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60)

처음 수현에게도 말했지만 아무리 어른들의 성격이 괴팍하더라도 아들들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 채 무조건 진행할 분들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으면 수현과 자신은 이미 8년 전에 결혼식을 올렸으리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들에게는 끔찍한 사람들이니 적당히 눈치 보며 비위 맞추고 기다렸으면 다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다.

특히나 현규는 그냥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둘이 아주 기괴한 해결책을 들고 와 이상하다 했다.

그래, 현규도, 수현도 그때 안 하던 짓을 했다. 그래서 좀 더 파고들었고 그 덕에 곧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술과 과로, 그리고 그놈의 짝사랑이었다.

“이제 이해하셨을 테니 둘 이혼시키는 건 포기하시고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뭐, 제가 굳이 말 안 해도 조만간 포기하게는 되실 거예요. 계속 반대하시면 현규가 형들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유학 시절 자신에게 보인 싸가지를 생각하면 아버지고 뭐고 수틀리는 순간 어떤 미친 일이든 벌일 수 있는 사람이 강현규였다.

그러니 눈치껏 알아서들 하라는, 현규의 싸가지를 경험해 본 해준의 친절한 충고에도, 강 대표는 포기를 몰랐다.

“하긴 무슨 짓을 해? 아무리 그래도 자기 아비한테!”

“궁금하시면 계속 해 보시든가요.”

겪어 봐야 안다면 난 굳이 안 말리겠다고 해준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강 대표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짚이는 게 너무 많아, 해준에게 차마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눈치였다.

“자, 그럼 됐죠? 전 사무실에 복귀해야 하니 가 보겠습니다. 형은?”

같이 갈 거냐고 묻는 해준의 시선에 정현이 피곤한 듯 미간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내젓는다.

“난 이 녀석하고 대화 좀 하고 갈 테니 너희 먼저 들어가.”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젠 취미를 넘어 하루의 루틴이 된 싸움박질은 그만하고 진지하게 두 집안 사이의 결혼 문제에 대해 의논해야 할 때였다.

아무리 철이 없고 성격이 지랄 같아도 그쯤은 안다고 정현이 한숨을 내쉬자 해준은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럼. 두 녀석이 얼렁뚱땅 사고는 쳐 놨는데 식도 안 올렸고 신혼집 준비도 그렇고, 아직 상견례도 안 했으니까 이 김에 형들끼리 상의해서 날짜 정해.”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 둘 때는 몰랐는데 막상 정식으로 일을 정리하려 하자 보통 복잡한 게 아니다.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게 골치 아픈지 정현은 목뒤를 꾹꾹 주물렀다. 이런 게 처음이라 뭐부터 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얼굴이었다.

정식으로 결혼 발표까지 하려면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하니 정현의 단순한 성격에 머리가 깨지긴 할 거라, 해준은 안쓰러운 듯 그의 의형을 바라보며 다른 조카들에게 손짓했다.

“지수, 진원이 너흰 빨리 일어나.”

그 말에 지수와 진원이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서 해준을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허리케인이 스치고 지나가 폐허가 된 듯한 분위기의 대표실을 나온 세 사람은 텅 빈 비서실을 지나 곧 복도로 나섰다.

불쌍한 비서팀 직원들은 모두 사무실에서 쫓겨나 휴게실에 노트북을 들고 근무하는 중이었다.

남의 회사 대표실까지 따라와 그 난리를 친 건 미안하지만 해준은 이번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대표실은 방음이 잘 돼 문만 닫으면 안쪽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 비서실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두 어른의 목청이 워낙에 좋은 탓이었다.

게다가 대화 내용이 아무리 비서팀 직원들이라도 타인이 듣기엔 너무 사적인 주제였고, 만에 하나라도 여기저기 소문이 나면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이야기들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이해 안 되면 굳이 이해하지 마.”

여전히 꿍얼거리는 지수에게, 너 이해하라고 한 얘기 아니라며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해준은 목을 주물렀다.

1시간 동안 대화한 것뿐인데 한 사흘은 철야를 한 듯 피곤했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일을 마치면 곧장 퇴근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도비, 주영과 실내 데이트나 하며 쉴까 하는데, 뒤에서 따라 걷던 지수가 휴대폰을 꺼내 든다.

“역시, 현규한테 직접 확인해야겠어.”

좋아하는 스타의 열애설을 접한 그루피라도 된 듯 집요하게 현규와 접촉하려는 지수의 이상 행동에 해준은 많이 모자란 데다 눈치도 없는 둘째 조카를 안쓰럽다는 눈길로 바라봤다.

잘도 현규가 전화를 받겠다.

수현이만 봤을 때는 설마 했지만 수현이를 안아 든 현규의 반응을 본 뒤 확신했다.

수현이에게 첫 발정기가 시작됐다는 걸.

그러니 지금 그 둘이 뭘 할지는 뻔했다. 현규 성격이라면 아마 휴대폰 전원 끄고 인터폰까지 다 꺼 놨겠지만 혹시라도 연락이 된다면 연락한 상대를 조져 놓을 거다.

본인의 미래도 모르고 씩씩거리며 전화를 거는 지수를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해준은 이것도 인생의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곧 하행 버튼을 누르는데 계속해서 번잡스럽게 움직이던 지수가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전화 안 받아! 둘 다!”

“……그렇겠지…….”

전화를 받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 심드렁하니 맞장구친 해준이 엘리베이터의 번호판을 올려다보는데, 지수가 생뚱맞은 말을 꺼냈다.

“수현이 오피스텔 여기 바로 옆 건물이지? 대동 빌딩인가?”

그 말에 혹시나 하며 해준이 지수를 돌아봤다.

“너 설마…….”

거기를 찾아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수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게 맞으니까.

“아, 몰라! 난 일단 확인해야겠어. 내 눈으로 봐야 알겠으니까 갈 거야.”

“너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알아?”

“어쨌든! 그리고 삼촌은 걱정도 안 돼? 강현규가 수현이를 얼마나 잡을지?”

그 새끼 성질머리 더러운 거 모르냐고 지수가 발을 구르는 모습에 해준은 세상 차갑게 중얼거렸다.

“전혀.”

궁금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수현은 자신이 아기 때부터 거의 자식처럼 키운 아이인데 그런 아이의 성생활 따위는 죽을 때까지 모르고 싶다.

그러니, 난 조금도 관심 없다고 딱 잘라 선을 긋자 지수가 충격받은 듯 눈을 크게 뜬다.

“와, 삼촌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사람이었네. 어떻게 삼촌이 그럴 수가 있어? 수현이 걱정도 안 돼? 삼촌 자식이라며?”

그러니까 알고 싶지 않은 거라고 하려는데 사무실에서부터 계속 침묵하던 진원이 문득 대화에 끼어들었다.

“삼촌, 나도 가 볼래. 먼 거리도 아니고 바로 옆 건물인데 일단 두 녀석 보고 대화 좀 해야겠어.”

해준을 믿긴 하지만 그래도 당사자인 두 놈한테 반드시 해명을 듣고야 말겠다는 진원의 기백에 해준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꾹꾹 눌렀다.

지수는 끈기와 근성이 없어 내버려 두면 알아서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다. 그러니까 무시하면 된다. 하지만 진원은 본인이 납득할 때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질기기로라면 거머리의 DNA를 물려받은 게 분명하다고 할 정도로 근성 있는 녀석이라, 한번 하겠다고 한 이상 말릴 수 없다.

진원은 집 앞까지 쫓아갔는데 문 안 열어 주면 열쇠공 불러 문 따고 들어가고도 남을 녀석이다.

전혀 다른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성격이 급하다는 공통분모를 가진 애물단지 형제를 보며 해준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너희 마음대로 해라.”

현규가 알아서 하겠지.

아니라도 알 바 아니니까.

* * *

가을 오후의 햇살은 몹시 나태했다.

높고 따갑게, 피부를 찌를 듯 내리쬐던 햇살이 어느 순간 노곤하게 낮게 가라앉았다.

유난히 노랗고 나른한 햇살이 내려오는 침대의 헤드에 기댄 현규는 기절하듯 잠이 든 수현을 품에 안은 채 계속해서 수현의 몸 여기저기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뺨과 이마, 그리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다 어깨를 깨물고, 그러다 이번엔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이 냄새를 맡고…….

두 번의 사정 후 다소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렬하게 남은 페로몬에 현규는 아찔함을 느꼈다.

수현의 페로몬은 연한 우드 향이었다.

부드럽게 풍기는 연하고 달콤한 향을 음미하며 깊이 숨을 들이마신 현규는 목덜미를 다시 한 차례 물어뜯은 뒤 엉망으로 흘러내린 수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솔직히 두 번으로는 부족하지만 오랜만이라서인지 이렇게 평화롭게 잠든 수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도 좋았다.

정확히 이틀 만이다. 48시간.

그 48시간 중 비행기를 탄 시간이 20시간이라는 건, 사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미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마침 오늘 돌아왔기에 망정이지 예정대로 내일 돌아왔을 걸 생각하니 아찔하다.

다행히, 각인이 된 건지 다른 알파들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았지만 수현이 내일 오후까지 혼자 앓았을 걸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해준 형은 눈치를 챈 것 같았으니 알아서 약을 챙겨 주긴 했겠지만, 그건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각인이 된 상태라 해도 발정기 중에 다른 알파가 손을 대는 건 싫다.

그건 자신이 아니라 어떤 알파라도 싫어할 거다.

그나마 엄마 같은 해준 형이라 참은 거다.

“진짜 손 많이 가, 너.”

뭐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녀석이 다 있나 하며 다시 수현의 눈가에 입을 맞추는데 모처럼의 나른한 평화를 깨는 소음이 울려 왔다.

전화벨이었다.

듣기만 해도 불쾌한 그 소리에 현규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노려봤다.

문밖에 흘리고 온 옷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차피 그 사무실 안의 인간들이 조용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참 의외성이라는 게 없다. 더불어 더럽게 눈치들도 없다.

“젠장…….”

그냥 무시하자니 신경에 거슬리기도 하고, 어차피 처리할 문제들도 있는 터라 작게 한숨을 내쉰 현규는 수현을 품에 안은 자세 그대로 몸을 돌려 수현을 침대 위에 눕혔다.

아직 삽입한 상태라, 자세를 바꾸는 순간 성기가 내벽에 짓눌렸다.

마치 성기를 조여 대는 느낌에 다시 발기할 것 같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간신히 참아냈다. 그러곤 곧 천천히 성기를 꺼냈다. 느릿한 그 움직임에도 잠든 수현은 작게 신음하며 몸을 뒤틀었다.

수현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전부 성기를 빼낸 순간 성기와 함께 몸 안에 남은 정액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기껏 안에 싼 게 흘러나오는 게 아까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입맛을 다신 현규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그사이에도 전화벨은 빽빽거리며 울려 대고 있었다.

지긋지긋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착실하게 원한 포인트를 쌓아가고 있었다.

구현이 발정기 끝나고 두고 보자고 다짐하며 침대에서 일어선 현규는 나이트가운을 걸친 후 침대 위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방을 나와 좁은 거실을 돌아봤다.

예상대로 벨소리의 진원지는 현관 바로 앞에 던져둔 자신의 트렌치코트였다.

귀찮다는 생각에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코트를 들고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자 또 한 번 빼액거리는 느낌의 벨 소리가 울렸다.

빨리 받으라고 외치며 용트림을 하는 듯한 휴대폰 화면에는 정직하게도 ‘이지수’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그 이름을 본 순간 망설임 없이 거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곧장 장 대리 및 해외에서 고생하고 있을 부대표님의 비서팀과 팀원들의 번호를 제외하곤 모조리 착신 거부를 걸었다.

순식간에 휴대폰을 정리한 현규는 이번엔 인터폰의 전원을 끈 뒤 현관문의 걸쇠를 잠갔다. 그리고 하는 김에 현관에 벗어 놓은 수현의 허물을 들어 올려 그 앞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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