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60)

그러고 보니 지수 형 외의 사람에게서는 백해경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전혀 모른다는 수현의 반응에 그제야 안도한 듯 현규는 굳어 있던 입매를 풀었다.

“유학 시절에 알던 애라 혹시나 한 거야. 나랑 같은 대학 같은 과였거든, 나이도 동갑이고. 전골 나왔다.”

그 말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지는 전골냄비를 반기며 수현은 겉절이와 반찬들을 테이블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여기 겉절이 맛있어요.”

“그래. 먹고 있어. 나 전화 좀 하고 올게.”

“어디요?”

“너희 둘째 형한테.”

넌 오늘 죽었어, 라는 살기등등한 얼굴을 한 현규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에 막 겉절이에 손을 대려던 수현은 손을 멈칫했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냥, 굉장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뭐지……?”

이 찝찝한 감각의 정체가 뭔지 고민하며 일단 수현은 손을 움직였다.

둘째 형의 안부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요즘 행복하고 편안하게 잘 지내지? 이지수?”

오랜 친구인 지수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가장 먼저 현규가 내뱉은 건 고전적인 전화 예절을 따른 안부 인사였다.

마치 노래하듯 가벼운 어조로 상냥하게 친구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지수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현규의 음성이 가볍고 상쾌할수록 기분이 나쁜 거라는 사실을, 잘 아는 탓이었다.

- 왜 다짜고짜 전화해서 시비야? 내가 뭘 어쨌다고?

“백해경.”

- 응?

“네가 수현이한테 백해경 얘기했다며?”

그 이름을 말하는 스스로에게 진저리를 치며 현규는 짜증이 담긴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래서 일부러 연락도 다 끊고 아무도 내 앞에서 그 녀석 얘기도 하지 말라고 볼드모트 선언까지 한 건데, 이지수 모지리 새끼 때문에 다시 엮여 버렸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다시는 볼드모트에게 연락할 일은 없었다.

그게 더 짜증 났다.

- ……내가 수현이한테 백해경 얘기를 했다고?

금시초문이라는 지수의 반응에 현규는 주어를 정확히 알려 줬다.

“그래. 네가.”

- ……그런 얘기 한 기억 없는데?

“우리가 사귄다고 했을 때 전화해서 내가 백…… 그 자식 피하려고 수현이랑 사귀는 거라고 했다며?”

이미 먼 전생 같은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자 지수는 당황해 되물었다.

- 그게 언제 적 얘긴데? 그 새끼는 그걸 다 기억한대?

“네 동생은 기억력이 좋으니까. 너랑 달리.”

진짜 기억력이 좋다는 칭찬인지 쓸데없는 것들까지 기억한다는 타박인지 모를 현규의 어투에 지수가 곧 수긍한다.

- 뭐, 걔가 그랬다면 그랬겠지. 그런데 갑자기 백해경이 왜?

“첫째, 내가 내 얘기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지?”

- 야, 그때는 상황이…….

“그리고 둘째, 내 앞에서 백해경이라는 이름 꺼내지도 말라고 했을 테고.”

- 네 앞은 아니었잖아.

“마지막으로 셋째, 내가 수현이랑 사귀는 게 그 녀석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누가 그래?”

- 그때는 그런 줄 알았지. 너랑 수현이랑 사귄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였잖아!

“내가 수현이랑 사귀는 게 어때서?”

- 야, 솔직히 말해서 너희가 친하기를 했냐, 서로 보면서 얼굴을 붉히기를 했냐? 하다못해, 안부라도 물은 적이 있냐? 고등학교 때도 만나면 수현이는 도망가기 바쁘고 너는 뭐 저런 애가 다 있냐는 눈빛으로 쳐다봤잖아. 서로 데면데면하다 못해 피해 다닐 정도에 지난 몇 년간 만난 적도 없었는데 둘이 갑자기 사귄다면 누가 믿어? 그리고 애초에 너희는 상성이 안 맞는다고.

“우리 상성을 왜 네가 판단하는데?”

- 너희 둘 다 아니까 그러지.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하나씩 읊어 보라는 현규의 강요에 지수가 말문이 막힌 듯 헉 하며 말을 멈춘다.

현규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야 다 알지만 그걸 나열하라고 한다면, 난감하다. 뭐부터 말을 해야 할지.

“늘 말하지만 네 인생의 가장 장애물은 네 입이야. 수현이도 마찬가지지만 수현이는 귀여우니 상관없고, 넌 귀엽지도 않으니 입조심해.”

- 야, 그 자식이 어디가 귀여워?

“그냥 존재 자체가 귀여워.”

- 미쳤냐?

“그건 네 알 바 아니고, 하여간 지금 경고했다. 다시는 수현이 앞에서 백…… 그 녀석 얘기 꺼내지도 마. 아니, 이름도 언급하지 마. 걔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볼드모트야. 그리고 혹시라도 그 녀석하고 마주친다면 내 얘기는 절대 하지 말고.”

순간 지수가 침묵했다.

그걸로 현규는 알아챘다.

이 자식 이미 말했다고.

“이지수…….”

좋은 말로 할 때 다 이실직고하라는 경고를 짤막하게 줄인 호명에 지수가 더듬더듬 빠르게 말을 이어 간다.

- 아니, 그게…… 지난주에 갑자기 연락 와서 너 결혼했다던데 누구랑 했냐고 물어보길래 내 동생하고 했다고 했는데…….

“언제?”

- 어…… 너 출장 갔을 때쯤?

출장 시기라니, 너무 짚이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착신 거부를 풀고 먼저 연락했을 때 어느 정도 각오는 했던 바지만 생각보다 빨랐다.

그 자식이 눈치만 귀신같은 여우 새끼라는 걸 깜빡했다.

“원래 그 녀석하고 연락하고 지냈어?”

- 설마. 난 걔 잘 몰라. 유학생 시절에 SNS 계정으로 팔로우면 해 놨는데 그날 처음으로 DM을 보냈더라고.

그러고 보니 SNS가 있었다.

빌어먹을 스마트폰 덕에 사람 찾기가 너무 쉬워졌다. 비밀이라는 게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 그냥, 다 아는 얘기들만 했어. 증권가에 돈 소문대로 둘이 결혼했고 같이 산다고만…….

그 부분에서 지수는 슬쩍 모음을 늘어뜨리며 말을 끌었다.

그 기색이 매우 의심스럽다.

절대 저것만 얘기한 게 아니라는 감이 왔다.

“수현이에 대해 어디까지 말했어?”

- ……내 동생이라는 거랑…… 너희 회사 다니는 엔지니어라는 거…… 그리고 같은 학교 동창이라는 거랑…… 뭐…… 그냥, 다 아는 거…….

‘다 아는 거’라는 표현은 진짜 다 가르쳐 줬다는 뜻이었다.

이쯤 되니 슬슬 짜증이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왜? 수현이 주민 번호랑 주소, 통장 비밀 번호도 다 알려 주지?”

순간 헉 하니 숨을 멈추는 소리에 현규는 싫어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진짜 가르쳐 준 건 아니겠지?”

- ……회사 바로 옆 건물 오피스텔에 산다는 것만…….

가장 핵심적인 개인 정보 유출에 현규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걸 다 말했다고?”

- 내가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얘기하다 미국 살 때 집 얘기가 나와서 너 지금은 그 덩치로 투룸 오피스텔에 산다고 한 건데…… 야, 그런데 그게 뭐? 백해경이 설마 수현이한테 무슨 짓 할까 봐?

“그 자식이면 하고도 남지.”

- 에이…….

설마, 하는 지수의 태도에 현규는 심한 말을 하로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지수는 백해경이 어떤 망나니 새끼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아니, 대부분이 그 녀석의 정체를 모른다.

그게 당연하다. 그 피해자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으니까.

수치스러워서.

“너, 앞으로 입조심해. 수현이한테 아무 때나 전화해서 욕도 하지 말고 모지리니 뭐니 헛소리도 하지 마. 특히 내 과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마.”

- 왜?

“그건 네 알 바 아니고.”

내가 귀찮게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냐는 현규의 반박에 지수가 조금 기분이 상한 듯 이죽거린다.

- 야,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백해경하고 사귀다 찼다며?

“누가 그래?”

- 그때 유학생 커뮤니티에 소문 다 났어. 백해경이 너한테 매달리고 애원하는데 착신 거부까지 했다고.

바로 옆 지역이긴 하지만 다른 대학에 다니던 지수까지 그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현규는 경악했다.

해준 형이야 자신과 같은 대학을 다녔던 서주영과 사귀었으니 알 수도 있지만 이지수가 안다는 건 그 볼드모트 새끼가 일부러 소문 냈다는 방증이다.

“잘 들어. 나랑 백해경은 사귄 적도 없고 앞으로 사귈 일도 없어. 지구가 평평해지고 중력이 사라지는 건 가능해도 그것만은 불가능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 그럼 걔가 왜 그러고 다니는데?

“걔는 원래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 에이, 걔가 어딜 봐서?

“너, 걔 본 적 있어?”

너랑 대학도 다르고 소문만 들었을 텐데, 라는 현규의 말에 허를 찔린 듯 지수가 입을 다문다.

직접 만난 적은 당연히 없다. 백해경은 유학생 커뮤니티의 셀러브리티라 모두가 그 존재를 알았지만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더 미스터리어스한 인물로 통했다.

- ……사진으로는 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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