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섭게 생겼다는 거야?”
“그보다는 절 볼 때 형 눈에서 광…….”
광기가 보였다고 하려다 수현은 말을 골랐다.
“……그냥 형 눈빛 자체가 좀 사람 긴장하게 만들어서요. 눈빛이 강하잖아요…….”
잡아먹을 듯이 강했다고 수현은 새삼 떠올렸다.
그리고 실제로 이번에 제대로 잡아먹혔고.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이 사람은 그때부터 날 잡아먹을 생각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었다.
혹시, 설마 하는 눈빛으로 현규를 바라보자 현규 역시 고개를 들어 수현을 바라본다.
왜, 또, 뭐?
방금 일로 기분이 상했는지 삐친 듯 심통이 난 얼굴에 수현은 얌전히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젓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설레는 마음을 안은 채.
* * *
“커피 마시고 집에 가서 잠깐 쉴래? 아니면 커피 사서 드라이브하고 저녁 먹으러 갈까?”
식사 후 바로 오피스텔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중 현규가 다음 일정에 대해 묻자 수현은 아주 잠깐 고민에 잠겼다.
지금은 1년 중 얼마 안 되는, 가장 날씨가 좋은 기간이었다.
이 축복받은 시기에 휴가를 받았다는 건 천운이고 오늘 날씨 역시 너무 좋아 드라이브도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 상태가 아주 좋지는 않았다.
“집에요. 집 좀 치워야 돼요.”
“왜?”
집에서 할 일이 뭐가 있냐는 현규의 반문에, 이번엔 수현이 왜일 것 같냐, 라고 묻는 얼굴로 현규를 바라봤다.
양심도 없지. 집 안이 지금 전쟁터라는 걸 모르고 저러는 건가? 아니면 집에 돌아가면 널린 옷들이 알아서 목욕하고 드라이까지 한 뒤 옷장에 들어가 누워 있고 새 이불이 알아서 침대에 깔려 있는 마법의 나라에서 살아서 그런 건가?
황당해하는 수현의 눈빛에 현규가 그제야 수현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한 듯 작게 “아.” 하고 인정한다.
“사람 불러.”
“그 집에요?”
“요즘은 다 불러.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집안일은 도우미에게.”
매일은 아니라도 정기적으로 욕실과 주방 청소를 도와주실 분을 수배해야 할 것 같아 엘리베이터 앞에 선 현규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수현의 의견은 달랐다.
“사람 부르는 건 안 돼요. 집이 작기도 하지만 삼촌이 혼자 살 거면 확실하게 혼자 살라고 했어요. 아니면 다시 집에 들어오라고.”
이젠 혼자 사는 게 둘이 살잖아, 라고 바로 받아칠 줄 알았는데 현규가 웬일로 조용하다.
그게 이상해 옆을 돌아보자 휴대폰을 바라보던 현규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형, 무슨 일 있어요?”
걱정이 담긴 수현의 물음에 현규가 서둘러 수현을 돌아본다.
“……응?”
질문을 잘 듣지 못한 현규를 보며 수현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대신 그의 휴대폰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현규는 역시 그 손짓을 금세 눈치챘다.
“아…… 별건 아냐. 그냥, 누가 잠깐만 보자고 해서…….”
“누구요?”
“……아는 사람. 마침 근처에 왔다고.”
귀찮게, 라며 현규가 혀를 차는 모습에 수현은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현규도 지난 나흘 내내 자신과 붙어 있었던 터라 일정이 꽤 밀려 있을 거다. 사적인 약속도.
“그럼 가 보세요. 저 먼저 올라가 있을게요.”
어차피 집에서 할 일도 많으니 걱정 말고 가 보라고 권했지만 현규는 영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럽게 가기는 싫은데 가기는 해야 할 것 같아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그럼, 얼굴만 보고 커피 사서 올라갈게. 우유는 지난번처럼 오트밀로?”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과 17층 버튼을 동시에 누른 현규가 닫힘 버튼을 누르는 모습에 수현은 재빨리 옵션을 주문했다.
“아뇨. 오늘은 그냥 우유요.”
“왜?”
“……그냥요. 오늘은 우유로 마시고 싶어요.”
그런 날도 있겠지 하며 현규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낮인 데다 거주자용 엘리베이터 앞이다 보니 1층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현규가 수현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선다.
“올라가.”
간지러운 키스에 수현은 멋쩍은 듯 이마를 문지르며 작게 답했다.
“네.”
인사와 동시에 닫히는 문 안에서 오른손을 흔들어 보인 수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며 배시시 웃었다.
이상하게 설레고 기분 좋은 가을 오후였다.
* * *
“아!”
먼저 올라와 집 정리를 하던 중 드디어 찝찝함의 정체를 찾아낸 수현은 눈앞의 서류 봉투를 보곤 아차 했다.
혼후 계약서의 존재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
“검수 맡겨야 하는데…….”
시간을 너무 끌었다.
오늘 내로 로펌에 보내야 할 것 같아 일단 눈에 보이는 곳에 서류를 내려놓은 후 거실에 널려 있던 옷가지들을 정리해 세탁실로 들어섰다.
나흘 사이 세탁물도 꽤 쌓인 채였다. 하지만 형 옷들은 세탁소로 갈 거니까 일단 자신의 옷들만 대충 넣고 세탁기를 가동하려는데, 세제가 없다.
현규에게 전화해 편의점에서 세제를 사다 달라고 하려던 수현은 휴대폰을 보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과 만난다고 했으니까 아직 대화 중일 수도 있다.
방해하는 건 미안해 주섬주섬 휴대폰만 손에 든 수현은 슬리퍼를 끌고 집을 나섰다.
그러곤 곧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가 건물 안쪽의 편의점에 가 소형 세제를 사고 다시 거주자용 엘리베이터가 있는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홀을 통과하며 카페를 돌아보는데 외부 테이블에 앉은 현규의 뒷모습이 보였다.
햇살이 유난히 좋은 오후였다.
투명하고 새하얀 햇살이 반짝거려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났고 적당히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 탓에 상쾌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의 오후, 잊을 수 없던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5년 전 겨울의 잔상 그대로의 모습인 사람을.
“수현아?”
“…….”
“수현아…….”
“…….”
“이수현, 이제 정신을 좀 차려야 할 것 같은데?
주방 싱크대 상판을 툭툭 두드린 현규의 간절한 요청에 수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옆을 돌아봤다.
“……네?”
“저녁.”
“네?”
“직접 하는 건 좋은데 그건 너무 많지 않을까?”
그 말을 듣자마자 아래를 내려다본 수현은 넘칠 듯한 카레를 보곤 당황해 손을 멈췄다.
“어…….”
“스트레스받은 게 있으면 말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 양이면 우리 둘이 한 달은 먹어야 한다고, 웍에서 시작해 대형 편수 냄비를 지나 결국 곰솥으로 진화한 취사도구를, 현규는 아연한 얼굴로 바라봤다.
커피를 사서 돌아왔더니 갑자기 집에서 저녁을 해 먹고 싶다며 마트에 재료를 주문해 놨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먹고 싶은 건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수현의 컨디션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외출하기 싫은가 보다, 하고 납득했다.
그래, 거기까지는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마트에서 배달이 도착했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감자 한 박스와 흉기 같은 대형 양파 망, 그리고 엄청난 용량으로 포장된 돼지고기 세 덩이와 어마어마한 양의 마늘 및 닭고기까지.
커다란 배달용 보냉백 세 개가 문 앞에 있는 걸 보곤 설마 했다.
그러나 그 설마가 역시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수현이 넋이 나간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감자 한 박스를 모조리 까는 걸 본 순간 오늘 진짜 큰일 났다고 현규는 직감했다.
카레 가루 1kg을 다 써 가며 냄비를 단계별로 바꿀 때 말렸어야 했다.
아니, 정확히는 웍에 한가득 양파를 볶을 때 스톱을 걸었어야 했다.
“어……. 아…….”
“간 맞아. 카레 그만 넣어.”
“그렇네요…….”
언제나처럼 재료와 물, 카레 가루를 번갈아 가며 추가 투여하다 보니 어느새 곰솥 한가득해진 카레를 본 현규는 아찔한 듯 인상을 썼다.
시스템개발팀, 전략기획팀이 다 모여도 이틀은 먹어야 할 양이다.
아니, 이건 그냥 통으로 회사 구내식당으로 가는 게 맞다.
맛있긴 더럽게 맛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