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60)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현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 위에 뜬 이름은 ‘철벽’이었다.

이것도 이지수다.

어차피 이지수는 얼마 못 가 포기할 거라 이번에도 역시 거절 버튼을 누르고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대신 자신의 휴대폰으로 시스템 개발팀의 윤 팀장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 대리 오늘부터 일주일간 발정기 휴가 들어갑니다. 남은 유급 휴가와 월차, 병가 전부 써 주세요.]

언뜻 내용은 정중해 보이지만 우리 바쁘니 네가 알아서 서류 써서 보고하라는 의미였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윤 팀장은 잘 알아들을 거라고 자의적으로 판단 내린 현규는 곧장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바꾼 뒤 그사이 온 연락을 확인했다. 대부분 업무 관련 내용이라 간단한 지시와 함께 오늘부터 일주일간 휴가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하나씩 메시지를 처리하다 보니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최 변호사님의 메시지였다.

[괜찮을 것 같지만 일단 예의상 물어볼게. 수현이 괜찮냐?]

수현이 아버지에게 끌려갔다는 걸 전해 준 최 변호사님의 걱정에 괜찮다고 답한 뒤 막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삑삑거리는 기계음이 울려 왔다.

도어록 소리였다.

누군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바로 옆 건물이니 이지수가 온 거다.

얼굴을 보고 내쫓을까, 무시할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삐익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밖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려 왔다.

“야, 이거 뭐야? 문 왜 안 열려? 어? 이수현 통장 비번까지 삼촌 생일인데?”

역시 이지수다. 벨을 누르다가 안에서 안 열어 주니 비번을 치고 들어올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네가 이렇게 문 열고 들어올까 봐 바꿨나 보지.”

“아니, 그래도 말이 안 되지! 이수현은 삼촌 애기잖아! 그런데 비번을 바꾼다고? 그게 말이 돼?”

“다 큰 지가 언젠데? 벨 눌러도 반응 없는 거 보니 집에 없는 모양인데 그만 가자.”

“아니, 아니! 그게 말이 안 되잖아! 그 마마보이도 아니고 세상에 다시 없을 엉클 보이가 삼촌을 버리고 강현규로 갈아탔다고? 진짜?”

365일 중 364일은 마음에 안 드는 게 이지수인데, 오늘의 이지수는 365일 중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1일의 이지수인 듯했다.

갈아탔다는 표현은 별로지만 어쨌든 수현이 엉클 보이를 탈출해 해준 형을 버렸다는 말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갈아탄 게 아니라, 결혼한 거야.”

“으악! 말하지 마! 알고 싶지 않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이건 현실이 아냐! 그 모지리 새끼가 결혼이라니! 그냥 삼촌한테나 붙어 살지!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으악, 싫어! 끔찍해! 그 모지리 새끼가 결혼은 왜 하냐고?”

“뭘 새삼? 결혼한 건 알고 있었잖아.”

“머리로 아는 거랑 눈으로 보는 거랑 다르지! 강현규가 애를 안고 갔잖아! 그러고 가서 둘이 뭘 하겠냐고? 악! 아냐! 알고 싶지 않아!”

걱정을 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이지수는 남의 집 앞에서 열정적으로 독백쇼를 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거기서 쇼를 하든 굿을 하든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 김에 확실하게 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도어록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곧 문을 열자 복도에 서 있던 남자 셋이 동시에 이쪽을 돌아보다 멈칫한다. 그와 거의 동시에 걸쇠에 걸린 문이 멈췄다.

“여전히 버릇이 없네, 이지수.”

싱긋 웃으며 현규는 죽고 싶냐는 말을 돌려 했다. 하지만 지수에게는 지금 그 말의 내적 의미를 파악할 정도의 눈치와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진원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현규는 누가 봐도 나 지금 섹스 중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상태였다. 엉망이 된 머리나, 나체 상태로 나이트가운만 걸치고 있다는 것도 그랬지만 온몸에서 페로몬과 정액 냄새가 진동해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베타라도 눈치챌 거다.

수현이 빼고.

“하던 일이 바빠서 오래는 못 있으니 짧게 얘기할게. 앞으로 일주일간 이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마. 전화도 하지 말고 메시지도 보내지 마. 물론, 착신 거부를 걸어 놨으니 받지도 않겠지만, 그 전에 하지도 마. 하면 어떻게 되나 궁금하면 해 봐. 직접 겪어 봐야 안다면 겪게 해 줄 테니.”

그 말에 찍소리 못 하는 지수를 보며 현규가 이번엔 해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건, 해준 형이나 진원 형한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겁니다. 그리고 들으신 김에 이 대표님과 우리 아버지께도 전해 주시고요.”

현규의 입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 위로는 은은한 광기가 돌고 있었다.

이럴 때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기에 해준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수현이는? 괜찮아?”

“잠깐 기절했어요.”

그 말에 지수가 다시 버럭 고함을 지른다.

“야, 너 우리 모지리한테 무슨 짓 한 거야?”

“무슨 짓 했으면?”

네가 어쩔 건데, 라고 묻는 듯한 현규의 시선에 지수가 입을 꾹 다문다.

어떻게 할 건 아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 물어본 것뿐이지.

“수현이는 처음이라 힘들 테니 무리하게 하지 마. 임신 조심하고…….”

“알아서 합니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민혁 형이 정자 왕이라…….”

너도 엄청 임신 잘 시킬 것 같다고 해준이 걱정하자 현규가 그건 기분 나쁘지 않은지 부정하지 않는다.

“할 말 다 하셨죠? 그럼 이만 가시죠.”

“야, 수현이 좀 보고 갈게. 얼굴만…….”

그래도 동생이라고 걱정은 되는지 잔뜩 겁에 질린 주제에 밀고 들어오려는 지수를 본 현규는 그대로 신발장을 걷어찼다.

쾅 하는 그 소리에 지수가 움찔하자 현규가 느긋한 투로 묻는다.

“방금, 뭐라고?”

“…….”

“응?”

어디 또 말해 보라는 듯 현규가 눈웃음을 흘리자 눈치 없는 지수가 작게 중얼거린다.

“……수현이 얼굴만 보여 달라고…….”

그 말에 다시 한번 쾅 하는 소리가 나게 신발장을 걷어찬 현규가 아무렇지 않은 듯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린다.

“이런, 실례. 벌레 한 마리가 자꾸 집으로 들어오려고 해서. 이런 건 미리미리 밟아 줘야 해서.”

그 벌레가 누군지는 알지, 라는 얼굴로 웃는 현규의 무시무시한 기백에 철없고 눈치 없는 지수조차도, 이번엔 그 말을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면 본인이 밟혀 죽을 거라는 걸.

눈앞의 놓인 자신의 미래를 인지한 순간 지수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현실을 받아들였다.

독한 페로몬의 영향인지 이상할 정도로 순종적인 지수의 태도에, 해준이 현규의 방자한 태도를 나무란다.

“네가 이러니까 수현이가 너 인성에 하자 있다고 걱정하는 거야.”

“이 정도면 수현이 가족이라 아주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겁니다만?”

나 더럽게 친절하지 않냐고 현규가 살벌하게 웃자 해준이 차마 그 말에는 반박하지 못한다.

현규 성격에 문을 열어 준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예의를 갖춰 온 정성을 다해 상대를 대하고 있는 거긴 하다.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한참 떨어지더라도.

하지만 그걸 현규에게 말해 봐야 입만 아플 거고 현규도 듣는 척도 하지 않을 거라, 재빨리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퇴근 후에 억제제 갖다줄게. 문에 걸어 두고 메시지 보낼 테니 수현이 먹여.”

“없어도 됩니다.”

“발정기에 약 없이는 힘들어.”

“수현이한테는 필요 없습니다.”

미쳤다고 이 좋은 발정기 섹스를 놓치겠냐고 현규는 어서 꺼지라는 듯 턱짓했다.

아까 인수인계했으면 이만 손 떼라는 그 제스처에 해준이 두 손을 들어 보인다.

항복했다기보다는 진절머리가 나서였다.

진짜 작작 해라.

“그래, 네가 수현이 파트너니 네가 알아서 할 거라고 믿을게. 그럼, 이만 가 볼게.”

“배웅은 안 합니다.”

“그러고 나오면 경찰한테 끌려가, 너.”

가운을 걸치기만 했을 뿐 여미지는 않아 거의 맨몸이나 마찬가지인데 성기도 반쯤 발기한 채였다.

저러고 나오면 오히려 이쪽이 망신이다. 현규는 수치를 모르지만 우리는 아니까.

그러고 보니 어쩌면 오늘 지수의 태도가 유독 비굴한 게 저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해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지간한 알파들까지 기죽이는 어마어마한 알파 페로몬에 저 사이즈까지 봤다면 누구라도 겁나긴 할 거다.

순간 문득 저 집안 어딘가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수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너 진짜 이런 성격에 저런 물건이라도 괜찮은 거냐고.

“그 표정은 뭐죠?”

마치 그런 해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현규는 이제 와 말 바꿀 생각은 아니지, 하는 시선으로 해준을 응시했다.

연상에, 심지어 수현을 직접 키운 자신을 향한, 무례하다 못해 불손하기까지 한 그 눈빛에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 멈췄다.

잔소리는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그냥 꼴 보기 싫다.

수현이가 혼자 있는 것도 걱정되고.

“아무것도 아냐. 들어가 봐. 수현이 혼자 두지 마. 그리고 우린 이만 가자. 둘 다 정신 차리고. 특히 이진원, 너 눈 풀렸어. 뭘 그렇게 놀라? 다 큰 성인들인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훌쩍거리는 지수에 반해 문을 연 이후로 계속해서 침묵하던 진원은 충격을 받은 듯 뻣뻣하게 굳은 채였다. 오히려 지수보다 진원의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평생 어리기만 할 줄 알았던 막냇동생의 섹스 후 상황을 본의 아니게 라이브로 보고 말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현규는 모처럼의 공감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고 자신이 알 바는 아니라, 그들이 채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야멸차게 문을 닫았다.

그러곤 아예 도어록의 이중 잠금 장치까지 걸어 외부와 집 안을 완전히 분리했다.

창문에 사생활 보호 필름까지 붙여, 완벽한 요새가 된 집안을 현규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돌아봤다.

혹시 몰라 도착하자마자 주영의 남은 짐과 사용했던 소파 베드를 모조리 그 녀석의 집으로 배달 보낸 후였다.

사람이 없으면 대충 복도에 던져두고 오라고 했으니 퇴근 후에 도착한 짐을 본 주영이 당황할 수도 있지만, 역시 그것도 자신이 알 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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