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60)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이수현답다는 생각이 반, 그래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겠구나 안도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도망치는 건 자신도 못 따라갈 정도로 빠르니까.

“제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뇌가 더디게 반응해 느리지만,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반응은 빨라요.”

“그러니까…… 쓸데없이 학습 능력은 좋단 말야.”

애가 어떻게 봐도 똑똑해 보이는 편은 아닌데, 라는 현규의 중얼거림에 수현은 바로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형 덕에 더 좋아지고 있어요.”

그간 수현에게 있어 삶의 시련이란 스토커 첫째 형의 집착과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사는 둘째 형의 막말, 그리고 서류 작업 싫어하는 윤 팀장님이 치는 사고 정도가 전부였다.

발정기가 안 오는 있던 부분은 오히려 본인에게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으니 전혀 문제 될 게 없었고 원래 천성이 느긋하고 낙천적이라 그간의 인생은 평온 그 자체였다.

그런 이유로 순발력이나 남의 눈치를 보는 능력이 극단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건 맞다. 하지만 그마저도 최근 조금씩 좋아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학습 능력은 자신이 보기에도 일취월장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현규의 덕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빠가 알파들이 하는 말은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현규 덕에 이제야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알파의 종족성 특징인지 현규는 말한 대로 지키는 게 하나도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시련 앞에서, 수현은 서서히 인생을 배워 가는 중이었다.

“좋아, 바람직하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경계하도록.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갈수록 뻔뻔해지는 현규의 태도에 수현이 불만 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이, 지하 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서서히 열리는 문을 보며 현규가 먼저 내리라고 고갯짓하자 수현이 쭈뼛쭈뼛 눈치를 보면서도 현규의 옆을 지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다.

그게 또 귀여워 바로 수현의 뒤를 따라 내린 현규가 슬쩍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수현이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슬쩍 옆으로 다가온다.

“내 근처로 안 오기로 한 거 아니었어?”

“여긴 공공장소잖아요.”

아무리 형이라도 이런 곳에서는 이상한 짓 안 할 테니까요, 라며 수현이 슬쩍 현규의 옷자락을 쥐자 현규가 그런 수현을 돌아본다.

그러곤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내가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

지금 내가 무서울 게 있을 것 같냐는 현규의 반문에 수현이 잠시 그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현규를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옆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한 박자 늦었다.

“역시 순발력은 없네…….”

도망치려는 수현의 후드를 재빨리 잡아끈 현규가 키스를 할 듯 허리를 숙이자 수현이 본능적으로 입을 가린다.

“이럴 땐 빠르고.”

“이번엔 예측 가능했어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수현의 야무진 답에 현규는 웃으며 수현의 후드를 손에서 놨다. 그리고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안 해.”

그러니 안심하라고 옆으로 물러섰지만 여전히 수현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였다.

“형, 안 믿어요.”

“그러든가.”

알 게 뭐냐는 태도로 웃으며 수현의 머리를 끌어안은 현규는 다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기분 좋은 듯 지나치게 발랄한 걸음으로, 날아갈 듯이.

전혀 현규답지 않은 태도에 수현은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연신 현규를 힐끔거렸다.

형이 기분 좋을 때는 자신에게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을 의식한 현규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점심 뭐 먹을래?”

“마…….”

“만두 말고.”

수현이 답을 하기 직전 현규는 야멸차게 답을 끊어 냈다.

만두는 꿈도 꾸지 말라는 듯.

현규의 단호함에 수현은 조금 놀란 듯 되물었다.

“……만두 안 돼요?”

“우리 오늘 아침까지 만두 먹었어.”

그러다 애 낳으면 만두가 태어나겠다고 현규가 타박한 순간 수현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발정기 내내 정신이 없긴 했지만 먹기는 해야 해 냉동실에 있던 음식을 꺼내 먹다 보니 거의 나흘 가까이 만두만 먹은 건 사실이다.

물론, 그럼에도 만두는 아직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도 많이.

그런 이유로 점심까지 만두를 먹을 생각은 없었다, 현규는.

하지만 수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만두 먹고 싶은데…….”

작게 중얼거리는 그 소리에 현규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만두’의 ‘만’ 자만 들어도 신물이 날 것 같지만 먹고 싶다는데 먹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게 먹고 싶으면 만두 먹어. 어디로 갈래?”

확실한 허가의 답에 수현은 방금까지 경계하던 걸 잊고는 눈을 반짝였다.

“만두전골 먹고 싶어요. 북향만두요.”

가게 이름을 들은 현규는 이상하게 그 이름이 익숙하다고 떠올리다 이내 그 집이 역사적인 혼인 신고 하던 날 갔던 만둣집임을 깨달았다.

꽤 맘에 든 가게라 수현의 발정기 기념으로 또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앞으로 임신했을 때도 거기로 가고 출산했을 때도 가고, 애 백일도 거기서 해도 괜찮을 듯했다.

하나하나 떠올려 보니 갑자기 벅차오르는 도취감에 막 차 앞에 도착한 현규는 살짝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췄다.

스치듯이, 마치 인사 같은 그 키스에 완전히 경계를 풀고 있던 수현이 3초 정도 느리게 놀라 입을 가리자 현규가 시원하게 웃는다.

“나 믿지 말라니까.”

그러게 왜 방심하니, 라는 타박과 함께 현규는 너무나 환하게 웃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상쾌한 미소와 그답지 않게 악동 같은 말투에 수현은 이번엔 진짜 겁에 질린 얼굴로 현규를 힐끔거렸다.

“형…….”

미친 것 같아요, 라고 하려는데 현규가 그보다 빨리 말을 막았다.

“말하지 마.”

안 들어도 벌써 열 받으니까, 라고 현규가 덧붙인 순간 수현은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형이 미친 것 같아도, 그런 소리는 하는 게 아니다.

“타.”

먼저 운전석에 올라탄 현규를 따라 막 조수석에 탄 수현은 안전띠를 맨 뒤 예의상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오늘 오전에 휴대폰을 켠 순간 미친 듯이 날아들던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 알림에 질려 주치의 선생님의 메시지만 확인하고 아예 무음으로 돌려 놨는데, 슬슬 나머지 메시지들을 보긴 해야 한다.

그런데…….

“하아…… 하기 싫어…….”

“뭐가?”

“메시지 확인이요…….”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난 안 하고 있으니까, 라는 현규의 답에 수현은 그건 형 인성이 안 좋아서 가능한 거라고 입 안으로만 중얼거렸다.

이제 그런 건 말하면 안 된다는 정도는 학습했다. 가끔 까먹어서 문제지.

일단 자신은 인성이 나쁘지 않으니까 휴대폰을 확인하기 위해 길게 심호흡을 했다.

곧이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휴대폰의 잠금을 풀고 알림창을 내린 순간 그 위에 쌓인 어마어마한 알림 양에 질린 듯 몸서리를 쳤다.

“으……아…….”

“왜?”

“……휴대폰을 변기에 빠트리고 싶어져서요…….”

화장실 가서 빠트리면 되지 않을까, 하고 수현이 현실 도피를 시작하자 현규가 어이 없다는 듯 대답한다.

“요즘은 방수 기능 잘돼 있어.”

“……그렇죠…….”

“그냥 무시해.”

“지금 무시하면 나중에 배로 돌아와요.”

특히 큰형이, 라고 수현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답한 뒤 차례로 최근 온 알림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상단 알림은 대부분이 애플리케이션 업데이트 소식이었다. 별 필요 없는 내용이라 소식들을 대충 삭제하며 내려오는데 드디어 대망의 ‘스토커’가 메시지 창에 나타났다.

물론, 그 아래 리스트에는 ‘삼촌♡’과 ‘철벽’도 함께였지만 ‘몸 괜찮아지면 연락해. 할 건 하더라도 먹으면서 하고.’라는 엄마 같은 삼촌의 다정한 메시지 하나와 ‘아직도냐?’, ‘더럽게 오래 하네.’, ‘끝나면 전화해.’라는 둘째 형의 근성 없는 메시지 세 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진짜 거머리의 DNA를 합성한 것 같은 큰형의 메시지는 무려 48개였다.

부재중 통화도 34통이다.

누가 보면 내가 큰형한테 빚지고 도망친 줄 알겠다.

그 와중에 무서운 건 이것도 큰형이 많이 참아서 이 정도라는 사실이었다. 메시지 48개가 동생의 첫 발정기에 대한 큰형의 최대한의 배려였다.

이 정도 기간이면 200개는 왔어야 정상이니까.

“미치겠네…….”

읽는 것도 싫어 그냥 못 본 척할까 했지만 생각해 보니 이미 삼촌과 둘째 형의 메시지는 확인한 후였다. 옆의 숫자가 사라진 걸 보면 둘째 형이 곧 큰형에게 보고할 거다.

얘 메시지 확인했다고.

그럼 곧바로 전화가 올 게 뻔하니 자진 납세해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귀마개를 갖고 오는 건데, 라고 후회하며 일단 큰형의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별 내용은 없다.

그냥 아직도 하냐, 끝나면 연락해라, 피임은 했냐, 너무 빠른 임신은 안 된다, 애 낳으면 어디서 키울래, 요즘은 유모도 산부인과 간호사 출신 한 명에 유아교육과 출신 한 명 따로 둔다더라 몇 명 필요하냐, 등등.

아주 먼 미래의 일에 대한, 자신은 전혀 관심 없는 얘기뿐이었다. 거기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걸 보니 큰형도 당황하긴 했나 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신기하게 아버지 연락은 한 통도 없었다. 어머니도.

어머니야 너희 인생 너희가 알아서 살라고 하는 타입이라 이쪽에서 먼저 보고하지 않으면 상관하지 않으시지만 아버지는 슬슬 연락할 때가 됐는데…….

“아버지 연락이 없네요.”

“우리 아버지랑 싸우느라 바쁘실 거야.”

어느새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 안에서 현규가 무심히 답하자 수현이 놀라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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