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이도 수현이지만, 양가 사람들 모두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김칫국을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김칫국으로 샤워를 하고도 남을 거라는 데 해준은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확정이 아니라고 해 봐야 통할 사람들이 아니다.
당장 아기 용품 쇼핑부터 시작해 애 유치원이 뭐냐, 대학부터 알아보고 성인식 날 유럽 저택을 선물할 거냐, 제트기를 선물할 거냐부터 논하기 시작할 거다.
그 정도로 극성들이다. 좋게 말하자면 에너지틱한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다혈질이다. 너무 멀리 나간다.
그러니까, 임신이 확정돼도 완전히 안정기에 들기 전까지는 집에 알리지 않는 쪽이 좋다.
그게 양가 어른들을 잘 아는 해준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현규 역시 해준의 의견에 절대 동의하는 바였다.
“……젠장…….”
임신 때문이든 발정기 때문이든 수현은 지금 안정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니 해준의 말대로 가족뿐 아니라 수현에게도 알리지 않고 확실해질 때를 기다리는 게 맞긴 하다.
그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급하다.
“……혈액 검사로 진짜 안 되나요?”
혹시나 하는 마지막 희망을 갖고 한 번 더 묻는 순간 해준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 난 애는 수현이 하나 키운 걸로 만족하는데?
내가 지금 너까지 키워야 하는 거냐는 말을 돌려 한 해준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드디어 육아에서 해방됐다고 좋아했더니 아들놈이 더한 놈을 데리고 와 버린 기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 때부터 곱게 키운 강아지가 길가에서 만난 미친개를 하나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는데, 그 미친개가 성격도 험악한 게 더럽게 말을 안 듣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 강아지한테서 떼어 내려 별짓을 해 봤지만 하필 그 미친개가 보증서가 붙은 희귀한 프리미엄 품종이라 쉽게 손을 댈 수도 없어 속이 터질 것 같은, 딱 그런 기분이었다.
볼수록 얘도 진상이다.
- 하여간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의사 말 들어. 그리고 나 지금 영화관이야. 이미 영화 시작했을 거야.
그건, 그만 좀 끊으라는 소리였다.
그 말을 잘 알아들었기에 현규는 침착하게 떡밥을 던졌다.
“뭘 보시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상영관 하나 통째로 빌려드릴게요.”
지금 마침 해준도 정식 프러포즈를 준비할 때라 그가 혹할 만한 미끼를 던지자 아니나 다를까 빠르게 걸려들었다.
- ……진짜?
“네. VIP관 통째, 아니 원하는 날짜와 타임에 영화관 통째로 비울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다 예매하면 되니까.
너무나 매력적인 그 제안에 해준이 잠시 침묵한다.
미끼를 문 거다. 그럼 이제 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쌍화탕은 언제 보내 주실 건데요?”
현규의 빠른 태세 전환에 해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 본가에서 곧 사람이 갈 거야. 30분 정도 걸릴 거니까, 인터폰 켜 두고. 아, 가는 김에 반찬도 좀 같이 가져가라고 할까?
“아뇨.”
여기서 뭔가 더 오면 냉장고가 터질 것 같아 현규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해준이 지금 상황을 눈치챈 듯 되묻는다.
- 수현이 또 요리했어?
“네. 곰솥으로 카레 끓여 놨어요.”
- 어…… 뭐, 곰솥이면 무…… .
무난하네, 라고 하려던 해준은 잠깐 말을 멈췄다.
뭔가 마음에 걸린 눈치였다.
- 혹시 수현이 스트레스받았어?
“아뇨.”
- 미열에 곰솥까지 꺼낸 거면 꽤 스트레스받았다는 건데…….
그렇지 않아도 현규도 그 부분을 걱정하던 중이긴 했다.
수현이 감자를 까는 기세가 무서워 묻지 못했을 뿐…….
하지만 그래도 걸리는 게 없다. 오늘은 모든 게 좋았다.
“……발정기 때문일까요?”
- 아니, 수현이는 그 정도로 섬세하진 않아.
“그럼요?”
- 깨면 물어봐. 그래도 곰솥 카레면 무난한 거야. 김치 500포기의 전설도 있으니까.
“김치 500포기요?”
- 그때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거든. 그래서 가족 몰래 이직한다는데도 안 말린 거야. 그 회사 계속 다녔다간 김치 공장 차리게 생겼으니까.
“……수현이가 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있나요?”
- 거기 대표가 좀 말이 안 통하는 타입이었나 봐. 원래 IT 전공도 아닌데 엔지니어와 동업해 스타트업을 차린 케이스인데, 동업자가 나간 뒤 본인이 실무를 모르니 말도 안 되는 작업 의뢰를 많이 받아 온 모양이야. 이렇게는 구현이 안 된다고 해도 무조건 하라고만 하니 수현이 성격에 스트레스받았겠지. 그래서 거기 팀장 따라서 이직한 거야. 그 팀장도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일단 전문 엔지니어고, 합리적이긴 하니까.
그렇게 들으니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해가 갔다. 대표가 전문 지식 없이 영업력만으로 회사를 차릴 경우, 흔히 보이는 트러블 케이스였다.
“……뭔지 대충 알겠네요.”
- 그래, 이젠 네가 알아야지. 무슨 일인지 일어나면 물어봐. 물어보면 곧장 말하니까. 대신 질문을 구체적으로 해야 돼.
내가 보내 준 ‘이수현 사용 설명서’를 참고하라고 말을 마친 해준은 드디어 통화를 마무리했다.
- 이제 진짜 들어가야 돼. 그럼, 수현이 잘 돌보고, 앞으로는 가능하면 전화하지 마. 인수인계하라고 한 건 너야.
자꾸 전화하면 이번엔 내가 착신 거부 걸 수도 있다고 마지막 경고를 남긴 뒤 해준은 야멸차게 전화를 끊었다.
평소보다 단호하고 큰 통화 종료음에서 해준의 지긋지긋해하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현규는 그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정확히는 거기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그제야 ‘임신’이라는 단어가 와닿기 시작했다.
갑자기 임신이라니…… 이건 너무 예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물론, 수현이가 발정기에 들어갔으니 막연히 ‘언젠가는’이라고 상상은 했지만 이렇게 가까운 시기에 임신이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사실 아버지가 특이한 케이스지 강씨 집안 자체가 손이 귀한 집안인 건 사실이고, 또 첫 발정기에는 임신 가능성이 낮아 이번은 아닐 줄 알았다.
“……애가 애를 낳는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이수현이, 내 아이를?
뭔가 되게 비현실적이면서도 어색하고 이상하지만 발이 땅에서 붕 뜬 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기라…….”
진짜 임신이면 뭘 준비해야 하는 거지? 일단 집부터 새로 알아봐야 하나?
그래, 이사부터 해야 한다. 이곳은 너무 도심이라 어린이집과 유치원도 없다.
아이를 위해 마당이 있고, 주변 학군이 좋은 곳으로 집을 옮겨야 한다.
그럼 일단 아파트는 리모델링 후 아무한테나 던져 주고,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주택가를 물색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일단 부동산이다.
급한 성미를 참지 못해, 현규는 시간도 확인하지 않고 자산 관리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에서 가까운 지역에 마당 있는 주택 좀 알아봐 주세요. 가격 무관.]
그렇게 메시지를 보낸 뒤 곧 현관으로 가 며칠간 꺼 놓았던 인터폰을 켰다. 그러곤 다시 침실로 돌아가 조심스레 침대 앞으로 다가서자 예상한 대로 이불을 걷어찬 수현이 푹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여전히 열이 높은 듯 살짝 땀을 흘리며 잠자고 있는 모습에 이불을 다시 꼼꼼하게 덮어 주곤 더는 이불을 못 걷어차게 아예 이불 위에 누워 끌어안자 수현이 폭삭 품에 안겨 든다.
약간 높은 체온과 기분 좋은 냄새에 현규는 수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작게 중얼거렸다.
“큰일이네…….”
아이가 생긴 건 좋은 일이지만 과연 우리가 애를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둘 다 결혼뿐 아니라 출산에 대한 상상도 한 적이 없기에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물리적인 문제야 사실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지만 부모가 갖고 있어야 하는 정보와 기술이 전무하다.
아니, 정보는 배우면 된다. 육아 서적을 미친 듯이 읽고 공부하고 유아 교육과 교수님들을 초빙해 강의를 들으면 열 달 안에 박사까지는 아니라도 학사 수준까지는 클리어할 수 있다. 다행히 수현도 자신도 기억력과 응용력은 좋으니까.
문제는 그보다는 가장 원초적인 의식주인데…….
품에 안긴 수현을 보곤 딱 수현이를 닮은 아기가 태어나면 어떨까, 하는 몽글몽글한 상상을 하자 아기 기저귀쯤은 얼마든지 갈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유를 먹이거나 목욕시키는 것도 완전히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아기가 잠도 안 재고 보채고 운다 해도, 24시간 잠을 안 자고도 달래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상상만으로도 벅찬 광경에 수현을 안은 채 휴대폰을 들어 올린 현규는 재빨리 지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현이 아기 때 사진 찍어 보내. 태어났을 때부터 돌까지. 전부.]
그간 이지수가 그 나이에 아직도 본가에서 사는 걸 보고 한심해했는데 지금만은 이지수의 자립성 없는 그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의 이지수는 365일 중 마음에 드는 날이 하루뿐이었는데 오늘부로 1년에 이틀 정도는 마음에 드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내일이 되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외탁은 하지 마라…….”
친탁도 별로지만 외탁은 더욱 별로니, 그냥 엄마만 닮는 게 좋다. 물론, 아빠를 닮는 것도 잊지 말고.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현규는 일단 지금쯤 간신히 세포 분열을 시작했을 아기에게 당부했다.
지금쯤 세포 분열을 얼마나 했을까 떠올린 순간 또다시 벅차 수현의 이마에 입을 맞춘 현규는 이번엔 인터넷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검색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아이 유치원은 언제 신청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