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60)

처음부터 아예 작정하고 수현의 온몸에 페로몬 샤워를 퍼부은 터라 알파들이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출장 기간에도 혹시 몰라 이틀 이상 가게 온몸에 정액 칠을 해 놓고, 그걸로도 불안해 침대에까지 듬뿍 뿌려 놨으니 이불을 갈아도 그 냄새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거다.

사실 그건 주영이 절대 침대에서 못 자게 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지만 하여간 여러모로 도움이 되긴 했다.

“그런데, 왜 저는 전혀 몰랐죠?”

발현했으면 분명 자신도 페로몬을 느낄 텐데, 내가 왜 현규 형의 페로몬을 뒤집어쓰고도 몰랐었냐는, 수현의 지극히 합리적인 질문에 이번엔 현규가 대신 답해 준다.

“보통 자기 몸에서 남은 냄새는 못 맡아. 거기다 내 그루밍 제품을 썼으니까 둘을 혼동한 거지.”

그렇게 설명하면서도 현규는 자꾸만 풀어지려는 입매를 간신히 무표정하게 유지했다.

그것 역시 현규가 예상치 못했던 예상 밖의 옵션이었다.

현규의 경우는 본인의 페로몬과 가장 비슷한 향의 그루밍 제품을 사용하는데, 수현까지 그 제품을 같이 사용한 탓에 페로몬과 향수를 구분 못 했던 거다.

뭔가 여러모로 상황이 기묘하게 꼬였다.

그리고 현규는 그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파트너 설명대로야. 문진 내용으로 봤을 때 각인은 최소 2주 전에 이루어진 것 같고, 발현도 그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거라고 보면 돼. 솔직히 넌 지금까지 발현하지 않은 게 이상했던 거라, 네 파트너 호르몬에 반응해 발현하고 그와 동시에 각인했다고 보면 돼.”

보통 호르몬 수치가 그 정도면 불규칙적으로라도 발정기가 오기 마련인데, 네가 굉장히 까다롭고 특이한 케이스였다는 의사에 설명에 수현은 납득했고 현규는 감탄했다.

얘는 호르몬도 눈치가 없다고.

보통 이쯤 되면, 대충, 이라는 말이 안 통한다.

너무 수현다웠다.

“이제 다 이해했어요. 어쨌든 전 발정기에 타인에게 피해는 안 주는 거 맞죠?”

“응. 전혀. 그리고, 각인이 아니더라도 넌 괜찮을 거야.”

“왜요?”

“우리 전공의 중 한 명이 알파인데 아까 너 검사실에 갔을 때 무섭다고 달려 나왔거든. 난 몰랐지만 이쪽 파트너분께서 페로몬 샤워를 너무 해 놨나 봐. 너무 독해서 네 옆으로 가기도 싫다고 징징대길래 지금은 상담 쪽으로 보내 놨어. 걔도 나름 우성 알파인데 걔가 그럴 정도면 네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간 큰 알파는 없다고 봐야지. 뭐, 가끔 내일 없이 사는 알파들도 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지?”

“네. 할 수 있어요.”

“그래, 씩씩하다. 하지만 아직 발현 초기라 발정기 주기가 안 잡혔을 테니 긴장을 놓으면 안 돼. 보통은 두세 달 주기지만 호르몬 분비에 따라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반년 주기인 사람들도 있으니까 발정기 한 번 왔다고 너무 안심하지 말고 주기 잘 체크해. 무조건 1년간은 본인 주기 파악하는 데 신경 써야 돼. 그리고 주기가 아니라도 심한 스트레스나 외부 환경의 영향으로 갑자기 발정기가 오는 케이스도 있으니까 주의하고. 앞으로 먹는 약도 호르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성분들은 조심해서 먹어야 돼. 그리고 알파가 많은 폐쇄된 곳도 가능하면 피하고. 그런 일은 드물지만 간혹 알파들이 자의든 타의든 페로몬을 흘릴 경우 발현 초기의 오메가는 그 영향을 받아 갑자기 발정기가 시작될 수도 있어.”

“아!”

순간 뭔가 떠오른 듯 수현이 짤막하게 감탄사를 내뱉자 그런 수현을 돌아보던 현규 역시 잠시 후 수현이 왜 그런지 눈치챈 듯 탄식했다.

“……아버지…….”

빌어먹을, 이라는 단어는 빠졌지만 무음 처리된 그 말이 마치 진동으로 울리는 듯해 의사도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왜?”

뭐 짚이는 거 있냐는 의사의 질문에 수현이 작게 답한다.

“발정기가 왔을 때 같은 사무실 안에 우성 알파 5명이 있었거든요.”

그것도 화가 나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흥분한 채라 꽤 많은 페로몬을 뿜어내고 있었을 거다.

그러고 보니 그 사무실 안에 묘하게 기분 나쁜 냄새들이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형들 냄새를 원래 싫어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제야 수현은 속 시원한 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드디어 모든 미스터리가 해결됐다.

“어…… 보통은 같은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는데…… 음, 어떻게 보면 네가 유독 알파 페로몬에 민감한 타입일 수 있으니까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해.”

“지금까지는 괜찮았는데요?”

“발현 후에 체질이 바뀌는 사람들도 많아. 사춘기보다 더 짧은 기간 안에 급격한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는 거니까.”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아 수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의할게요.”

“그래, 착하다.”

18살도 아닌 8살 아이 다루듯 수현을 어른 의사는 그제야 비로소 만족한 듯 웃으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현재 상황으로는 전부 정상이고 호르몬 수치도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안정적인 범위에 들어갈 거야. 그러니 안심하고 파트너랑 잘 붙어 있기만 하면 돼. 그리고 온 김에 만약을 대비해서 억제제도 준비해 줄게. 넌 기간도 짧은 것 같은데 일주일 치 줄까? 아니면 보름?”

약이 얼마냐 필요하냐는 물음에 수현보다 현규가 먼저 답했다.

“그건, 됐습니다.”

“억제제는 있어야 돼요.”

“호르몬제라 별로 먹이고 싶지 않습니다.”

“억제제가 몸에 좋은 약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오메가에게는 상비약입니다. 아무리 각인이 된 상태라 해도 오메가의 발정기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해요. 아직 주기가 잡히지 않아 당장 내일 또 발정기가 올 수도 있는데 서로 조심해야죠.”

“그럼 더 좋죠.”

싱긋 웃으며 그럼 또 휴가 내면 된다는 현규를 의사는 황당해하는 얼굴로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다시 수현을 돌아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너 왜 이런 놈하고 결혼한 거냐고.

“저희 형이 인성에 좀 문제가 있어요.”

하지만 아주 나쁜 놈은 아니랍니다, 라는 소개에 현규는 귀엽다는 듯 옆에 앉은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정확히는 머리통을 세게 쥐었다.

금방이라도 터트릴 듯이.

누가 봐도 화를 내는 게 분명한 그 반응에도 수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형, 아파요.”

“응. 아프라고 한 거야.”

“놔주세요.”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수현의 머리통을 꾹 누른 현규가 손을 떼자 수현이 덥수룩한 머리를 벅벅 긁어 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의사는 모처럼 덕담을 내뱉었다.

“……둘이 잘 어울리네.”

“물론이죠. 천생연분이니까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수현이 잘 돌봐 주세요.”

잘 지내 주세요, 가 아니라 잘 돌봐 주세요, 라는 부분에서 수현이 병원에서도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현규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마 발정기가 안 오니 고등학교 시절 내내 검진을 받았을 텐데 그때도 혼자 태연해 담당의 속만 터졌을 거다.

보지 않아도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광경에 현규가 의사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던 사이 뭔가 생각난 듯 의사가 다시 카르테를 확인했다.

“음…….”

뭔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좀 애매하다는 듯 의사는 인상을 쓴 채 이마를 꾹꾹 눌렀다.

“……호르몬 수치 중에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지금은 확실하지 않으니까 다음 주쯤 한 번 더 와 볼래?”

“왜요?”

“별건 아니고…… 그냥 특이한 수치가 보이는데, 지금은 막 발정기가 끝난 후라 애매해서. 다음 주에 확인해 보면 확실해질 테니 오늘 예약 잡고 가. 나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워낙에 어린 시절부터 호르몬 수치가 특이하다는 말을 많이 들은 터라 수현은 그러려니 했다.

“네.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그래. 그럼, 이만 가 봐. 아, 결혼 축하해.”

수현을 고등학교 시절부터 봐서인지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던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서 먼저 손을 내밀자 수현 역시 서둘러 일어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역시나 수현보다는 현규가 빨랐다.

“오늘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현의 손을 은근히 밀어 내곤 본인이 악수를 마친 현규가 싱긋 웃자 의사가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익숙하다는 기색으로 웃었다.

하여간 알파들이란, 이라는 얼굴로.

“파트너분도 잘 가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네.”

마지막 인사를 한 뒤 진료실을 나온 수현과 현규는 곧 담당 간호사와 다음 진료 예약을 마치곤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을 날씨는 더없이 쾌청했고 의도치 않았던 옵션을 잔뜩 받은 현규는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수현이 발정기가 왔고 건강 상태도 양호하다는 건 앞으로의 미래가 밝다 못해 번쩍인다는 청신호였다.

게다가 아버지 쪽까지 얼결에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해준 형에게서 지금 양가 부모님들이 결혼식 문제로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렇다는 건 더는 이혼 종용은 안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결혼식을 마음대로 진행하는 건 안 될 일이지만 어쨌든 제일 껄끄럽고 귀찮던 문제까지 해결되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단 하나 자신에게서 최대한의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수현만 제외하면.

“……뭐 하는 거지?”

엘리베이터에 탄 뒤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수현을 보며 현규는 장난하냐, 하는 얼굴로 웃었다.

“안 잡아먹어.”

“잡아먹잖아요.”

좁은 엘리베이터의 구석에 붙어 꿈쩍 안 하는 수현의 반론에 현규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린다.

“눈치가 생겼네?”

“속은 건 제 잘못이 아니지만 같은 사람에게 세 번 이상 속으면 지능 문제라고 했어요.”

큰형이, 라고 수현은 벽에 붙어 현규를 경계하듯 바라봤다. 잔뜩 털을 곤두세운 살쾡이도 아니라, 쭈뼛거리는 카피바라 같은 수현을 보고 있자니 현규는 좀 더 찔러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상하게 저렇게 쳐다보면 더 괴롭히고 싶다.

진짜 볼수록 카피바라 같다.

둔하고 무덤덤한 게.

“많이 똑똑해졌네.”

“원래도 똑똑하긴 했어요.”

“그건 아냐.”

넌 공부만 잘하는 거라고 웃으며 현규가 슬쩍 그쪽으로 다가서자 수현이 다급히 뒤쪽으로 빠져 다른 구석에 붙어 선다.

“이럴 때는 빨라…….”

항상 나무늘보처럼 굴러다니는 녀석이 도망칠 때는 엄청 민첩하다고, 현규는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교내에서 느릿느릿 핫바 물고 다니다 자신과 눈만 마주치면 갑자기 우사인 볼트가 됐다.

그걸 보고 왜 저렇게 빨라, 라고 생각했는데 이지수에 따르면 수현이 의외로 운동은 잘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달리기나 매달리기 같은 기초 항목만.

문제는 순발력이 심각하게 떨어져 구기 종목을 하면 얼굴로 공을 받아 내기 일쑤라 배구를 하면 배구를 하는 건지 피구를 하는 건지 상대 팀이 헷갈릴 정도였고, 축구를 하면 갑자기 분위기는 발야구가 되는 기이한 현상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운동 능력은 좋은데 운동 신경은 바닥을 기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 탓에 평소에는 뛰어난 운동 능력을 전혀 못 써먹다 위기의식을 느꼈을 때만 잠깐 후드티 주머니에서 꺼내 발휘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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