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정하면 정략결혼이지 뭐가 아냐?”
“우리는 가족이잖아!”
“야, 이 미친놈아! 가족끼리 결혼을 왜 해? 우리나라는 근친혼 금지야!”
꽥꽥 거리며 싸우는 두 사람의 멀리에 선 수현은 방패처럼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해준의 옷자락을 세게 틀어쥐었다.
몸이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좀 덥고 피부가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는데 사무실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이젠 더워 숨이 찰 정도였다.
아니, 더운 게 아니다.
몸이 뜨겁다.
그리고 아랫배가 너무 무거웠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애초에 이게 다 네가 갑자기 네 아들을 서재민 아들이랑 결혼시키려고 해서 그렇게 된 거잖아?”
“내가 주영이랑 해준이가 결혼 얘기 중인 줄 알았냐? 서재민이 슬슬 주영이랑 현규 결혼시키자고 하니까 오케이한 거지?”
“나중에라도 알았으면 네 선에서 정리했어야지!”
“이쪽 결혼 전에 해준이랑 막내 결혼시키겠다고 결혼식장 씨를 말려서 사람 약 올린 게 누군데? 너흰 청첩장까지 찍었다며?”
“그건 너희 둘이 사람 엿 먹이니 빡쳐서 그런 거지! 해준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내가 설마 진짜 수현이랑 결혼시키겠냐? 수현이는 애가 좀 모자라 보여도 지구가 멸망해도 혼자 잘 살 애라 걱정 없지만, 해준이는 우리 집 제일 아픈 손가락이야! 서재민이 강짜 부리면 걔가 노리던 우리 어패럴까지 넘길 생각이었다고!”
최악의 상황에는, 한성에서 가장 공들여 키우고 있는 한성 모직의 지분을 지참금으로 보낼 생각이었다는 정현의 짜증에 순식간에 강 대표의 기세가 꺾였다.
당황함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야! 그럼 미리 말을 했어야지! 그럼 나도 적당히 치고받는 척하다 발 뺐지! 그럼 이 지경까지는 안 왔을 거 아냐?”
“너랑 대화가 되냐?”
이제야 풀린 오해에 두 사람이 조금 목소리를 낮춘 순간 난데없이 지수가 대화가 끼어들었다.
“그건 아니지, 아빠! 한성 모직 나 준다고 했잖아!”
“꿈이라도 꿨냐?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건 원래 해준이 거였어.”
“아니지! 할아버지가 그거 수현이 준다고 해서 내가 나한테 달라고 했잖아! 수현이는 어차피 사업 못 한다고!”
억울한 듯 발을 동동 구르는 지수의 뒤통수를 진원이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넌 더 못 해, 이 자식아. 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건물주나 해.”
“내가 뭘?”
두 아들의 난입에 정현은 작게 혀를 차며 이 문제와 하등 상관없는 유산 문제를 정리했다.
“어패럴은 해준이 거 맞아. 주면 해준이가 안 받을 거라 할아버지가 어차피 둘이 결혼할 테니 수현이 준다고 한 거였지.”
한성 모직 자체가 해준이가 옷 좋아한다고 할아버지가 어마어마하게 돈 들여 키워 놓은 거였다는, 아무도 모르던 사업 비화에 강 대표가 다시 버럭 고함을 지른다.
“결국 둘이 결혼시킬 생각이었네?”
“옛날에는 그랬다고! 원스 어폰 어 타임! 몰라?”
그렇지 않아도 목청 큰 어른들의 복식 호흡을 동반한 고함에도, 수현의 귓가에서는 그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 커 주변의 다른 소음이 모두 먹히고 있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 지독한 갈증과 함께 아랫배 깊은 곳이 저릿한 그 느낌에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이론으로는 이런 증상을 들어 본 적이 있다.
아래쪽이 젖어 들며 구멍이 욱신거리고 몸이 열기에 들뜨는 그건, 분명 발정기의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발정기야 올 수 있다 쳐도, 지금 이 사무실 안에 알파만 다섯 명이다.
그 다섯 명 모두가 발정기가 왔다는 걸 모를 수 없다.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 당황할 틈도 없이 왈칵 하며 아래쪽으로 애액이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전신이 경련하듯 떨리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순간 더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건 발정기다.
그래, 머리로는 알겠다. 하지만 실전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수현은 본능적으로 해준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그 신호에 그제야 강 대표와 정현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던 해준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듯 뒤를 돌아봤다.
“……수현아?”
“……삼촌, 나…….”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쥔 채 아랫배를 끌어안은 수현을, 해준은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봤다.
“어디 아파?”
“배…….”
“배가 왜?”
하지만 수현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몸을 떨며 웅크렸다. 복통인 게 분명해 보이는 자세에, 수현의 아랫배를 보던 해준은 살짝 얼룩이 밴 하의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다.
그래, 이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수현아, 너…….”
“이건 또 무슨 일이죠?”
갑자기 대두된 유산 문제로 소강 상태를 지나 다시 아수라장이 된 사무실 안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독히도 차갑고 차분한, 다소 나른하기까지 한 그 음성에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졌다.
정신없이 일렁이던 공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정체되었다.
마치 환기하듯 바뀐 그 분위기에 진한 남색의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성큼 안으로 들어선 현규는 해준의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손을 뻗었다.
“그거, 저 주시죠, 형.”
“……수현이가 지금 몸이 안 좋은 모양인데…….”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해준은 본능적으로 수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동네에 미친개가 나타났을 때 산책 중이던 강아지를 품에 안아 보호하듯.
하지만 그 미친개는 그게 상당히 눈에 거슬린 듯 웃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아주 예쁘게. 그리고, 소름 끼치게.
“이제 인수인계하셔야죠.”
“…….”
“사용 설명서까지 보내셨으면 이미 동의하신 겁니다. 제 거, 주세요.”
현규는 당당하게 수현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거 이젠 내 거니까 어서 내놓으라고 협박하며 손을 까닥이는 현규의 손짓에 해준은 난감한 듯 수현을 내려다봤다. 그러곤 정신 없이 몸만 떨고 있는 수현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수현아, 현규 왔는데…….”
해준의 다정한 음성에 그에게 달라붙어 있던 수현이 그제야 현규의 존재를 눈치챈 듯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로 현규를 발견한 수현은 망설임 없이 해준의 옷을 잡은 손을 놓고 현규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할 틈도 없이 수현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지독할 정도로 강한 향에 현규는 아찔해져 오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이미 사무실 밖에서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바로 피부가 닿은 상황에서 느끼는 페로몬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어지간해서는 오메가의 발정기 페로몬에 동요하지 않는 자신조차도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이 상황에서 아무도 수현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했지만 일단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래, 착하다.”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수현의 머리에 입을 맞춰준 현규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수현의 머리에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
“수현이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가능하면 제 거엔 손대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제가 손타는 걸,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가족이든 누구든 그건 마찬가집니다. 특히 아버지는 더더욱요.”
나 분명히 경고했다, 라고 말하는 현규의 입매는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잔 경련이 일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조금만 더 건들면 뒷일은 난 책임 못 진다고 말하는 듯 유난히도 사나운 현규의 눈빛에 다들 침묵하는 사이 강 대표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해명부터 해야지. 너희 계약 결혼 한 거 다 들켰어.”
수현이라면 당연히 곧 들킬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도 굉장히 빨리 들킨 수현의 머리를 현규는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어 줬다.
금방 들킨 것도 멍청해서 귀엽다.
“……누가 그러던가요?”
“이 대리가 자백했어.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다른 것도 아닌 혼인 신고로 부모한테 사기를 쳐?”
네가 제정신이냐고 호통을 치는 강 대표의 음성에는 패기가 없었다.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에서는 조금의 힘도, 기백도 느껴지지 않아 우습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자의식 과잉도 지나치면 병이에요. 제가 사기를 친 건 사실이지만 그 건의 피해자는 수현이지, 아버지는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전 아버지한테 그 정도로 관심 없습니다.”
사기를 치든 엿을 먹이든, 그것도 상대에게 관심이 있어야 할 의욕이 나지 평생 서로 데면데면하니 생존 신고만 하고 살아 온 관계에 무슨 애증 소설을 쓰냐는 듯 현규는 질색하는 눈빛으로 강 대표를 바라봤다.
한심함과 짜증이 담긴 그 시선에 강 대표가 혼란스러운 듯 인상을 쓴다.
“대체, 뭐야? 이 대리는 계약 결혼이라던데?”
“결혼이라는 게 어차피 다 계약이죠.”
그래서 계약서 대신 혼인 신고서 쓰고 국가에 제출해 공증받지 않냐는 현규의 괴변에 강 대표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진다.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시작이 어떻든 결론만 좋으면 되잖아요.”
과정 따위 알 게 뭐냐고, 현규가 짜증을 내자 강 대표가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현규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완전히 현규에게 낚인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수현이.
“그럼, 뭐야? 진짜 너희가…… 그…….”
“제가 두 번씩 같은 말을 해야 합니까?”
한 번 말하면 알아들어야지 같은 얘기를 몇 번을 반복하게 하냐며 혀를 찬 현규는 갑자기 수현이 목을 끌어안자 놀라 수현을 내려다봤다.
“왜?”
“형, 집에 갈래요…….”
숨이 가쁜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수현의 목소리에 현규는 괜찮다는 듯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래. 가자,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