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간의 경험으로 수현은 이 세상 사람들 다 믿어도 현규만은 절대 믿으면 안 된다는 진리를 깨우친 채였다.
사랑과 불신은 별개의 문제였다.
어떻게 봐도 불길한 그의 태도에 수현은 도망치듯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저, 먼저 출근 준비할게요.”
“그냥 쉬어. 출근 안 해도 돼.”
“휴가 끝났어요.”
“연장하면 되지.”
“오늘은 진짜 출근해야 돼요. 이제 슬슬 팀장님이 서류 정리에 질릴 때가 됐어요.”
보기 싫어지면 그 서류들을 전부 내 책상 위에 던져 둘 사람이라 하루라도 빨리 나가 처리해야 한다고 수현은 침대에서 내려와 문으로 향했다.
다급한 수현의 걸음에 현규 역시 재빨리 수현의 뒤를 따랐다.
“괜찮아. 이제부터 그런 건 윤 팀장이 알아서 할 거야. 네가 윤 팀장 뒤처리까지 해 줄 필요 없어.”
“윤 팀장님은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아니에요. 저 먼저 씻을게요.”
침실을 나오자마자 곧장 욕실로 들어선 수현은 현규가 더 말을 걸기 전에 문을 닫고 세면대로 향했다.
그리고 막 거울을 바라보는데 얼굴이 부스스해 보였다. 정확히는 좀 부은 느낌이었다.
잠을 너무 자서인지 아니면 어제 미열 때문인지 몸 전체가 좀 붓고 컨디션도 썩 좋지는 않았다.
형 말대로 오늘도 쉬는 게 나을까 고민하며 물을 트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노크 소리에 물을 끄며 그렇게 답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곧 문이 열린 공간을 문짝만 한 남자가 대신 막아선다.
아니, 문짝보다 클지도 모른다.
매일 보지만 볼 때마다 놀라는 현규의 사이즈에 수현은 새삼 감탄했다.
“크다…….”
저도 모르게 나간 중얼거림에 현규가 그 말이 마음에 든 듯 웃는다.
“그 큰 게 네 거야.”
그래서 기쁘지, 행복하지, 라는 얼굴로 현규는 화사하게 웃었다.
달콤하고 나른하게, 그리고 부담스럽게.
사실 크다고 한 것도, 너무 커서 거치적거린다고 하려던 건데 오늘 현규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 수현은 일단 말을 돌렸다.
“그런데 왜요, 형?”
“물 안 차가운가 해서.”
“……방금 틀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지금은 차갑지만 좀 이따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라는 답에 현규가 다시 묻는다.
“바닥은 안 미끄럽고?”
이 집에서 벌써 1년 넘게 살았지만 이 집 바닥이 미끄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하며 수현은 황당해하는 얼굴로 현규가 바라봤다.
“여기 바닥, 미끄러워요?”
“……어지럽지 않을까 해서……. 열이 꽤 많이 났으니까.”
열이 그렇게 많이 났던가 떠올려 봐도, 그런 기억은 없다.
그냥 미열이었다. 쌍화탕도 혹시나 해서 먹은 거고.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그럼, 아침 먹을래?”
“그보다 커피 마시고 싶은데요.”
늘 하던 루틴대로 먼저 커피를 내려 달라고 하려는데 한 박자 빠르게 답이 나왔다.
“커피는 안 돼.”
“……왜요?”
“어제 아팠잖아. 당분간 커피 마시지 마.”
아픈 것과 커피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가 수현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그 감정을 현규는 그대로 읽어 냈다.
어제 아팠으니 커피를 끊으라니, 위장 장애로 인한 병이 아닌 이상 누가 들어도 좀 이상하긴 하다.
“너, 커피 너무 많이 마셔. 작업할 때는 어쩔 수 없다지만 작업 마무리한 후에는 안 마시는 쪽이 좋아. 나도 같이 끊을게.”
“전 커피 안 마시면 종일 멍한데요?”
“그러니까, 더 끊어야지.”
뭐든 중독은 좋지 않다고 현규가 아이를 어르듯 달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현은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인정했다.
직업 탓인지 자신이 카페인을 과하게 섭취하는 편이긴 하다.
특히 일이 몰릴 때는 하루 섭취량 이상의 카페인뿐 아니라 고농도의 타우린까지 퍼부어 가끔 손이 떨릴 정도라 조심하긴 해야 한다.
20대 사인이 심장 마비인 건 좀 그러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디카페인으로 마시면 안 될까요?”
엔지니어들에게 커피란 물 대용이었다. 아니, 물 이상의 존재다.
물은 안 마시고 살 수 있어도 커피는 안 마시고 못 산다.
끊는 쪽이 좋다는 건 알지만 이미 카페인에 찌들어진 몸뚱이는 당장 하루를 버티기가 힘들 거다.
그러니 플라세보 효과를 위한 대체제가 필요하다고 수현이 절충안을 제안하자, 현규가 그 제안을 즉시 받아들인다.
“그건 괜찮아.”
“그럼, 디카페인에 적응해 볼게요…….”
예전에 한번 시도했다 더럽게 싱거워 포기했던 디카페인에 다시 도전해 볼 결심을 한 수현은 욕조 쪽으로 가 물을 틀었다.
순간, 문틀에 기대선 채 안쪽을 감시하듯 지켜보던 현규가 놀라 묻는다.
“샤워하려고?”
“네.”
열이 나 땀도 꽤 났으니까, 라고 수현은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눈을 껌뻑였다.
의아함이 가득한 그 얼굴에 현규가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띤 채 역설한다.
“어제 열이 났으니 샤워는 내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열이 났으니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이 정도면 괜찮아요. 출근하려면 씻어야죠.”
“그냥 출근을 안 하면?”
그렇지 않아도 몸이 좀 나른하긴 했지만 그래도 더 이상의 결근은 안 된다.
어차피 탄력 근무제라 휴가를 더 끌어다 쓸 수 있다 해도 갑자기 너무 오래 쉬었다.
그나마 큰 작업 마무리 후라 다행이지, 뭐라도 진행 중이었다면 진짜 큰일 났을 거다.
오늘 당장 책상 위에 쌓여 있을 서류를 생각하니 아찔하다.
“발정기도 다 끝났는데 이제 출근해야죠…….”
“왜?”
난데없는 질문에 수현은 당황한 얼굴로 현규를 바라봤다.
출근은 그냥 하는 거다. 거기에 이유 같은 건 필요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등교나 출근을 할 때 ‘왜?’를 떠올려 본 적이 없기에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출근하면 안 되나요?”
내가 출근하면 뭐 큰일 나냐고 수현이 오히려 되묻자 현규가 아차 한 듯 말을 바꾼다.
“그게 아니라…… 아직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좀 더 쉬었으면 하는 거야.”
“몸은 괜찮은데요?”
“그건 모를 일이지. 올해 독감이 유행이라니까…….
“……10월인데요?”
아직은 독감 바이러스가 떠돌 시기도 아니거니와, 특히 요 며칠은 집에서 현규와만 있었는데 내가 걸렸으면 형도 걸렸겠죠, 라고 하고 싶었지만 수현은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왜인지 현규는 독감도 안 걸릴 것 같다.
“아직 한국은 바이러스가 돌 시기는 아니지만 해외 여행객들이 많이 걸려서 오기도 하니까 조심해야지.”
그러니까, 난 아예 외출을 안 했다고 말하려다 수현은 슬금슬금 욕실 구석에 처박히며 현규를 힐끔거렸다.
오늘 형이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눈치가 없어도 이런 건 알 수 있다.
형의 평소 행동 양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나 싶은 생각에 물을 틀어 놓은 수현이 완전히 구석에 찌그러진 채 경계하듯 바라보자 현규가 순간 성질을 참지 못하고 살짝 웃었다.
얘 봐라, 하는 얼굴로.
하지만 찰나의 순간 냄비 속의 산 낙지처럼 기어 나오려는 그 성질을, 현규는 잘 참아 냈다.
“……그래, 출근하고 싶으면 해야지…….”
“그렇다고, 출근을 하고 싶은 건 아니고요…….”
그 와중에도 수현은 출근은 해야 해서 하는 거지, 내가 출근하는 걸 좋아해서 하는 건 아니라고, 현규의 표현을 정정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한 그 말에 현규는 순간 욱했지만 이번에도 그걸 잘 참아 냈다. 얘랑 말 안 통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
지금은 아기를 위해서,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한다.
“그래, 그럼 씻어. 아침 준비할까?”
“제가 할게요.”
“내가 할게. 카레? 아니면 만두 먹을래?”
당연히 어제 못 먹은 카레, 라고 하려던 수현은 만두 이야기가 나오자 입술을 달싹이다 멈췄다.
카레도 좋지만 만두는 너무 좋다. 그리고 카레를 먹어야 하지만 만두도 너무 먹고 싶었다.
둘 중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정신없이 흔들리는 동공에 현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그럼 카레랑 만두 둘 다 먹을까? 튀김도 같이 해도 되는데?”
이젠 셋이니까, 라는 말을 현규는 입 안으로 삼켰다.
“샤워하고 나와서 튀김은 제가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