건 그렇다고 수현도 인정했다. 수현의 부친은 그렇게 이리저리 복잡하게 머리 굴리시는 분은 아니다.
상대를 잡으려면 트랩을 쓰기보다, 한 번에 맨손으로 때려잡는 스타일이지.
그럼 역시 현규 형 짓이겠구나, 하고 납득하며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올라타자 보안요원 여섯 명이 우르르 자신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러곤 멋대로 버튼을 누르기에 수현은 로비에 남은 윤 팀장님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팀장님, 저 먼저 올라갈게요.”
“……그래, 수고해…….”
얼떨떨해하는 팀장님에게 인사를 마친 뒤 닫히는 문을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최 변호사님이 엉뚱한 물음을 던진다.
- 잠깐, 너 지금 올라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