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60)

“괜찮아. 나도 할 수 있으니까 천천히 씻고 나와.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차가운 물에는 샤워하지 말고 따뜻한 물 써. 배스 가운 있지?”

삼촌보다 더한 잔소리에 수현은 기가 질려 현규를 바라봤다.

맞다.

이 사람 원래 잔소리 심하다.

“귀차…….”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려는 마음의 소리에 수현은 아차 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현규는 그 말을 들은 상태였다.

아니, 안 들어도 수현의 얼굴 위에 쓰여 있었다.

순간 천사 같은 현규의 미소 위로 희미한 짜증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수현은 그걸 못 본 척했다.

그리고 현규는 그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런 짜증은 없는 척, 자상한 척.

“꼭 문 열어 놓고 씻어. 혹시 쓰러지기라도 하면 위험하니까.”

문 열고 샤워를 왜 해요, 그건 변태 같잖아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싫다고 하면 현규의 인내심이 드디어 터질 것 같아 수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착하네. 혹시 모르니까 욕실 히터도 켜고.”

“……네…….”

말한 그대로 욕실 문을 훤히 열어 둔 채 사라지는 현규의 뒷모습에, 수현은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현규를 바라봤다.

하룻밤 앓고 일어난 것뿐인데 현규의 태도는 과했다.

너무 심하게 친절하고 불길할 정도로 다정했다.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 * *

“……저 큰 병이에요?”

“……저 큰 병이에요?”

샤워를 하고 나와 강제로 현규 손에 머리가 말려진 수현은 등에 로션을 떡칠하고 있던 현규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샤워하는 내내 그게 궁금해 미칠 것 같았기에 더는 참지 못하고 물은 건데 현규는 그건 무슨 소리냐는 황당해하는 얼굴로 수현을 바라봤다.

“……그건 또…… 신선한 발상이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지?”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라는 말을 상냥하게 돌려 한 그 질문에 수현은 솔직하게 말했다.

“형이 너무 이상해서요. 저 어디 많이 아픈 거예요?”

혹시 나 자는 사이 주치의 선생님이 많이 아프다고 연락한 거냐고 수현은 거울 너머로 뒤에 선 현규의 눈을 응시했다.

솔직하게 말해 달라는 그 애절한 눈빛에 현규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너무 기가 막혀서.

“……아냐. 아프다 일어났으니 걱정하는 거지.”

“겨우 미열로요?”

“……미열이라도 열은 열이지. 마침 발정기 직후기도 하고, 어제 컨디션도 안 좋아 보였으니까.”

단지 그뿐이라고, 현규는 수현의 질문을 얼버무렸다.

썩 시원한 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된다고 따지기에는 또 애매했다.

확실히 어제 컨디션이 별로이긴 했던 터라, 수현은 일단 납득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수현을 내려다보며 현규는 아주 잠깐 사실대로 말해 줄까 하는 충동을 느꼈지만,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 냈다.

해준의 당부도 있지만 수현도 워낙에 성격이 급한데다 뭔가가 확실해지기 전에는 안절부절못하는 성격이니 지금은 모르는 게 좋다.

그리고 만약, 진짜 만에 하나 임신이 아닐 경우 크게 실망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 나쁠 게 없다.

어차피 일주일 후면 알게 될 일이다.

“가을이라 건조하니까 로션은 꼭 챙겨. 머리는 잘 말랐는데…… 많이 길었네…….”

다 말랐는지 확인하려는지 현규가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모습에 거울로 자신의 머리를 확인한 수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덥수룩하다. 특히 거울을 통해 워낙 깔끔하게 정리된 외형의 현규와 비교해 보니 더욱 지저분해 보였다.

슬슬 머리를 정리하긴 해야 할 때였다.

눈가를 덮고 있는 앞머리가 곧 눈을 찌를 듯했다.

“주말에 정리할게요.”

“안 잘라도 돼. 그냥 하던 대로 하고 다녀.”

“눈 찌르는데요.”

“아예 더 기르면 괜찮아.”

“삼촌한테 혼나요.”

“괜찮아. 해준 형한테 완전히 인수인계 받았어.”

이제 네 관리는 내가 한다는 그 말에 수현이 바로 받아친다.

“형이 혼날걸요, 그럼.”

“응. 내가 혼날게.”

아무리 혼나도 이 예쁜 얼굴은 못 보여 주지, 라며 수현의 머리에 입을 맞춘 현규는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었다.

“냄새 좋네.”

그루밍 제품을 통째로 같이 쓰는 탓에 수현의 몸에 자신의 냄새가 배며 페로몬이 뒤섞였는데, 그 냄새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수현은 모르겠지만 수현의 페로몬과 자신의 페로몬은 합이 좋았다.

간혹 냄새가 뒤섞이면 악취를 풍기기도 하는데 수현과 자신의 냄새가 섞이면 달콤하고 시원하면서도 폭신폭신한 느낌의 향이 풍겼다.

향의 조합도 밸런스도 굉장히 좋았다.

‘예쁜 애 옆에 예쁜 애’라는 표현처럼 좋은 냄새와 좋은 냄새를 모두 섞어 조향한 느낌이었다.

그 달콤하면서도 상쾌한 향에 홀려, 수현의 머리카락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자 수현이 간지러운지 웃는다.

“형이랑 같은 샴푼데요…….”

“그래서 좋다고.”

진짜 향에 취한 듯 눈을 가늘게 뜬 현규의 얼굴을 거울로 본 수현은 그 말에 동의했다.

“저도 형 냄새 좋아해요.”

“그래야지.”

뒤에서 수현을 안은 채 이마와 목덜미에 입을 맞춘 현규는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여 수현이 걸친 배스 가운의 띠를 풀었다. 그러곤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운을 끌어 내리자 수현은 질색하며 옷자락을 잡았다.

“형, 우리 출근해야 돼요.”

아침부터 이러면 안 된다고 막 현규의 손을 막으려는데 그보다 빨리 현규가 뒤로 물러섰다.

“그래, 아침 먹어야지. 옷 입고 와.”

“…….”

“식탁 차릴게.”

평소와 달리 너무나 쉽게 떨어져 주방으로 가는 현규를, 수현은 아연해진 채 바라봤다.

조금 놀란 듯, 그리고 의혹이 가득한 눈빛으로.

* * *

- 삼촌, 현규 형이 이상해.

출근 직후, 휴대폰에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놀라 전화를 한 해준은 수현의 첫인사에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왜 얘네들은 일만 생기면 나한테 전화하는 걸까?

그것도 대부분 별것도 아닌 일로.

“수현아…….”

- 응?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얘기를 해 주고 싶었는데…….”

거기서 말을 끊은 해준은 수현이 충격받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고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현규는 늘 이상했어.”

그러니까, 오늘 이상한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정상이라고 해준은 말했지만 수현은 이번만은 삼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 아니, 오늘은 진짜 많이 이상해.

“아냐. 원래 그랬어. 네가 모른 거지.”

사실 그간 해준도 설마설마했는데 어제 통화 후 확신했다.

강현규도 진상이다.

일단 겉보기엔 멀쩡한 데다, 그간 그다지 가까이 지낼 일이 없어서 몰랐을 뿐, 걔도 절대 정상은 아니다.

특히, 수현이 문제에 한해서는 애가 늘 돌아 있다.

- 아냐. 그래도 진짜 이상해. 너무 잘해 줘. 아침도 차려 주고 머리도 말려 주고 옷도 입혀 주고, 회사까지 오는데 다리 아프면 업어 준대. 우리 집에서 회사까지 20미터가 안 되거든. 그리고 엘리베이터 탈 때도 앞을 막아 주고. 너무 이상해.

“그건 육아…….”

내가 너 유치원 보낼 때 그랬던 것 같은데, 라고 하려다 해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육아를 하긴 한 거다, 현규가.

수현이가 아니라 수현이 배 속에 있을 아직 수정란 형태의 아이 육아를.

걔도 참 적당히를 모른다.

수현이 모르게 하라고 몇 번을 당부했는데 그렇게 티를 내냐?

“하아…….”

이 바보 둘을 어쩌면 좋으냐고 탄식하며 해준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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