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60)

한 놈은 너무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상식이 없고 한 애는 너무 곱게 자라서 뭘 모른다.

어쩐지 속이 답답해 커피라도 마시려고 텀블러에 손을 뻗는 사이 수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 발기를 안 해.

“……응?”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하며 막 텀블러를 손에 들려던 해준은 한 박자 느리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기겁했다.

- 아침에 머리 말려 주고 배스 가운을 벗겨 놓고 그냥 갔어.

아침부터 배스 가운은 왜 벗기는데?

아니, 그 전에 내가 아무리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지만 직접 기저귀 갈고 젖병 물려 가면서 키운 수현의 입에서 저런 건 듣고 싶지 않았다.

수현이를 독립시킨 뒤 처음으로 뇌에 과부하가 일어나, 해준이 저도 모르게 책상 위에 손을 내리는 순간 쾅 하는 소음이 울려 왔다.

그 소리에 수현이 놀라 묻는다.

- 삼촌 왜?

“……텀블러가 떨어졌어.”

너무 당황해 텀블러가 손에 닿은 줄도 몰랐다.

- 커피 쏟았어?

“아니. 닫혀 있었어.”

주영이 출근 전에 커피를 내려 주며 책상 위에 둘 때는 꼭 입구를 닫아 두라고 당부해 그대로 한 건데, 주영의 말을 듣길 잘했다.

오늘은 도면은 없지만 대신 노트북이 있었다, 책상에.

갑자기 주영이 보고 싶어졌다.

- 다행이네.

“응…….”

- 하여간, 형이 오늘 아침부터 너무 친절하고 눈 마주치는데도 안 만져.

아주 잠깐 벗어났던 본론으로 돌아와 수현이 다시 진지하게 건넨 말에 해준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책상에 몸을 기댔다.

그건 네가 임신일 가능성이 있어서 배려해 주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자신이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문제는 수현이 직접 알아채든가 현규가 말해야 한다.

아니, 애초에 이걸 자신이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어제 현규가 전화만 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먼저 알아챌 일은 없었는데…….

왜 난 매번 이 녀석들도 모르는 속사정을 먼저 알아채 고생하는 걸까?

나도 이 오지랖이 문제라고 자책하며 텀블러의 입구를 연 해준은 최선을 다해 수현의 의혹을 씻겨 주었다.

“아무리 현규라도 24시간 발정 상태는 아니겠지. 특히 출근 전에는.”

- 아니야. 24시간 발정 상태 맞아. 발정기 내내 했어. 나 기절했을 때도 했어.

그 말에 해준은 막 한 모금 넘기던 커피를 내뿜었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가 사방으로 튄 탓에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양복을 닦은 해준은 곧 티슈를 뽑아 책상 위를 닦았다.

다행히 노트북은 닫힌 채였다. 출근하자마자 수현에게 “살려 줘.”라는 메시지가 와 전화부터 하느라 바빴다.

- 사레 걸렸어?

“응. 커피가 좀 걸려서…….”

다행히 기도로 넘어가기 직전 뿜어 곧장 기침도 진정됐다.

하지만 여전히 손은 부들부들 떨려 왔다.

새삼,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뼛속까지 와닿았다.

진짜 모르고 싶다.

“그래서, 현규가 뭐라고?”

- 발기를 안 했다고.

자신이 태어난 후 들었던 말 중 가장 쓸데없는 걱정에 해준은 인내심을 갖고 수현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전혀 안 이상해. 보통은 아침부터 발정, 아니 발기, 아니 달려들지는 않아.”

- 형은 해.

“……그건 걔가 이상…… 아니. 어쨌든 네 발정기도 끝난 상황이고 그간 내내 했다면 아무리 걔라도 더는 나올 정액도 없을 거야.”

- 그런데도 계속 나왔어. 형 발기 시간도 길지만 간격도 짧고 정액량도 많아서 계속 넘쳐서…….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시작된 상쾌한 가을 아침의 음담패설에 해준은 필사적으로 수현의 말을 막았다.

“수현아!”

제발 그만해 이 자식아, 라는 긴 문장을 다 말할 여유가 없어 대신 짤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수현이 다행히도 입을 다문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교육의 결과였다.

겨우 되찾은 마음의 평화에 해준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차분하게 통화를 시작했다.

“수현아, 내가 아무리 널 키웠다고 해도, 아니, 널 직접 키웠기 때문에 난 너희 성생활에 대해서는 듣고 싶지 않아.”

- 그럼 누구한테 얘기해?

그렇게 물어보면 그것도 문제긴 하다.

골치 아픈 상황에 해준은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이럴 때를 위해 오메가들의 커뮤니티가 필요한 건데 얘는 그간 너무 베타처럼 살았다.

오메가 유치원에 있으면 지금이라도 넣어 주고 싶다.

“그런 사적인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안 하는 게 좋겠어. 굳이 해야 한다면 현규랑 해야겠지?”

- 형이 이상한데?

“……그러니 더욱 현규랑 얘기해야지.”

- 말을 안 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삼촌한테 묻는 거지, 라는 반응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렇겠다.

내가 수현이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현규가 그러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 참는 거야. 그 녀석도 양심은 있으니 무리하게 한 게 미안했겠지.”

- ……현규 형이?

현규는 죄책감 같은 건 안 느낀다는, 수현의 극히 합리적이고 경험에 의거한 판단에 해준은 쓰게 웃었다.

물론, 그가 사실이긴 하지만 어쩌다 수현이한테 이런 취급 받게 된 거냐, 강현규?

“……네가 어제 아팠잖아. 어젯밤에 현규가 걱정돼서 전화했었어. 발정기라고 과하게 해서 그런 줄 알고 당황했나 봐.”

- ……그랬어?

“응. 많이 걱정하길래 미열이니 그냥 두라고 하고 쌍화탕 보내 준 거야.”

- 어, 어쩐지 맛이 너무 익숙하더라…….

편의점에서 사 온 줄 알았는데 우리 집 거였구나, 라고 수현은 납득했다. 그 정도로 현규가 걱정했다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순순한 그 반응에 그제야 해준은 안도했다.

일단 이 문제는 그렇게 넘어가는 듯했다.

“그래,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 응.

“그보다, 오늘은 컨디션 괜찮은 거지?”

다시 그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바꾸자 다행히도 수현이 잘 따라온다.

- 조금 나른하긴 한데 괜찮아.

“몸살 기운 같아?”

- 응. 살짝. 그런데 또 아프다고 할 정도는 아냐.

이건 100%다. 어지간하면 임신일 거라고 해준은 확신했다.

이걸 잘됐다고 해야 할지 안 됐다고 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다른 데 아픈 데는 없어?”

- 괜찮아.

“밥은 잘 먹고?”

- 당연하지. 아침에 카레랑 만두 먹었어.

카레 이야기를 들으니 다른 문제가 하나 떠올랐다. 잠깐 당황해 잊고 있었는데 그것도 있었다.

“너, 어제 곰솥에 카레 했다며?”

- 응? 아…… 뭐…….

“곰솥까지 간 거면 요리하는 중에 집중 못 하고 계속해서 재료를 넣었다는 건데…… 집중 못 할 이유가 있었어?”

- 어…….

수현답지 않게 답을 질질 끄는 듯한 느낌에 해준은 뭔가 있다고 직감했다.

수현이 곰솥에 카레를 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라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 이렇게 답을 못 하고 말을 끄는 건 뭔가 있었다는 거다.

더불어 현규가 수현이 임신에 정신이 팔려 수현의 컨디션이 갑자기 안 좋아진 이유에 대해 안 물어봤다는 것도 알겠다.

“무슨 일인지 삼촌이 물어도 될까?”

- …….

“응?”

- 어제 큰형한테 혼나고 아버지가 결혼 준비 중이시라길래, 내가 잘 생각해 봤는데…….

“그런데?”

- ……내가 사실은 현규 형을 좋아했거든…….

멋쩍어하는 게 분명한 그 음성에 해준은 그런 수현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난생처음 하는 고백이 민망하고 낯설고 어색해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게 분명해서였다.

“알아.”

- 응?

“안다고.”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솔직히 답한 순간 수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알았다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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