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60)

그러니까 이혼을 원하는 건 그쪽 사정이고 난 이혼할 수 없다고 수현은 조곤조곤 강 대표에게 본인의 입장을 밝혔다.

그쪽 집안의 가풍이 결혼도, 이혼도 부모님이 정해 주는 거라면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그럼 이혼 강요도 현규 형에게 해야 하는 게 맞다.

자신에게 가풍을 핑계로 이혼을 요구하는 건 월권이다.

엄연히 자신은 ‘강’씨가 아니라 ‘이’씨다. 결혼했으니 그쪽 가문 규칙을 따르라고 할 거라면 이쪽 가문의 규칙 역시 존중해 줘야 한다.

그런 수현의 의견을 정확히 알아들은 강 대표는 역시나라는 듯 웃었다.

짜증을 참는 듯 뺨을 씰룩거리며.

“역시, 이정현 아들답게 더럽게 말 안 듣고 고집 세네.”

“자주 듣는 말이에요.”

과하게 솔직한 수현의 답에 강 대표는 기가 찼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일부러 기를 꺾으려고 한마디 할 때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니 할 말이 없다.

이쯤 되니 열받는다.

“……현규가 가끔 널 굉장히 짜증스러워하는 얼굴로 보던데 왜 그런지 이제 알겠네.”

나도 널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으니까, 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키며 강 대표가 겨우 표정을 풀고 웃는 순간 수현은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확실히 두 분이 많이 닮으셨어요.”

그러니까 날 보면 짜증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해맑게 웃는 수현을 강 대표는 황당해하는 눈길로 바라봤다.

그간 모은 정보로 애가 집안의 과보호 속에서 자라 눈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꽃밭이다.

거기다 애가 이상하게 기가 세다.

이정현도 기가 세긴 하지만 이런 느낌은 아닌데 미묘하게 말이 통하는 듯 안 통하면서 더럽게 논리적인 게…….

“……정윤겸…….”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에 강 대표는 스스로가 내뱉고는 질색했다.

그간 지긋지긋해서 떠올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떠올라 버렸다.

“……젠장…….”

정윤겸 같은 미친개와는 달리 애가 맹하니 순해서 친탁도 외탁도 안 한 돌연변이인 줄 알았는데 친탁 외탁 둘 다 했다. 그것도 가장 안 좋은 점만 골고루.

이정현의 남의 말 안 듣고 자기 생각만 하는 점과 정윤겸의 무신경하고 꼬박꼬박 논리적으로 말대꾸하는 점을 그대로 빼닮았다.

외모라면 끝내주는 둘 사이에서 참 희미하고 존재감 없는 얼굴이 태어났다 했더니 성격은 양쪽 집안의 완벽한 하이퍼 믹스다. 그것도 사람 환장하게 하는 조합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더는 수현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 아프다.

“됐고. 빨리 지장이나 찍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안 되죠.”

“왜 안 돼?”

“전 이혼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구간 반복이다. 계속 같은 대화의 도돌이표였다.

이것도 지긋지긋하다.

“네가 이혼할 생각이 있든 없든 상관없으니, 일단 찍어.”

“제가 하기 싫은데 왜요?”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다고 몇 번을 말해! 그냥 내가 하라면 하면 되는 거야.”

“왜요?”

“아, 진짜! 그냥 좀 해!”

“아니, 그러니까 왜요?”

태클을 거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진짜 ‘왜?’를 궁금해하는 표정을 본 강 대표는 속이 터진다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넌 왜요밖에 못 해?”

“그건 아니지만, 자꾸 궁금하게 하시니까요…….”

“그러니까 뭐가 궁금한 건데?”

“왜 제가 이혼을 해야 하는데요?”

“내가 너희가 결혼한 게 싫다고! 이정현하고 내가 한 하늘 아래 사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사돈이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문서 위조보다는 그쪽이 말이 되지 않을까요?”

그건 범죄고 이쪽은 그냥 기분 나쁜 것뿐인데, 라는 수현의 태연한 답에 강 대표는 저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이 대리!”

어디서 많이 들어 봤던 톤과 음성에 수현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와, 아버지랑 똑같으시네요, 이런 건.”

사람은 역시 자주 만나고 통화하면 닮나 봐요, 라고 수현이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인 순간, 강 대표가 충격받은 듯 목소리를 낮춘다.

“……내가 이정현하고 똑같다고?”

“네, 두 분 기질 자체가 비슷하세요. 그러니까 두 분이 싸우시는 건 동족 혐오…….”

거기서 더 말이 나오기 전에 강 대표는 재빨리 수현의 말을 끊었다.

“닥쳐! 어쨌든, 난 너희 둘 결혼을 절대 용납 못 해! 내가 싫은 것도 싫은 거지만 넌 애도 못 낳잖아! 후계자는 어쩔 건데? 우리 집안이 얼마나 손이 귀한 줄 알아? 우리 집안이…….”

거기까지 말하던 강 대표는 순간 아차 해 말을 멈췄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갔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무는데 수현이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핀다.

뭔가 할 말이 잔뜩 있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며.

어쩐지 그 시선에 죄책감이 느껴졌는지 강 대표가 지레 찔린 듯 거칠게 내뱉었다.

“뭐? 내가 못 할 말 했어?”

“아니…… 손이 귀해서 대표님이 그렇게 혼외자를 낳으셨구나, 해서요.”

그간 대체 저분은 왜 저따위로 사는 걸까 궁금했는데 손이 귀해서 그랬었나 보다, 하고 수현은 드디어 납득했다.

그래서 속이 시원한 듯 만족해하며 웃었지만 강 대표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너…….”

막 강 대표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휴대폰의 벨이 울려왔다. 그 소리에 휴대폰을 손에 든 그는 화면 위에 뜬 ‘천년 웬수’라는 이름을 보곤 기다렸다는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곧 휴대폰을 멀찍이 떨어트리자 역시나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려 퍼졌다.

-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우리 막내 불러다 뭐 하는 거야?

역시 아버지였구나, 라고 수현은 앞에 놓은 커피잔을 손에 들었다. 천년 웬수라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휴대폰 1미터 밖에서도 선명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현은 강 대표에게 불륨을 줄이라고 알려 주려 했지만, 그보다는 강 대표가 포효하는 게 더 빨랐다.

“너 말 잘했다! 대체 아들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 네 막내아들 말이 안 통해!”

- 어어? 너 지금 가족 건들기야? 내 아들 욕했어?

“가족 건드는 게 아니라 네 아들이 사람을 환장하게 하잖아! 누가 네 아들 아니랄까 봐 사람 말을 안 들어! 너 애한테 왜요밖에 안 가르쳤냐? 얘 때문에 내 혈압이 연일 상종가를 친다고!”

- 그게 왜 내 아들 탓이야? 네 아들 탓이지!

“너 남의 아들 건들기야?”

- 네가 먼저 건드렸잖아! 그런데 어쩌냐? 네 아들은 이제 우리 집 데릴사위 할 건데? 네 아들이 최대 주주니 이제 SJ도 한성이 먹겠네?

“누구 마음대로 데릴사위야? 오늘 내로 내가 얘들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

- 네 아들은 이혼 생각 전혀 없다던데? 우리 아들한테 푹 빠져서 평생 살 거라던데 어쩌냐?

“야, 이 새끼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 눈깔 없냐? 내 아들이 어딜 봐서 네 아들한테 반하겠냐? 그 반대겠지!”

- 그래 봐야 네 아들 내 사위지. 그리고 너, 오늘 아버지 유언장에서 방 빼기로 했다며? 네 혼외자들 때문에 재산 거덜 나겠다고 너희 아버지 앓아누우셨다더라?

설마 진짜 유언장에서 아웃당하신 건가 하며 수현은 남은 커피를 마시며 눈을 휘둥그레지게 떴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대표님을 건너뛰려는 건가 의아해하는 사이 대표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번 건 유효타였다.

사실인가 보다.

“재산 증여 하나도 못 받아서 아직도 아버지 카드 쓰는 놈이 누구 보고 뭐래?”

- 그러는 넌 카드도 뺏겼다며?

“난 내 재산 있거든?”

- 양육비 주고 나면 남는 거나 있냐?

우리 아버지지만 진짜 잘 깐족거린다고 수현이 감탄한 순간 어마어마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 왜?

“너, 당장 이리 와. 오늘 결판을 보자.”

- 좋아. 너 목 닦고 거기서 딱 기다려. 어디 가기만 해 봐!

“너나 제대로 찾아와. 오다 교통사고 핑계로 도망치지 말고!”

자신의 부친이지만 진짜 유치해서 못 들어 주겠다고 생각하며, 수현은 커피를 모두 마신 뒤 안에 든 얼음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 얼음을 살짝 깨문 순간 다시 화살이 이쪽으로 향했다.

“넌, 이 상황에서 커피가 넘어가냐?”

“……왜 먹는 거 갖고 그러세요…….”

“내가 속이 터져서 그래.”

“대표님이 화내셔서 그래요. 에어컨 켜세요.”

그러고 보니 사무실 안이 묘하게 덥긴 했다. 살짝 몸 안이 뜨거워지며 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방금부터 사무실 안에 풍기던 은은하던 향도 강해졌다.

“저기, 향수 네롤리 쓰세요?”

조심스러운 수현의 질문에 막 비서실에 얼음물 좀 가져오라던 강 대표가 신경질적으로 되묻는다.

“그건 왜?”

“냄새가…….”

별로예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타인에게 냄새 지적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느끼긴 했는데 사무실 안의 온도가 올라가서인지 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게 조금 역했다. 원래도 안 좋아하는 향이라 그런가, 지금은 좀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약간 부대끼는 느낌에 남은 얼음을 하나 더 입에 넣고 깨무는데 바로 문이 열리며 비서가 얼음물이 놓인 쟁반과 서류 봉투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먼저 잔을 건네자 바로 컵을 받아 든 강 대표가 넥타이를 풀며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그걸 기다리던 비서가 그의 앞에 서류 봉투를 내민다.

“대표님,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지?”

“방금 도착한 건데 먼저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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