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요?”
“우리 결혼 문제 때문에.”
“……결혼요?”
“상견례 시간이랑 장소 및 결혼식 준비와 신혼집 위치 기타 등등.”
말로 듣기만 해도 질리는 그 목록에 수현은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왜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어른들 마음대로 진행하는 모양인데……. 당분간은 내버려 둬. 상견례고 결혼식이고 주인공 없이 진행해 보라지?”
퍽이나 잘되겠다는 현규의 비웃음을 듣고도 수현은 진지하게 현규를 바라봤다.
“하실걸요.”
우리 아버지라면 실제 식을 올리는 주인공들 따위 없어도 충분히 식을 진행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수현은.
워낙에 그런 이벤트를 좋아하시는 분이라 어머니 없이 결혼기념일 파티를 한 적도 있고, 형들 유학 중에는 형들 없이 형들의 생일 파티도 다 하신 분이다.
그런 분이 신랑 신부 없는 결혼식을 못 하실 리 없다.
어차피 목적은 결혼식 자체가 아니라 하객 명단과 그들과의 친목이다. 그리고 하객들 역시 그 안에 모인 멤버들과의 명함 교환이 목적이니 신랑 신부가 있든 없든 아무도 신경 안 쓸 거다.
사실 인형을 세워 놓고 영혼 결혼식을 한다고 해도 아무도 관심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뭐, 그래도 상관없지.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해. 그쪽에서 전쟁을 하든 결혼을 하든, 우리 주변만 조용하면 상관없어.”
“그건 그렇기는 한데요…….”
사실 어른들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현규라면 어른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도 안 쓸 사람이라 알 바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중요한 걸 까먹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수현이 고민하던 사이 손에 든 휴대폰의 화면이 환해졌다.
큰형이다.
그새 메시지 창에 ‘1’이 사라진 걸 본 거다.
진짜 받기 싫다고 수현이 뚫어져라 휴대폰을 바라보는 모습에 막 우회전을 하던 현규가 의아한 듯 묻는다.
“왜?”
“……큰형 전화요…….”
“거절해.”
“……전화 안 받으면 집까지 찾아올걸요.”
휴대폰 일단 켠 걸 알았으니 더는 안 봐줄 터였다. 이 집안사람들의 특성 중 하나가 궁금한 건 못 참는다는 부분이었다. 특히나 성격까지 급해 물어볼 게 많은데 연락 안 되면 미친다.
특히나 큰형은 그게 심해 잠도 못 잘 정도다.
사실 수현도 그런 점은 마찬가지라 진원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다만, 수현의 경우는 귀찮음이 호기심을 이길 뿐이지.
“스피커폰으로 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라는 현규의 말에 수현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눈을 반짝였다.
“켤게요.”
더 이상 질질 끌 수는 없기에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여지없이 인사도 없이 본론이 시작됐다.
- 너 병원이라며?
대뜸 나온 그 말에 수현은 놀라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 최 선생님이 연락하셨어. 오늘 검진받았다고.
역시나 곧장 보고 들어갔구나, 라며 현규는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저 집안에는 비밀이라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대로 성인인데 저런 걸 타인에게 보고해도 되나, 의료법 위반 아닌가 했지만 그 의문은 이내 사라졌다.
- 아버지가 너 발정기 왔다고 병원 예약 잡으라고 하셔서 전화했더니 최 박사님이 마침 너 병원에 와 있다고 하시던데.
“아…….”
지금 뵙고 온 선생님이 워낙에 유명한 박사님이라 예약 잡기 힘드니까 미리 연락한 모양이었다.
- 그래서, 결과는 뭐래?
“뭐, 그냥 발현했다고.”
- 주기는?
“아직 몰라. 1년간은 체크하래.”
- 혹시, 각인은 맞아?
혹시나 하는 진원의 물음에 수현은 놀라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 그 상황에서 그걸 모르겠냐?
그 사무실에 다 같이 있었는데, 라는 진원의 한숨을 섞어 되물었다.
그러자 수현 역시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곤 수긍했다.
“……아, 하긴…….”
- 그건 됐고 너 지금 어디야?
“진료 끝나고 점심 먹으러 가는 중.”
- 그럼, 이쪽으로 와. 할 말 많으니까.
“싫어. 만두 먹으러 갈 거야.”
- 어딘데? 내가 갈게.
“왜?”
- 너, 설마 진짜 왜인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내가 다 읊어 줄까, 하는 진원의 음성에서 수현은 곧 시작될 잔소리를 감지했다.
이 정도면 지난 나흘 내내 장전한 거다.
“형, 나중에…….”
전화할게, 라고 수현은 이 상황을 회피하려 했지만 그보다는 진원이 빨랐다.
- 발정기 왔다고 그걸로 대충 무마하고 정리하려나 본데 이게 그렇게 넘어갈 일이야? 사기, 아니 계약 결혼이라니?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무슨 그런 짓을 저질러? 혼인 신고가 장난이야? 그건 취소도 못 해! 거기다 너 우리 어머니 아들이야. 그게 말이 되냐? 정윤겸 대법관 아들이 혼인 신고를 대충 하다니?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잔소리에 수현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그러곤 빠르게 머릿속으로 오늘의 메뉴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점심은 만두전골에 버섯 사리를 추가하고 샤브샤브 고기도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주문하는 김에 해물전도 추가하고.
그리고 후식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저녁은 집 근처 가게의 곱창이 먹고 싶다. 양념 말고. 기름 지글지글한 소 곱창으로.
소 곱창과 막창에 부추 절임을 얹고, 나중에 그 기름에 밥도 볶아 먹으면 오늘 저녁은 끝이다.
그리고 그 김에 소맥 한잔하면 좋을 것 같은데…….
“형, 소맥 마시면 안 되죠?”
아직도 금주령이 발동 중이라 수현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묻는 순간 현규가 막 입을 열려는데 진원이 버럭 화를 냈다.
- 이수현! 너, 내 말 안 듣고 있었지?
그 말에 뜨끔해 수현이 입을 꾹 다물자 진원이 분통을 터트린다.
- 너 이번에 진짜 큰 사고 친 거야. 현규랑 짜고 계약 결혼이 뭐가 어째? 결론만 좋으면 다 좋은 거야? 지금 너희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 중인 줄 알아? 아니, 너는 그렇다 쳐. 현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결혼할 생각이요.”
그러니까 혼인 신고를 했지, 라는 현규의 태연한 답에 진원이 잠시 말을 끊었다, 잇는다.
- ……강현규?
“네, 결혼하려고 혼인 신고 했습니다. 그게 어때서요?”
- 스피커폰이야?
“네.”
순간 휴대폰이 고요해졌다. 수현은 형이 전화를 끊었나 했지만 현규는 지금 진원이 수현에게 ‘스피커폰이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동생 새끼야.’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는 걸 눈치챘다.
“제가 스피커폰으로 전환하라고 했습니다. 일단, 사기…… 아니, 계약 결혼은 저희 문제니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그게 왜 너희 문제야? 우리가 속았는데?
“전 수현이를 속였지, 다른 사람들은 속인 적 없는데요?”
너희가 알아서 속은 건데 내가 알 게 뭐냐는, 세상 쿨한 현규의 반응에 아직 상황을 모르는 수현은 놀란 얼굴로 현규와 휴대폰을 번갈아 봤다.
“형, 어떻게 알았어? 현규 형이 사기 친 거?”
- 너 기억 안 나?
“뭐가?”
- 그…….
사무실에서 현규가 했던 말 기억 안 나냐고 다그치려던 진원은 이내 수현이 당시 발정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황이었으니 모를 수도 있다.
- 됐다. 기억 안 날 수도 있지. 하여간 너희 둘 다 이쪽 회사로 와.
“안 됩니다. 수현이 만두 먹어야 됩니다.”
- 또? 너 주영 씨도 만두만 먹였다며? 올드 보이 찍냐?
“올드 보이는 저고요. 다 왔으니 끊습니다. 나중에 시간 나고 볼일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전화를 안 받거든 착신 거부 당했구나 생각하세요. 그럼.”
평소의 인성대로 깔끔하게 전화를 끊은 현규는 곧장 지난번에 왔던 건물 앞에 도착해 차를 멈췄다.
익숙한 간판을 눈으로 훑은 수현은 안전띠를 풀며 궁금해하던 바를 물었다.
“형이 사기 친 걸 우리 형이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얘기했어.”
“왜요?”
“왜일 것 같아?”
어떻게 나 없는 48시간을 못 참고 그걸 들켰냐고 타박하듯 현규는 시동을 끈 뒤 수현을 돌아봤다.
한심함이 담긴 그 눈빛에 수현은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도 사흘은 버티지 그랬어?”
“……아니,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질문이 나와서요.”
차라리 ‘너희 거짓말했지? 사실대로 말해. 사기 친 거지?’라고 윽박질렀다면 모르쇠로 일관하며 묵비권을 행사했을 텐데, ‘설마, 너희 진짜 서로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라고 물으시는 통에 당황해 인정하는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CS에서도 종종 보이는, 매뉴얼이 없어 대응에 실패한 케이스였다.
“뭐, 됐어. 어차피 다 들킨 거고, 들키든 말든 상관없으니 너도 신경 쓸 거 없어. 내리자.”
“그래도 큰형은 포기 안 하고 반성문 받아 낼걸요.”
“안 내면 그만이지.”
내가 왜 그딴 것까지 해야 하냐며 차 문을 여는 현규를 본 수현은 이번만은 진심 어린 존경과 경애의 시선으로 현규를 바라봤다.
“형, 인성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