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60)

- 어떻게 알았는데?

만약 같은 상황에서 현규가 똑같이 물었다면 “모르겠냐?”라고 비웃었겠지만 상대가 수현이기에 해준은 최대한 상냥하게 설명해 줬다.

“난 네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봤던 사람이야. 네가 태어나 윤겸 형 다음으로 본 사람도 나야. 윤겸 형이 나한테 먼저 널 안겨 줬거든. 눈도 제대로 못 뜨던 그 아기를 내가 우유 먹이고 기저귀 갈아서 키웠는데 모를 수가 없지. 물론, 나도 최근에 안 거긴 하지만.”

- ……그렇게 티 났어?

“다른 사람은 모를 거야. 하지만 나한테는 그냥 보였어.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았거든. 계약 연애까지는 그렇다 쳐도 아무리 피곤하고 취해 이성을 잃었다 해도 네 성격에 그날 바로…… 했다는 건…… 말이 안 됐거든.”

- ……그건, 그렇지.

나도 그게 이상해서 겨우 깨달은 거라고, 수현도 순순히 수긍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해도, 아니 그럴수록 평소 행동 양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사람인데 그날의 수현은 그 범주를 너무 심하게 벗어났다.

수현에게 원래 그런 주사가 있었다면 모를까, 술을 마시면 아무 데서나 처박혀 자는 게 전부인데 그 와중에 현규를 집까지 데려와 침대까지 갔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 그건 현규라서 그랬을 거다.

수현도 이미 그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다.

- 그거 형들도 알아?

“당연히 알겠지. 각인까지 한 상황이니.”

그 녀석들이 심하게 단순하고 생각이 짧은 건 사실이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분위기를 보고 모를 수 없다.

거기다 각인까지 됐으니 게임 끝이다.

“그런데, 그게 왜?”

현규를 좋아하면 오히려 더 문제없는 거 아니냐고 반문에 수현이 어색하게 입을 연다.

- 내가 어제부터 뭘 까먹은 것 같아서 계속 찝찝했는데…… 그게 혼후 계약서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그럼?”

- 이번에 가족들한테 사기 친 거 들키고 아버지가 결혼 준비까지 하시는 거 보고 어차피 각인까지 했으니까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지 않나, 했거든. 내가 현규 형을 좋아하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수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 이내 머리를 정리한 듯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런데 갑자기 그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왜?”

- 그게, 우리 계약 결혼이었잖아.

“……응?”

- 내가 잊고 있던 게 그 부분이었던 것 같아. 혼후 계약서는 우리 계약에 대한 서류라 마음에 걸렸던 건가 봐.

현규와 지내면서 어색하고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즐거웠기에 계약 결혼이라는 것 자체를 잠깐 잊고 있었던 것 같다고, 수현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어쨌든 현규는 다정했고 자신은 아직 현규를 많이 좋아했다. 같이 있으면 무섭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행복하고 즐거워서 계속 이대로이길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머리로는 계약 결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실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는 수현의 고백에 해준은 당황했다.

그것도 굉장히.

“잠깐, 잠깐만, 수현아…….”

- 응?

“설마 해서 묻는 말이지만…… 너, 현규한테 프러포즈 안 받았어?”

- ……응?

“고백 안 했어? 현규가?”

- 어…… 반지는 받았는데?

프러포즈 링인지 웨딩 밴드인지는 헷갈리지만 반지를 주는 게 프러포즈라면 받기는 했다는 수현의 답에 해준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거 말고. 혼인 신고 한 뒤에, 아니, 최근에 현규가 제대로 프러포즈 안 했어?”

- 혼인 신고 한 뒤에 프러포즈를 왜 해?

이미 혼인 신고 했는데, 라는 수현의 반문에 해준은 황당함에 텀블러 입구를 열고 입 안에 들이붓다 뜨거워 또 커피를 뿜어냈다.

속이 타 마시려던 건데, 너무 뜨겁다.

하지만 입천장이 덴 건 일도 아니다.

이 자식들 처음부터 엉망이더니 순서도 과정도 뒤죽박죽이다.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다.

당장 임신까지 하게 된 상황에 아직 프러포즈도 안 했다니, 이게 무슨 일이냐?

“강현규…….”

너 내 말 어디로 들었냐고 잇새로 작게 중얼거린 해준은 서둘러 책상 위에 뿜은 커피를 닦아 냈다.

- 삼촌 또 사레 걸렸어?

“……아니, 이번엔 뜨거워서.”

- 조심하지.

“그러게.”

어느새 깨끗해진 책상을 내려다보며 해준은 길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굉장히 당황스럽고 화가 났지만 일단 지금은 감정을 다스리며 과부화된 머리를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그래, 알았어.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 어…….

“무슨 일 있었어?”

-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난 현규 형 취향은 아니니까.

빠르게 전환된 이야기에 해준은 인상을 쓴 채 앞에 놓인 텀블러를 바라봤다.

확실히 수현은 현규의 취향은 아니다. 현규가 사귀던 스타일은 대체로 베타 여성이었던 데다 동갑이나 연상의 도회적인 미인들이었다. 그 기준으로 보자면 수현이는 절대 현규의 연애 대상 범위에 안 들어간다.

그래서 현규가 수현이를 좋아했다는 게 의외이긴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취향과 사랑에 빠지는 건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였다.

취향은 경험과 기억, 학습에 의해 결정되는 조건 반사 같은 거지만, 사랑에 빠지는 건 본능이다.

그리고 그 본능은 예측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다.

“취향과 연애는 또 다른 문제야. 지금 현규가 너와 있고 널 걱정하고 아낀다는 게 중요한 것 같은데?”

사실 현규는 지금 너한테 돌아 있다, 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해준은 그 충동을 꾹 참았다.

그건 현규가 직접 말해야 한다.

그리고 얼결에 수현이의 고백도 듣게 됐지만 그것도 수현이 현규에게 직접 말해 줘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는데 본의 아니게 힌트를 남발하게 되었다.

현규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수현이 마음고생하는 건 또 싫으니까.

- 그건 아는데…… 형이 만나던 사람들은 다 예뻤으니까.

“그거야…….”

본인 외모가 워낙에 화려한 걸 알아서 일부러 자기 외모에 안 묻히는 사람들하고만 사귀었으니까, 라고 하려던 해준은 순간 말을 멈췄다.

“……너, 현규 애인 본 적 있어?”

나도 직접 본 적은 없고 소문만 들었는데, 라는 의문에 수현이 빠르게 답해 온다.

- 응.

“언제?”

- 나 미국 갔을 때 대학에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자 확 하니 뭔가 머리를 스쳤다.

“……크리스마스이브?”

- 응.

“……너, 설마 그날 그래서 그냥 돌아온 거야?”

- 응.

현규야, 너 큰일 났다, 라는 말이 해준의 입가를 맴돌았다.

그날 아침 일찍 나갔다 밤늦게 돌아온 수현에게 왜 그냥 돌아왔냐고 물었을 때 수현은 가다가 몸이 안 좋아져서 그랬다고만 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야 주영에게 주영이 아닌 현규가 대신 학교를 안내하기로 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현규가 불편해서 돌아온 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전말이 밝혀진 5년 전의 일에, 해준은 난감해했다.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워낙에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당시 현규와는 전혀 친하게 지내지 않아 그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같은 학교에 바로 옆집에 살던 주영은 아는 게 있겠지만 지금은 그걸 확인할 시간이 없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수현을 달래 주는 것밖에 없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그냥 옛이야기일 뿐이야. 벌써 5년 전 일인데 뭘 고민해? 지금은 너와 있잖아.”

- 응, 그렇기는 한데…….

“아니면, 신경 쓰는 이유가 따로 있어? 갑자기 아무 계기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을 거 아냐?”

- 아냐, 그냥 갑자기 그때 일이 생각나서. 되게 예쁜 사람이었거든. 형하고 너무 잘 어울리는 예쁜 사람이라서…….

살짝 기가 죽은 듯, 남의 시선 같은 건 전혀 신경 안 쓰고 살던 수현의 의기소침한 목소리에 해준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너도 예…… 아니, 귀여워. 옷만 잘 입으면. 내가 널 얼마나 곱고 예쁘게 키웠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수현의 외형은 좋은 편이었다. 아주 미인은 아니라도 깔끔하고 단아하다.

귀찮은 걸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녀석이 공대에 들어가 옷이라고는 트레이닝복과 체크 셔츠밖에 모르는 녀석들 사이에서 극도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찾았다는 게 문제일 뿐.

기본적으로 말끔하게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보고 있으면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수현아, 외모의 기본은 청결이야. 깨끗하면 돼. 그리고 넌 귀여우니까 상관없어.”

네가 비록 저 가족들이나 주변인들에 비해 미인은 아니지만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해준은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이미 수현의 자신감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 나, 삼촌이 보기에도 바퀴벌레 같아?

그간 늘 생각하긴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그 말에 해준은 뜨끔해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그래? 너한테 바퀴벌레라고? 현규가 그래?”

- 회사에서 우리 팀 사람들 보면 전부 바퀴벌레라고 해. 정장 군단 사이에서 시커멓게 입고 갑자기 아무 데서나 튀어나온다고.

특히 화장실에서, 라는 구체적인 설명에 해준은 차마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었다.

자신도 가끔 수현이와 만날 때 저 멀리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녀석이 서 있는 걸 보곤 놀랄 때가 있으니까.

그나마 수현은 워낙 무해한 인상이라 안 잡혀간 거지, 다른 사람이 그 차림으로 다녔으면 수시로 검문받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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