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60)

“네.”

- ……강민혁 만나러?

“네.”

어차피 피하지 못하는데 괜한 실랑이하기 싫어 얌전히 따라가는 중이라고 하자, 최 변호사님이 순간 탄식한다.

- 너, 외탁했구나?

“다들 그렇다고 하시더라고요.”

- 와…… 진짜 피는 못 속이네. 이정현, 정윤겸 성질머리 사이에서 어떻게 너같이 순한 애가 나왔나 했는데 정윤겸에서 성질머리만 빼면 너다, 딱.

“그래요?”

- 무신경한 게 딱 정윤겸이야. 물론, 정윤겸이었으면 지금쯤 강민혁 머리털을 다 뽑아 놨겠지만…….

“에이, 아니에요. 어머니면 의자가 날아갔죠. 우리 아버지가 넷째 갖자고 하셨을 때 무드 등 던져서 아버지 머리 깨진 적이 있거든요. 저 되게 어릴 때였는데, 그날 어머니가 알파들은 건강해서 머리통 좀 깨져도 된다고 하셔서 기억해요. 그리고 사랑해서 무드 등으로 끝난 거지, 안 사랑했으면 의자 날아갔다고 하신 것도요.”

그러니까 강 대표님은 의자로 얻어맞을 거라고 수현은 장담했다. 하지만 대표님은 건강해서 괜찮을 거다.

- ……걔는 여전하구나.

“그러실걸요. 고등학교 때 별명이 미친개였다면서요. 눈 마주치면 물린다고.”

특히나 발정기 때는 더욱 사나워져 그 시기만 되면 10미터 내에 알파뿐 아니라 베타도 가까이 가지 않기로 유명했다고 들었다. 더불어 그때 유일하게 접근했던 게 아버지라 둘이 사랑에 빠졌다는데 그 이유가 두 사람을 받아 줄 성질머리가 서로밖에 없어서였다고도.

사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헷갈렸는데 어쨌든 두 분이 서로를 사랑하신다니 그걸로 됐다고 정당화한 뒤 모른 척했다.

비록 어머니는 아버지가 마음에 안 들면 머리를 깨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화나면 현관부터 무릎으로 기어 들어오시긴 하지만, 하여간 서로 사랑하는 건 사실이다.

- 그러고 보면 강민혁이 깡은 대단해. 이정현하고는 그렇다 쳐도 정윤겸을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널 건들다니.

“대표님이 우리 어머니를 무서워해요?”

- 정윤겸 안 무서워하는 사람 없을걸? 나도 걔는 무서워.

“하긴, 가끔 어머니가 강 대표님 얘기 듣다 한번 만나면 손 좀 봐줘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 강민혁한테 그거 꼭 전해라. 그래야 덜 나대지.

“좀 이따 뵈면 얘기할게요.”

- 그래, 건투를 빈다. 아, 그리고 너 지금 강민혁 만나는 거 현규는 모르지?

“네.”

- 현규가 아버지한테 선물을 많이 준비했는데 잘하면 오늘 다 터지겠네.

“……선물요?”

- 응. 아마 곧 도착할 거야. 흥미진진해, 아주.

꽤 정신없는 하루가 되겠어, 라는 변호사님의 중얼거림과 함께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보안직원이 정중히 손을 내민다.

어서 내리라는 의미였다.

그 제스처에 변호사님께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대표실에 다 왔어요. 이만 끊을게요.”

- 그래. 그럼, 고생해라.

“네.”

깔끔하게 통화를 마무리한 뒤 씩씩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대표실로 향했다.

그렇게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역시, 피는 못 속인다.

강 대표를 눈앞에 둔 수현은 새삼 DNA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강제로 사람을 끌고 온 뒤 바로 앞에 서류 한 장과 인주를 꺼내놓은 채 서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는, 현규 형의 장년 버전 같았다.

외모도 외모지만 팔걸이의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의자에 기대 앉은 자세까지 현규 형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현규 형이 너 잘 걸렸다고 할 때의 포즈와 눈빛이었다.

“뵙기 힘든 분이네, 이 대리.”

“그렇네요.”

“참 잘도 도망다니더군, 쥐새끼처럼. 아니, 바퀴벌레라고 해야 하나?”

“제가 바퀴벌레처럼 보이는 건 인정하고 도망 다닌 것도 맞지만 그래도 일단 제 업무를 한 건데요. 그보다, 대표님은 입원하셨다고 들었는데 빨리 퇴원하셨네요.”

인사인지 따지는 건지 모를 그 말에 강 대표가 눈웃음을 흘린다.

싸늘하게.

“내가 왜 입원을 했을까?”

“고혈압 때문에요.”

“혈압이 왜 올랐을까?”

“고혈압의 원인은 여러 가지지만 일단 혈관이 좁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대표님 나이라면 이제 혈관 관리 하셔야죠.”

그러니까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안 돼요, 라며 안쓰러운 듯 강 대표를 바라보는 수현의 시선에, 강 대표의 눈썹이 꿈틀한다.

살짝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네가 뭘 아주 제대로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내 혈압이 솟구친 건 식습관 때문이 아니라 바로 너 때문이야.”

“……저요?”

“그래. 그러니까, 찍어.”

말과 동시에 고개를 까닥이는 그의 제스처에, 수현은 시선을 내려 앞에 놓인 서류를 바라봤다.

그러곤 2주 전의 아찔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점심시간에 구청에 끌려가 자기도 모르게 제 손으로 혼인 신고서에 사인했던 그날을.

그래, 그때는 진짜 이민 가려고 했지.

큰형이 회사까지 따라와서.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마치 전생의 일처럼 멀게 느껴지는 기억에 수현은 현규 형이 대표님 아들이 맞았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외모나 분위기는 무척 닮아 길거리에 세워 두면 서로에게 데려다줄 정도였지만, 성격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기질은 똑같다.

이 부자가 사이가 안 좋은 건 동족 혐오다.

“저기, 제가 진짜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요…….”

“그럼, 하지 마.”

이런 것도 똑같다.

하지만 이 사실은 절대 현규 형에게 말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걸 현규 형이 알면 충격을 받을 거다.

혹은 화를 내거나.

그러니 죽는 순간까지 가슴에 담아 두자고 다짐하며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해야 하니 할게요. 이거 문서 위조인데요…….”

‘협의 이혼 의사 합의 신청서’라고 쓰인 서류가 눈앞에 있는 건, 이미 최 변호사님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에 전혀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이걸 내밀었다는 사실에 대표님의 게으름과 허술함을 느낄 뿐, 타격감은 제로였다.

문제는 그 위에 빼곡히 기재된 현규 형과 자신의 개인 정보였다.

서류 위에는 유려한 글씨체로 두 사람의 이름과 주민 등록 번호뿐 아니라 주소와 연락처까지 완벽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걸 쓴 기억이 없다. 당연히 현규 형도 없을 거다. 지금 미국에 있으니까.

더불어 변호사들에게 이 서류 작성을 의뢰한 적도 없다.

그러니까 이건 엄연히 문서 위조, 그것도 유형 위조에 들어가는 범죄다.

더불어 현규 형의 개인 정보는 몰라도 자신의 개인 정보까지 적혀 있다는 건 어디선가 개인 정보가 유출됐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 출처는 회사일 가능성이 크다.

유형 위조도 그렇지만, 사내 개인 정보 유출 역시 생각보다 큰 범죄다.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이혼을 원하신다면 합의가 아니라 소송으로 가시는 게 나을 거예요. 이건 문서 위변조에 타인 명의 도용도 혐의 적용 가능하고, 개인 정보 유출까지 일이 아주 복잡해질 수도 있거든요. 특히나 변호사가 쓴 거라면 그 변호사님의 신뢰 손상도 상당할 거예요.”

아주 구체적으로 범죄의 범주까지 정해 주는 수현을 보며 강 대표는 눈웃음을 흘렸다.

눈을 사납게 번뜩이며 너 지금 장난하냐는 듯.

저것도 현규 형하고 비슷하다고 수현은 감탄했다.

지난번에 뵀을 때는 식단 짜느라 바빠 대표님을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는데 일대일로 직접 만나 보니 알겠다.

너무 닮았다.

“그건 네 알 바 아니니 지장이나 찍어.”

“적법한 과정에 의해 작성된 서류가 아닌데 지장을 찍으면 안 되죠. 그리고 전 이혼할 생각이 없거든요.”

위법에 동참할 수도 없지만, 본인 의사에 반하는 일에 동조할 수는 없다고 수현은 단호히 날인은 거부했다.

그건 정론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강 대표가 알 바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정론이고 나발이고 그냥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이 대리, 아니, 내 아들의 파트너니까 편하게 부르지. 친…… 아니, 하여간 동창의 아들이기도 하니까.”

“편한 대로 부르세요.”

“그래, 수현아, 네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거기까지 말한 뒤 자세를 바꿔 앞으로 몸을 숙인 강 대표는 수현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경고했다.

“이혼에 네 의사 따위는 필요 없어. 아니, 애초에 결혼에도 네 의사는 필요 없었어. 너희는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하면 ‘네.’ 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라면 ‘네.’ 하고 이혼하면 되는 거야. 너희에게 거부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생각도, 의지도, 없어도 돼. 아니, 있으면 불편하기만 하니 없는 게 좋지. 네 머릿속에서 그런 단어는 아예 소거해 버려. 넌 오메가니까.”

일부러 모욕하려는 듯 마지막 말에 강한 악센트를 싣는 대표의 위협에 수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저희 집은 안 그런데요?”

가족들의 간섭이 지나쳐 지긋지긋하긴 하지만 최소한 넌 닥치고 내 말대로 하라는 집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연애는 자유로운 편이고 결혼도 네 마음대로 하라는 쪽이었다.

실례로 혼인 신고 건도 순서도 뒤처리도 엉망진창이었지만 어쨌든 그 이후 가족들의 관심은 뚝 끊겼다.

큰형이 회사까지 찾아오는 참사가 벌어지긴 했어도, 자신은 성인이니 결혼을 한 이상 그 이상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그게 이씨 집안의 가풍이었다.

“저희 집에서는 이 결혼을 인정하셔서요. 그리고 절대 이혼은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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