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160)

생생하게 느껴지는 변화가 신기한 듯 수현이 중얼거리자 현규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중계 안 해도 돼.”

“그래도 가라앉아서 다행이에요. 저희 이제 내려가야 돼요.”

현규의 스케줄은 모르지만 수현의 경우 점심시간 안에 일을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현재 시각을 확인하려 현규의 등 너머로 한 번 더 시계를 본 수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은근슬쩍 현규의 어깨를 밀어 냈다.

“형은 점심 미팅이에요? 식사도 같이해요?”

“응.”

“그럼, 앞으로 점심은 자주 나가 드시는 거예요?”

“아마 그렇게 될 거야. 당분간은, 저녁도.”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간 식사는 따로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휴가도 휴가지만, 사실 그간 무리하게 일정을 조정했던 것도 사실이라 더는 시간을 뺄 수 없었다.

그러니 당분간은 아주 바빠질 거라고 현규가 솔직히 말하자 수현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점심은 윤 팀장님하고 먹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윤 팀장님하고?”

“네. 저랑 식성 비슷해서 원래 자주 같이 다녔어요. 맛집 개척하러 다니거든요, 둘이.”

“……그래, 혼자 먹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

솔직히 수현이 다른 남자와 단둘이 식사를 하는 건 조금도 내키지 않지만, 그 부분은 자신이 포기해야 한다.

어쨌든 회사에 다니는 이상 자신이 바쁠 때 같이 밥 먹을 사람은 있어야 하는데 그 상대로는 윤 팀장이 최적이다.

적당히 눈치 있고, 적당히 야망 있고, 적당히 욕심 있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니까.

“형, 이제 진짜 나가야 돼요.”

“잠깐만, 키스만 한 번 더.”

어리광을 부리며 다시 한번 입술을 겹친 현규는 이번엔 가볍게 키스를 남긴 뒤 입술을 뗐다.

“볼일 있어도 점심은 꼭 챙겨 먹어.”

“그건 걱정 마세요.”

“그리고 중간중간 연락하고. 어디에 있는지 보내 줘. 네 메시지에는 꼭 답장 보낼 테니까.”

“바쁘면 답장 안 하셔도 돼요.”

“꼭 답장할게.”

나도 화면을 안 보고 문자 치는 스킬 정도는 개발해 보겠다며 현규는 수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 나가자.”

이제 완전히 가라앉은 성기에 현규가 몸을 떼자 수현이 현규가 소파에 던져 둔 재킷을 챙겨 든다.

“옷 입고 나가요, 형.”

“응.”

걷어 올렸던 셔츠를 내리고 곧 재킷을 걸친 현규가 트렌치코트와 가방을 손에 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수현은 모처럼 순수하게 현규의 외형에 감탄했다.

원래도 눈에 띄는 화려한 외모에 깔끔하게 헤어 스타일을 정리하고, 정확히 핏이 들어맞는 양복을 걸친 현규는 근사해 보였다.

“형, 멋있어요.”

감탄과 선망이 섞인 높은 톤의 음성에 막 넥타이를 제대로 매던 현규가 멈칫한다.

그러곤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는다.

“너, 지금 나 못 가게 하려고 이러는 거지?”

“설마요. 형 멋있어요.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얼굴은 진짜 좋다고.”

“얼굴만?”

“네.”

인성은 최악, 이라며 수현이 짓궂게 웃는 얼굴에 현규는 막 수현의 뺨을 쥐려다 멈췄다.

대신 수현의 이마를 툭 내리쳤다.

“자꾸 까불어. 아주 건방져졌어, 이수현.”

귀여우니 봐준다고 툭 하니 이마에 손가락을 튕긴 현규가 문으로 다가서자 수현이 바로 그 뒤를 따르며 현규의 팔을 살짝 끌어안는다.

바로 옆에서 닿아 오는 체온에 현규는 녹아들어 갈 것 같은 시선으로 수현을 돌아봤다.

지나치게 뜨겁고 달콤해 몸을 근질거리게 하는, 부담스러운 그 눈빛에 수현은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형, 그렇게 보지 마세요.”

“……왜?”

“설레서요.”

짤막한 그 답에 막 문을 들어 열려던 현규가 멈칫하며 수현을 내려다보며 웃는다.

“빨리 더 설레.”

“싫어요.”

“왜?”

“심장에 안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카페인 중독인데 오래 살고 싶다고 수현이 웃자 현규가 거친 손길로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사실 세게 끌어안아 주고 싶었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 없어, 결국 문을 열고는 그대로 복도로 나섰다.

막 점심시간에 들어선 복도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두 사람 다 전혀 개의치 않으며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커플처럼.

* * *

익숙함과 안락함은 인간에게 망각을 선물한다.

미용실에 도착해 드디어 머리를 정리하던 중 차곡차곡 자신의 뒤에서 쌓여 가는 옷들을 보며, 수현은 그 사실을 실감했다.

지난 1년간 가족들의 잔소리와 간섭에서 벗어나 오롯한 자신만의 공간에서 너무나 편하고 자유롭게 살아 잠시 잊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얼마나 극성인지.

그중 특히 삼촌이.

“저, 그거 다 못 들고 가는데요…….”

회사로 돌아가야 해서, 라며 세포분열을 하듯 2의 배수로 늘어나는 옷들을, 수현은 기가 질린 듯 바라봤다.

노골적으로 질색하는 수현의 기색에 옷들을 하나씩 소개하던 쇼퍼가 자본주의 미소를 띤 채 수현을 달랜다.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시면 원하는 시간대에 맞춰 배송해 드립니다. 당장 필요하신 옷은 입고 가셔도 되고요. 윤 팀장님께서 만약 고객님께서 옷을 못 고르시면 그냥 다 배송하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굳이 안 골라도 된다며, 쇼퍼는 화사한 미소를 띤 채 눈에 확 띄는 진한 남색의 재킷과 그 위에 걸친 체크무늬 숄을 자랑스럽게 들어 올렸다.

딱 삼촌의 취향이었다. 차분한 색감의 아우터에 화려한 무늬가 있는 소품으로 포인트를 준.

하지만 수현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저 옷을 입고 다니면 저 옷이 날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들 거라고, 수현은 장담할 수 있었다.

완벽한 주객전도다.

보통은 삼촌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난한 캐주얼 스타일이나 단정한 프레피 룩으로 옷을 고르는데 이건 좀 아니다.

오랜만에 옷을 고르느라 삼촌이 너무 흥분한 것 같다.

저건 입고 출근도 못 한다.

그런 수현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서둘러 그 옷을 내려 둔 쇼퍼가 이번엔 오버 사이즈의 니트 카디건을 들어 올린다.

이 정도면 무난하지 않냐는 얼굴로.

하지만 어떻게 봐도 그건 더 안 좋은 초이스였다.

“그건 잠옷…….”

……같다고 하려다 수현이 말을 멈추자, 뒤에서 머리를 정리해 주던 민성이 웃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막상 입으면 또 다를걸. 의외로 저런 옷이 안 튈 때도 있어.”

“아니. 저건 절대 튀어.”

저 눈에 띄는 오렌지 색감 위에 대형 브랜드 로고가 여기저기 박힌 옷이 안 튈 거라니 말도 안 된다.

저 정도면 자기 과시를 넘어서 자아도취적이다.

“난 얌전하고 눈에 안 띄는 평범한 옷이 좋아.”

“진짜 눈에 띄기 싫으면 현상 수배범 룩을 입지 말았어야지.”

저 카디건보다 네 옷이 백 배는 더 튄다며 민성은 수현의 앞머리를 세게 당겨 뒤로 넘겼다.

그러곤 계속해서 머리를 세팅하며 잔소리를 늘어놨다.

“집이 회사랑 가깝기에 망정이지, 네가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다면 일주일에 한 번은 신고당했을걸. 그리고 그러고 다니면 운전자들도 욕해. 너도 운전하면 알지? 특히 겨울에.”

시커멓게 하고 고개 숙이고 다니면 가로등 없는 길에서는 무섭다는 민성의 타박에 수현은 재빨리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본인도 할 말이 없는지 묵비권을 행사하는 모습에 귀엽다는 듯 웃던 민성은 빠르게 머리 손질을 마치곤 손을 뗐다.

“머리 넘기면 이렇게 예쁜데 왜 가리고 다녔어? 자르지도 않고. 머리카락이 눈 찌르면 시력에도 안 좋아.”

“그동안 바빴어.”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1시간 정도는 시간 내야지. 넌 무조건 내가 직접 10분 안에 잘라 줄 테니 예약만 하고 와.”

해준의 고등학교 친구라, 어린 시절부터 수현을 봐 온 민성은 수현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수현이 가장 질색하는 게 거울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최대한 빨리 커트해 주겠다고 절충안을 제시했지만 수현은 여전히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시간 되면…….”

그건 안 온다는 뜻이었다.

“시간 안 돼도, 시간 내서 와.”

“보고…….”

“수현아.”

딱 해준이 수현을 혼낼 때 부르는 것과 같은 어조의 호명에, 수현은 조건반사처럼 다른 딜을 제시했다.

“……두 달에 한 번…….”

“그래, 그럼 두 달에 한 번. 대신 꼭 예약하고 와. 나도 나와 있어야 하니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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