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럼에도 본인이 직접 하면 꿈에 현규가 나타날 것 같아서 욕을 할 수는 없었지만 듣는 건 좋았다.
특히나 해준이 현규에 대해 가차 없이 말할 때면, 속이 시원해서 좋다고 웃고 있는데 테이블 위에서 벨 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에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손에 든 해준은 화면 위에 뜬 ‘진원’이라는 이름에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 삼촌, 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억제제라니?
전화를 받자마자 터져 나온 고함에 해준은 서둘러 휴대폰을 귀에서 떼곤 인상을 썼다.
옆에 있던 주영에게까지 들릴 정도의 데시벨이었다.
얘도 갈수록 자기 아버지를 빼닮아 간다.
“너, 전화하자마자 소리부터 지르는 버릇 좀 고쳐. 그리고 먼저 인사부터 해야지.”
이 집안 남자들이 전화만 하면 인사고 뭐고 일단 본론부터 들어가는 건 DNA에 새겨진 습성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해준은 일단 행동 교정을 요청했다.
30년 넘게 고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흐트러지거나 잘못된 걸 보면 고치라고 꼭 지적해야 하는 게 해준의 습성이었다.
그나마 그래서 수현은 저 정도로 정상적으로 자라 준 거라고, 해준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록 DNA의 한계로 평범한 아이로 자라지는 못했지만, 저 정도면 이 집안에서는 아주 정상적인 범주에 속한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수현을 자신이 키운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물론, 진원은 자신이 안 키웠다.
- 지금 인사가 중요해? 아까 임신이니 억제제니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귀에서 멀리 떼어 놨는데도 쩌렁쩌렁하니 울리는 성량에 해준은 그걸 이제 알았냐고, 하려다 아차 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진원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긴 했다.
수현의 오피스텔 앞에서는 눈 뜬 채 기절한 상태였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던 동생의 사생활을 목격한 충격으로 혼이 반쯤 빠져나간 상태였으니 이제야 겨우 정신이 돌아와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대신 진원이 또 고함을 지를 것에 대비해 음량을 줄인 뒤 휴대폰을 스피커폰 모드로 돌렸다.
그러곤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들은 대로야.”
- 들은 대로라니? 그럼 수현이가 지금 발정기에 들어갔다는 소리야?
음량을 최대한으로 줄였는데도 귀가 아플 정도로 울려대는 진원의 목소리에 해준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착신 거부하고 싶다.
“아까 사무실에 있을 때 시작됐어. 현규가 그래서 급히 수현이만 데리고 간 거야.”
- 말도 안 돼! 난 전혀 몰랐다고!
“아무도 몰랐어.”
-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냐고? 발정기를? 거기에 있던 알파가 몇인데?
“각인했으니까.”
짤막한 그 답에 진원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 ……뭐?
- ……뭐?
“아직까지는 가정일 뿐이야. 그런데, 그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아마 맞을 거야.”
- 그게 진짜 되는 거야?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 나도 본 건 처음이지만.”
- ……그렇다면 다행이기는 한데…….
드디어 막냇동생에게 발정기가 온 건 축하할 일이지만 그게 각인과 함께라니 조금 복잡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진원도.
“어쨌든 그렇게 된 일이니 이제 더는 터치하지 마.”
어차피 터치하려고 해도 못 할 거다. 이렇게 된 이상 현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임신부터 시킬 거다.
발정기에 각인까지 된 상태에 임신까지 한다면 게임 끝이다.
두 사람의 아이라니…… 어쩐지 해준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애들이야 둘이 잘 키우겠지만 어른들이 문제다.
해준은 양쪽 집안에서 아이 이름 짓는 걸로 1년은 싸울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 봐야 현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멋대로 이름을 지어 출생 신고를 하겠지만.
“그보다 형은 어때? 민혁 형이랑 애들 결혼 얘기 한다더니 이상하게 조용하네?”
지금쯤이면 걔랑은 진짜 취향 안 맞는다며 전화로 화를 낼 때가 됐는데 너무 조용한 게 불안하다는 해준의 예언에 진원이 바로 받아친다.
- 아, 그렇지 않아도 식장이랑 날짜 문제로 또 싸우고 들어오신 모양이던데.
“……그래, 그래야지…….”
그 두 사람이라면 싸워야 어울리지 이제라도 같이 잘해 보자고 순순히 성질을 죽이고 화해하는 건 이상하다. 안 어울린다.
10년 넘게 사귀다 집안의 반대나 아주 소소한 의견 충돌도 없이 무난하게 결혼 준비에 돌입한 커플도 막상 본격적인 식 준비에 들어가면 매일 싸운다는데, 서로와 싸우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두 사람이 자식들의 결혼 문제 앞에서 평화로울 리가 없다.
최근 싸울 레퍼토리도 떨어져 심심해 보였는데 마침 좋은 핑계가 생긴 거다.
그래, 싸운다면 실컷 싸우게 두면 된다. 그사이 다른 짓은 못 할 테니까.
어차피 뒷일은 현규가 알아서 할 거다.
그렇게 따져 보니 새삼 현규의 이상 성격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감당 못 하는 두 어른도 현규의 더러운 성질머리면 해결이 가능하다니…….
수현아, 너 진짜 괜찮은 거니, 라고 오늘만 해도 몇 번을 반복하던 물음을 또 한 번 떠올린 해준은 낮게 한숨을 뱉어 내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실 테니 결혼 문제는 어른들이 알아서 하게 두고 지수한테도 전해. 수현이 발정기 중이니 일주일 정도는 절대 건들지 말라고.”
- 그 녀석이 아무리 철이 없어도 설마 발정기인 동생을 건들겠어?
“아니, 수현이 말고 현규.”
- 아…….
수현이야 발정기든 뭐든 건드려도 꿈쩍 안 할 녀석이지만 현규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평소에도 구마가 필요한 녀석인데 예민해져 있을 때는 특히 건드는 게 아니다.
“수현이도 첫 발정기라 현규가 붙어 있어야 하니 괜히 연락하거나 건드리지 말라고 전해. 물린다, 그러다.”
- 아마, 괜찮을 거야. 아까 들어와서 지금 자. 아프대, 갑자기.
“왜? 감기라도 걸렸어?”
- 아니, 그냥 아픈 기분이래.
“아…….”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원래도 멘탈 약한 녀석이 정신적으로 꽤 충격을 받았으니 앓아누울 만도 하다.
“그래, 푹 쉬라고 하고 너도 그만 쉬어.”
- 그보다, 삼촌은 언제 식 올릴 건데? 수현이네랑 안 겹치게 해야 하니 미리 알려 줘. 장소는 야외? 실내? 한국? 아니면 해외?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 그래도 미리 시기는 말해 줘야 내가 식장을 잡지? 그리고 집은 어떻게 할래? 아파트? 아니면 주택?
수현의 결혼 문제는 어른들에게 바통이 넘어간 채라 본인이 할 일이 없다고 느꼈는지, 진원은 곧장 타깃을 바꿔 해준의 결혼에 손을 얹으려 했다.
해준은 가만히 있으면 죽는 병에 걸린 것 같은 큰 조카에게 극약 처방을 내렸다.
“……나보다 네 결혼이나 신경 쓰는 게 어때?”
이제 너도 슬슬 결혼해야 할 때 아니냐고, 바로 두 달 전 애인에게 차인 진원을 걱정하자 진원이 충격받은 목소리로 되묻는다.
- 인신공격하기 있기?
“인신공격이 아니라 가족들한테 신경 쓸 시간에 너한테 좀 신경을 쓰란 소리야. 솔직히 수현이가 제일 먼저 결혼한다는 게 말이 돼?”
- 삼촌이 할 말은 아니지.
“……나는 곧 할 거고.”
- 나도 곧 할 거야.
“상대는 있고?”
- …….
“지수도 그렇지만, 너도 제발 연애 좀 해.”
네 동생은 현규랑 만나 사흘 만에 결혼하고 한 달 만에 임신하게 생겼다는 말을 꾹 참으며 해준은 많이 덜떨어진 첫째 조카에게 모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진원 역시 팩트로 공격당하자 듣기 싫다는 듯 툭 하니 내뱉었다.
- 끊어.
진짜 삐쳤는지 금세 끊긴 전화에 해준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얘도 답이 없다는 그 제스처에 해준의 옆에서 본의 아니게 통화 내용을 모두 듣게 된 주영이 조심스레 묻는다.
“수현이 진짜 임신할까요?”
첫 번째 발정기에는 보통 임신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편이라, 주영은 수현이 임신을 할까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해준의 의견은 확고했다.
“안 하면 이상하지…….”
그 짧은 말 속에 숨은 수많은 의미를, 주영은 정확히 읽어 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오늘 오전까지 현규에게 착취당하며 잠깐 잠이 들 때도 현규가 나타나는 악몽을 꾼 입장이라, 해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현규의 집념이라면 뭐든 가능할 것 같았다.
“……수현이, 괜찮겠죠?”
오늘 종일 해준이 했던 그 질문을 이번엔 주영이 해준에게 건넸다.
하지만 어떤 답을 원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탄식 같은 거였다.
‘수현아…….’와 같은.
“뭐, 본인 선택이니 책임도 본인이 져야지. 그보다 저녁은 내가 할게. 피곤할 텐데 샤워부터 하고 나와.”
앉아 있기만 해도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드는 소파에서 일어선 해준이 먼저 주방으로 향하자 주영 역시 재빨리 해준의 뒤를 따랐다.
“제가 할게요.”
“아냐, 내가 할게. 너 지금 많이 피곤해 보여.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나와서 식사한 다음에 오늘은 푹 쉬어.”
그러고 보니 자신도 진원이에게 잔소리할 입장이 아니었다고, 해준은 마음 깊이 반성했다.
미성년자가 아닌 이상, 수현이든 누구든 본인이 선택했으면 그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한다.
그게 맞다. 그간 자신도 수현을 과보호하긴 했다. 하지만 이젠 수현을 완전한 독립체로 인정해 줘야 한다.
아니, 독립체고 뭐고 지금 내 코가 석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