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60)

* * *

기억나는 것은 보석처럼 반짝이던 얼음 조각과 너무 아름답게 웃던 형의 얼굴, 그리고 형과 함께 서 있던 남자의 화사한 이미지뿐이었다.

유난히도 화창하던 햇살 아래의, 새하얀 건물 앞에 선 두 사람을 본 순간 느낀 감정은 약간의 서러움, 부러움, 그리고 외로움과 겸연쩍음…….

그런 거였던 것 같다.

그 순간에는 몰랐지만, 그랬었다.

왜인지 저기에 발을 디뎌 두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재빨리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그리고 바로 직전에 왔던 길 그대로, 몇 시간을 걸려 삼촌 집으로 돌아간 뒤 몸살이 와 앓아누웠다.

익숙하지 않은 거리를 장시간 운전하며 긴장한 탓도 있지만, 그날 차의 히터를 틀지 않았던 이유가 가장 컸다.

너무 당황해 히터를 켜야 한다는 걸 잊었던 것 같다.

그날 열에 들떠 끙끙 앓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형이 무서워 도망 다니던 시절부터 형을 좋아했던 것 같다고.

하지만 첫사랑의 자각은 실연과 함께였고, 첫사랑의 끝은 의외로 싱겁고 시시했다.

그래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것도 실연이라는 것도 살면서 가끔 당하는 아주 사소한 접촉 사고 같은 느낌이었다.

본인이 아무리 조심해도 상대의 과실로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아주 잠깐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자신이 먼저 사고를 내기도 하는, 그런 필연적이면서도 우연 같은 느낌이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랬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실연의 극복은 쉬웠다.

그 순간의 타격은 있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순간 몸도 마음도 금세 회복됐다.

그리고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극히 평범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가끔 지수 형을 통해 현규 형의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딱히 형이 아주 많이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자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슬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충격이었던 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했구나, 라는 사실이었지 실연 자체는 디폴트값이었기에 놀라울 게 없었다.

아마, 그 겨울의 여행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 감정을 평생 모르는 채 살았을 거다.

저 형은 무서운 사람이구나, 라는 감상만을 가진 채.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미 끝난 사랑이었기에 그 감정을 모르던 시절과 달라질 건 없었다.

지금 회사로 이직한 이유는 오로지 강 대표님의 회사면 아버지나 형들이 간섭을 안 할 것 같아서였고 형을 다시 만났을 때는 놀라긴 했지만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28살의 이수현에게 강현규라는 사람은 이전과 같이, 잔소리가 심해 만나면 피하고 싶고 어쩐지 무서운 눈빛을 한 형의 친구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 계약 연애 역시 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당시 피로와 술에 찌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탓도 있지만 이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기에, 오케이를 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알 것 같았다.

그날 그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린 건 술에 취해서도, 피곤해서도 아니라, 그냥 그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였다는 걸.

자각한 날로부터 5년의 시간을 넘어, 자신의 첫사랑은 현재 진행 중이었다.

* * *

가까운 곳에서 울려오는 알람 소리에, 환한 햇살 아래 눈을 뜬 수현은 바로 앞에 놓인 현규의 얼굴을 보곤 놀라 눈을 껌뻑였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눈을 뜰 때마다 이 얼굴이 앞에 있으면 놀라고 만다.

한 침대에서 누군가와 함께 자는 게 아직 어색해서라는 이유가 반,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뜬 순간 보기에는 부담스럽게 잘생긴 얼굴이라는 이유가 반이었다.

특히나 아직 잠들어 있는 형의 얼굴은 낮에 눈을 뜨고 있을 때와는 달리,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인상이 사라져 순하고 청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청량한 미소년 같은 이미지의 얼굴에 수현은 넋이 나간 듯 현규의 얼굴을 응시했다.

“얼굴은 좋아…….”

역시 난 얼굴만 보는구나, 라고 새삼 떠올리던 수현은 그제야 계속해서 울려 대는 휴대폰을 돌아봤다.

형은 꽤 예민해 작은 소리에도 잘 일어나는 타입인데 오늘은 유독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먼저 알람을 끄려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7시 30분이다.

“어……?”

분명히 휴가는 어제까지였다.

오늘부터는 출근하겠다고 한 터라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다.

바로 옆에 누운 형의 팔다리가 몸에 칭칭 감긴 채 전신을 누르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형.”

“…….”

“형?”

손가락으로 형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불렀지만 답이 없다.

이것도 이변이다.

이 정도까지 하면 무조건 깨는데, 피곤한지 반응이 없다.

새벽에 혼자 뭘 했길래…….

혹시나 하며 이불 아래 몸을 확인했지만 옷은 어제 그대로다.

전부 얌전하게 입고 있다.

설마 하고 다시 입힌 건가 잠시 의심했지만, 했으면 깔끔하게 씻겨서 잠옷을 입혔을 거다.

후드티 혐오자인 형이 이 옷을 그냥 뒀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그건 아니다.

그런데, 너무 못 일어난다.

형답지 않게.

“형…….”

“…….”

“형, 진짜 저도 이런 말씀 드리기 싫은데요…….”

모처럼 안 무서운 현규 형을 깨우는 건 싫지만…….

“형, 이제 일어나야 돼요.”

“…….”

“형…….”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형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세게 찌르자 잠들었던 형이 인상을 쓰며 겨우 눈을 뜬다.

뭐냐고 짜증을 내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형이 이쪽을 보더니 갑자기 웃는다.

눈을 가늘게 뜨며 환하고 달콤하게. 그리고 설레게.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크게.

형이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잘생겼다는 건 팩트지만 그중에서도 오늘의 형은 유독 잘생겼다.

부정맥이 올 정도로.

“잘 잤어?”

막 잠에서 깬 채라, 살짝 갈라진 음성으로 속삭이며 눈웃음을 흘리는 형은 과하게 섹시했다.

이 사람 혹시 새벽에 술 마셔서 취한 상태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뜨거우면서도 녹아 들어갈 듯 다정한 눈빛과 미소에, 나대는 심장을 겨우 누르며 작게 답했다.

“네.”

“열은?”

“아직 살짝 몸이 나른하긴 한데, 괜찮아요.”

지난밤 미열의 여파인지 노곤함이 남아 있어 100%의 컨디션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젯밤에 쌍화탕을 먹고 푹 잔 덕에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형은 전혀 안 괜찮아 보였다.

“열은 내렸네.”

이마를 손으로 짚어 열을 잰 형이 다시 그곳에 입을 맞추며 또 웃는다.

너무 예쁘게 웃어서 미치겠다.

지난번 술에 취했을 때보다 더 파괴적인 미소였다.

“……형, 아침부터 이런 말 하는 게 실례라는 건 아는데요…….”

이쯤 되면 바로 ‘그럼 하지 마.’가 나와야 하기에 조심스레 형의 눈치를 살피는데 너무나 뜻밖의 답이 나왔다.

“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는 현규의 다정한 태도에 수현은 서스펜스를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취한 게 아니면 형이 확실히 미친 것 같다.

“혹시 술 드셨어요?”

“……응?”

“새벽에 술 드셨거나 아니면 술 덜 깨신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면 저렇게 웃을 리가 없는데, 라는 의심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무서워서인지 설레서인지 헷갈려 하며 형을 바라보고 있자 형의 눈동자 위로 약간의 빡침이 스쳤다.

그러곤 입술을 살짝 올려 웃는데, 딱 형의 평소 미소다.

짜증 났을 때의.

“너, 아침부터…….”

뺨을 쭉 잡아당기며 잔소리를 하려던 현규가 이내 아차 한 듯 서둘러 손을 놓는다. 그러더니 다시 태도를 바꿔 상냥하게 웃는다.

“……아픈 사람 두고 혼자 술은 안 마셔. 열은 내렸지만 아직 몸 안 좋은 것 같으니 더 자. 아니면, 배고파? 식사 준비할까?”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현규는 과하게 친절했다.

수현은 그게 좀 거슬렸다.

기본적으로 자신에게는 다정한 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오늘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형답지 않게 참고 있는 느낌이었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 패턴에 수현은 일단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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