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160)

일단 너무 수상해 보인다.

“……후드티를 흰색으로 바꿔 보면 어떨까? 그리고 운동화도 좀 색이 있는 걸로 바꾸고. 바지도, 꼭 검은색 조거 팬츠가 아니어도 되잖아. 후드티에 맞춰서 바지 색도 통일하면 훨씬 보기 좋을 거야. 최소한 무당벌레는 되겠지. 아니, 내가 브랜드를 골라 줄게. 거기 쇼퍼한테 연락해 둘 테니 핏 맞는 옷으로 사. 너 늘 두 사이즈 크게 입는 거 알지?”

수현이 외모에 자신감을 잃은 건 너무나 가슴 아프지만 이 김에 수현을 그 바퀴벌레 룩에서 벗어나게만 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적당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며 해준은 바삐 명함첩을 뒤졌다.

여러 군데 돌거나 너무 많이 보면 질리고 귀찮아서 싫어할 테니 브랜드와 스타일을 지정해 줘야 한다.

“연락처 보내 줄 테니 이쪽으로 전화해. 내가 자세한 건 오더해 놓을게. 그리고, 이 김에 머리도 자를래?”

- 어…….

그건 좀 곤란하다는 듯 말을 끄는 기색에 다시 물었다.

“왜?”

- 형이 머리는 자르지 말라고 해서.

“……현규가?”

- 응.

“왜?”

-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살래.

순간 감이 왔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자신의 손을 탄 수현이는 많이 귀여웠다. 당시 친하지도 않았던 주영이 지금의 수현을 보고 가슴 아파할 정도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때 한창 자신이 옷을 좋아하던 시절이라 최선을 다해서 수현이를 끌고 다니면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히고, 귀여운 이마랑 고집스럽지만 예쁜 눈이 잘 보이도록 헤어 스타일까지 관리해 줬다.

그때 수현이는 곱고 귀하게 자란 부잣집 막내아들 그 자체였다.

그렇게 예쁘게 보이는 걸 경계하는 거다.

“현규는 신경 쓰지 마. 머리는 너무 길면 불편하니 잘라야지.”

- 그런가?

“응. 예쁘게 정리해. 그리고 옷도 예쁜 걸로 사고.”

- 알았어.

현규, 넌 오늘 나한테 좀 혼나야겠다.

곱게 키운 내 새끼 데려갔으면 닥치고 예쁘게 꾸며나 줄 것이지 애한테 바퀴벌레라는 소리나 하면 안 되지.

수현이는 아니라고 했지만 현규가 말한 게 아니라면 수현이 바퀴벌레 같다는 말에 신경 쓸 리가 없다.

그리고 사실 바퀴벌레 같기는 하니까.

“삼촌이 전부 얘기해 둘 테니 가서 머리부터 정리해. 그리고 혹시, 살 빠졌어?”

- 좀 빠지긴 했는데 사이즈 차이 날 정도는 아냐.

“그래. 그래도 앞으로 좀 찔 테니 넉넉한 사이즈로 말해 둘게.”

임신하면 아무래도 몸이 불 테니까, 라고 하려다 해준은 아차 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임신 가능성이 있으면 더 편한 옷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현규 때문에 일이 꼬였다.

그래서 현규가 그냥 하던 대로 하라고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반면, 그럼 자기가 더 살뜰히 챙겨 줘야지 애를 바퀴벌레로 두면 어쩌자는 거냐?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화가 나 해준은 서둘러 노트북을 켰다.

“그럼 지난번에 양복 맞출 때 사이즈로 픽스할게. 아, 그리고 이거 현규한테는 말하지 마.”

- 왜?

“예쁘게 하고 보여 줘야지.”

- 알았어.

“그래, 착하다. 그럼 아무 걱정 말고 이제 사무실로 돌아가.”

- 알았어. 삼촌도 일해.

“그래.”

그렇게 수현과의 통화를 끝낸 뒤 해준은 곧장 현규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그러곤 노트북 화면을 보며 기다리는데 두어 번의 신호음 뒤에 바로 신호음이 끊겼다.

현규도 갑자기 휴가를 냈으니 바빠서 통화 거부를 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익숙했다, 이 느낌은.

정확히 딱 두 번 울린 뒤 칼같이 뚝 하고 끊기는 이건 분명…….

“……이 자식, 또 착신 거부 걸었어…….”

* * *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옥상 위에서 통화를 마친 수현은 잠시 난간에 기대 하늘을 바라봤다.

공기는 적당히 건조하고 차가웠고 가을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마치 새파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하늘빛에 왼손을 쭉 뻗은 수현은 왼손 약지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응시했다.

“Marry Me.”

플래티넘 밴드 위에 심플한 다이아몬드가 하나 박혀 있는 반지는 너무 유명한 웨딩 밴드라 결혼 준비를 해 보거나, 그런 지인이 있으면 그 이름을 알 수밖에 없는 반지였다.

그래서 이 반지를 처음 봤을 때 당황했었다.

그리고 내심 기뻤던 것도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음…….”

이상하게 심란한 기분에 잠시 반짝거리는 반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삼촌인가 하며 서둘러 내용을 확인하자 역시나였다.

메시지 창에 전화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가득하다.

그 연락처를 일일이 저장한 뒤 막 옥상에서 빠져나와 계단으로 향하는데 또다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 왔다.

이번엔 윤 팀장님이다.

[이 대리, 설마 집에 간 거 아니지?]

본인이 쌓아 둔 일이 너무 많다는 자각은 있는지 자신이 오자마자 퇴근했을까 불안해하며 보낸 메시지에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며 답장을 보냈다.

[내려갑니다.]

간단히 문자를 보낸 뒤 빠르게 옥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금세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이 대리야, 우리 영원히 함께하자.]

영원히 뒤치다꺼리해 달라는 그 내용에 수현은 무심한 얼굴로 답 메시지를 보냈다.

[싫어요.]

* * *

[어쩌지? 점심을 같이 못 할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휴가의 여파는 상당했다.

이럴 걸 대비해 휴가 중에도 업무 지시는 잊지 않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쌓인 일이 어마어마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심하다.

아침 회의 이후 계속해서 그사이 생긴 트러블 처리에, 미뤄 놓은 해외 계약 건까지 몰려들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밀려 있는 미팅 건도 산더미다. 특히나 오늘 건은 도저히 더는 미룰 수 없는 미팅이라 회의실을 나오며 먼저 메시지를 보내자 곧 전화가 걸려왔다.

수현이다.

검은 화면 위에서 반짝이는 이름에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괜찮아. 회의 끝났어.”

- 많이 바쁜가 봐요?

“조금. 휴가 후니까. 너는?”

- 저도 조금요. 윤 팀장님이 사고를 많이 쳐 놓긴 했는데 늘 있는 사고라 거의 해결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네.”

- 네. 형은요?

“미팅이 조금 밀린 게 있어서 당분간은 외근이 많을 것 같아. 오늘도 점심 미팅이 있어.”

- 전 신경 쓰지 말고 일하세요. 저도 마침 볼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돼요.

“왜?”

- 그냥, 사적인 일요.

“사적인 일?”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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