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60)

한 장도 아니라, 석 장이었다. 그것도 딱 보기에도 여러 군데서 온 것 같은.

수현은 그게 뭔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하지만 모른 척하며 다시 한번 얼음을 아드득 씹는데 첫 번째 봉투를 열어 내용을 훑어보던 강 대표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가기 시작했다.

마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 중 첫 번째 ‘부정’의 단계를 밟는 듯한 그의 표정에 수현은 그를 관찰하듯 바라봤다.

아주 잠시 봉투와 서류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곧 두 번째와 세 번째 봉투를 모두 열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내용을 확인하던 중 마지막 서류를 확인한 순간의 그는 흡사 악귀가 들린 형상을 한 채였다.

문제의 소장이 맞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쯤 되면 숨도 쉬지 말아야 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에 이번엔 얼음을 씹지 않고 빨기만 했다.

“……이 망할 놈의 자식이, 기어이 나랑 해 보겠다고?”

소장을 손에 든 채 이를 세게 악문 강 대표가 순간 성질에 못 이겨 소장을 테이블 위로 내팽개쳤다. 그러곤 다시 한번 남은 얼음물을 들이키는 모습에 수현은 그가 ‘분노’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시선을 피한 채 조용히 얼음을 빨았다.

이상하게, 사무실 안이 덥다.

그리고 어쩐지 피부 위가 저릿한 느낌이었다. 꼭 정전기가 이는 것처럼, 아니면 몸살에 걸린 것처럼.

“현규한테 당장 전화해.”

순간 수현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작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착신 거부 걸렸을걸요…….”

작은 수현의 목소리에 강 대표가 그제야 기억이 돌아온 듯, “그랬지. 빌어먹을 착신 거부.”라고 짜증을 내며 다시 정 팀장을 돌아본다.

“정 팀장 번호로 해.”

“……팀장님 번호도 착신 거부 걸려 있을 거예요.”

그러니 괜히 고생하지 말라고 수현이 친절하게 먼저 알려 주자 강 대표가 버럭 고함을 지른다.

“그럼, 장 대리한테 해!”

“장 대리가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장 받고 혹시나 해서 연락해 봤는데 연결이 안 됩니다.”

장 대리가 그 쥐새끼인가, 떠올린 수현은 순간 저도 모르게 작게 “아, 그…….”라고 내뱉다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시선은 수현에게 향한 채였다.

“이 대리, 뭐 알지?”

분명 짚이는 바는 있었지만 수현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전혀요. 형 출장 갈 때 같이 간 분이 장 대리님이구나, 해서요. 그보다, 전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이제 근무 시간이라서요.”

이 김에 사무실로 돌아갈 셈으로 수현이 은근슬쩍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려 하자, 강 대표가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아래로 쭈욱 내린다.

앉으라는 뜻이다.

“…….”

이런 제스처도 현규와 닮아 수현은 반사적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순간 강 대표가 다시 묻는다.

“현규랑 통화할 때 무슨 얘기를 했지?”

“그건 법적으로도 보장되는 부부간의 사적인 대화라 유출할 수 없는데요.”

“닥치고 말해. 너, 여기서 또 왜요라고 하면 이번엔 진짜 혼날 줄 알아.”

호통을 치는 무시무시한 그의 기세에 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별로 말해도 상관없는 내용이긴 하다.

그냥 매일 하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주로 먹는 얘기 위주의…….

“특별한 내용은 없었어요. 그냥…….”

“그냥?”

뭐든 빨리 얘기하라는 강 대표의 채근에 수현은 얼음을 입 안에서 굴리다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다.

“……그냥, 형 한국 오면 먹고 싶은 거 얘기하는데 돌아오면 절 먹고 싶다고 해서 그럼 안 된다고 한 것 정도…….”

듣기에 따라 상당히 노골적인 음담패설에 강 대표는 질색했다.

“내 아들 성생활 따윈 알고 싶지 않으니 그런 거 빼고, 평소랑 뭐 다른 점 없었어? 다른 소리나 멀리서 들린 대화나.”

구체적인 예시에 수현은 다시 깊이 생각에 잠겼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음…… 오늘은 그냥 전화가 아니라 영상 통화를 했는데요…….”

“영상 통화?”

“네.”

“아, 선물 보냈으니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형 뒤의 배경이 하얗긴 했어요. 호텔치고는 작고 또 차치고는 크고…… 천장이 되게 낮은 느낌이었는데…….”

그래, 꼭 비행기 같았다고 수현이 오늘 좀 이상했던 배경을 떠올렸다. 대형 리무진일 수도 있지만 그건 자신이 안 타 봐서 알 수 없고…….

어쨌든 일반적인 건물이나 차는 아니었다고 수현이 얼음을 빨며 회상하는 사이 강 대표와 정 팀장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곤 뭔가 떠오른 듯 강 대표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전용기 확인해! 아니, 그냥 공항에 확인해. 그 새끼 몰래 들어오는 거야!”

“전용기 확인해! 아니, 그냥 공항에 확인해. 그 새끼 몰래 들어오는 거야!”

“네.”

“형, 와요?”

바삐 사무실을 나가는 정 팀장을 보던 수현이 입꼬리를 잔뜩 올린 채 묻자 휴대폰을 확인하던 강 대표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 빌어먹을 새끼가 기어이 나랑 해보겠…….”

거기까지 말하던 강 대표는 문득 시야에 들어온 수현을 보곤 인상을 썼다.

수현의 입꼬리가 심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주 기쁜 듯, 하지만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얼굴로.

“넌 또 뭐가 좋다고 웃어?”

“……제가 웃었나요?”

“그래, 입 찢어지게.”

“아…… 얘가 왜 이러죠, 자꾸. 눈치 없게…….”

민망하긴 한지 뺨을 문지르면서도 수현의 입꼬리는 내려가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도저히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수현의 얼굴에 강 대표는 각목으로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듯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설마, 했다.

진짜, 혹시나, 설마…….

“너희 둘, 설마 진짜…… 서로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서로는 모르겠지만 전 좋아할 거예요, 아마.”

상당히 확신이 부족한 말투이긴 했지만 수현의 표정에는 거짓이 없었다. 아니, 수현은 거짓말을 더럽게 못한다. 다 티가 난다.

현규가 사실이라고 했을 때는 오히려 그래서 믿기 어려웠지만 수현의 말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강 대표는 또 한 번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다.

“……미치겠네……. 이게 그럼, 어떻게 된 거야? 너희 진짜 연애 결혼이라고? 나 엿 먹이려고 한 게 아니라?”

그럼 내가 지금까지 헛짓거리한 거냐는 강 대표의 물음에 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원래도 솔직한 얼굴이다 보니 말로 하지 않아도 얼굴이 자백하고 있을 거다.

그건 사실이라고.

그래서 시선을 피하며 다시 얼음을 입에 넣고 딴청을 하자 강 대표가 예리한 시선으로 수현을 바라본다.

어서 이실직고하라는 듯.

그 시선이 따갑다. 찔리는 바가 있기에 더욱.

그래서, 현실 도피를 택했다.

“저, 사적인 대화는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곧 회계팀하고 미팅이 있어서 이만…….”

이번엔 진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에 수현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사무실을 나가려 재빨리 걸음을 옮기는데 그때를 놓치지 않고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선 강 대표가 수현의 후드를 잡았다.

“가긴 어딜 가? 너희 사실대로 다 얘기해! 무슨 속셈이었는지!”

“아무 속셈도 없어요. 저, 이제 진짜 일해야 돼요.”

“윤 팀장 시켜.”

“팀장님 그런 거 못 해요. 안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못 해서 어차피 제가 나중에 뒤처리 다 해야 돼요!”

그럴 거면 그냥 한 번에 내가 하는 게 낫다고 수현이 고집을 피우자 강 대표가 수현의 후드를 더욱 세게 당긴다.

“그러니까, 그것만 말하고 가라고! 너희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건데?”

양심을 푹 찌르는 그 질문에 수현이 움찔한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전화벨이 울려 왔다.

이번엔 수현의 휴대폰이었다.

“저, 업무 전화예요! 받아야 돼요!”

누군지도 모른 채 대충 둘러댄 수현은 화면에 뜬 ‘삼촌’이라는 이름에도 일단 수신 버튼을 누르곤 멋대로 통화를 시작했다.

“네, 시스템 개발팀 이수현 대리입니다. 제가 지금 자리…….”

- 너, 지금 입구로 나가서 정현 형부터 막아.

“……응?”

- 정현 형, 지금 너희 회사로……

바로 그 부분에서 쾅 하는 소음이 울려와 대화가 끊겼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문 쪽을 보는데 열린 문틈으로 아주 잘 아는 얼굴들이 시야에 잡혔다.

진짜 오랜만에, 그러니까 6월에 생신 때 잠깐 뵌 뒤 4개월 넘게 통화만 하던 아버지와 얼마 전 회사에 들이닥쳤던 큰형, 그리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끌려온 것 같은 둘째 형.

“아…….”

그제야 기억났다.

우리, 아니 아빠 회사가 여기서 차로 5분 거리였지…….

사이도 안 좋은데 왜 본사는 가까이 있어서는…….

한쪽이라도 다른 데로 이사 좀 가지.

- ……갔어?

도저히 안 들렸을 수가 없는 소리에 삼촌은 참담한 듯 물었고, 자신은 솔직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왔어.”

- 미치겠네…….

진짜 환장할 것 같은 삼촌의 탄식 뒤로 지긋한 나이에도 어마어마한 덩치에 과하게 잘생긴 얼굴을 들이민 아버지가 척척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곤 순식간에 이쪽으로 온 아버지가 자신의 후드를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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