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에 한 번 정도면 괜찮은 빈도라 그렇게 타협한 뒤 수현은 거울로 머리를 확인했다.
덥수룩하던 머리를 깔끔하게 잘라 뒤로 넘겨 고정하자, 확실히 인상이 다르다.
깔끔하다. 그리고 좀 똑똑해 보였다.
이래서 삼촌이 머리 자르라고 했구나, 라고 수현은 새삼 미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삼촌, 고마워.”
“그래.”
제일 싫어하는 미용이 끝나 홀가분해진 기분에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뒤에 서 있던 쇼퍼가 수줍은 손길로 세미 정장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이제 머리 다 하셨으니 그 헤어 스타일에 어울리는 이 옷은 어떠십니까, 라고 말하고 있었다, 쇼퍼가.
입이 아니라 얼굴로.
이번엔 그나마 무난한 회색 정장이라 수현은 드디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오늘 딱 필요한 스타일이었다.
* * *
“잘 어울리네. 해준이가 좋아하겠다. 진작에 좀 그러고 다니지 그랬어?”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순간부터 터지는 카메라 세례에 수현은 다 포기한 듯 마음껏 찍으라고 자세까지 잡아 줬다.
어릴 때부터 옷만 갈아입으면 사진 찍어 대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 귀찮을 뿐.
“우리 수현이 진짜 다 컸네. 정장도 다 입고. 너 유치원 원복 입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계속해서 찰칵거리며 사진을 찍던 민성은 겨우 마음에 드는 컷이 나왔는지 드디어 플래시를 멈추곤 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보정을 시작한 듯했다.
그 덕에 수현도 드디어 자유의 몸이 돼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갈아입은 옷들을 쇼핑백에 넣어 쇼퍼에게 함께 집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데 민성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진짜 무슨 바람이야? 내가 그렇게 머리 좀 정리하러 오라고 해도 안 오더니. 쇼핑까지 하고. 뭔데? 데이트? 맞선?”
“어…… 뭐…….”
뭔가 있는 듯 마는 듯 아리송한 그 답에 인상을 쓴 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민성이 고개를 들어 수현을 바라본다.
의아함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뭐야? 진짜, 뭐 있는 거야? 미팅? 데이트?”
“그냥…… 이제 연애 좀 해 보려고.”
계산은 어차피 아버지 카드로 할 거라 영수증만 챙겨 주머니에 넣던 수현이 무심히 흘린 말에 민성은 놀라 눈을 껌뻑였다.
지금 내가 들은 단어가 그 단어가 맞나, 하는 얼굴이었다.
“……연애?”
“응.”
“네가?”
“응.”
고개까지 끄덕하며 바로 내가 연애를 할 생각이라고 수현이 답한 순간 민성은 저도 모르게 괴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이수현이 연애를 한다고?”
“응.”
“뭐야? 누구야? 나이는? 알파야? 아니, 직업은? 해준이는 봤어? 잘생겼어? 어디서 만났어?”
마치 랩을 하듯 속사포처럼 날아드는 질문들에 수현은 재빨리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민성을 진정시켰다.
“잠깐만, 삼촌. 진정해.”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대체 누군데? 언제부터 사귄 건데?”
마치 화를 내는 듯 높아진 민성의 음성에 수현은 일단 차분하게 생각나는 대로 답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그럼?”
“이제부터 꼬시려고.”
그래서 머리 하러 왔다는 수현의 답에 민성은 기함했다.
이번 건 진짜 놀랐다.
“꼬신다고? 네가?”
“응.”
“대박……. 난 너 평생 연애 못 하다 대충 집안 맞는 알파랑 결혼해서 개나 키우면서 살 줄 알았는데.”
지나치게 구체적인 민성의 상상에 수현은 잠깐 뭔가를 생각하듯 눈동자를 굴리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다르진 않아…….”
평생 연애 못 한 건 사실이고 얼결에 집안 맞는 알파랑 결혼한 것도 맞다. 아직 개는 안 키우지만.
“그래서, 상대는 누군데? 직장 동료? 아니면 친구? 아니, 소개?”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질문 공세에 수현은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하곤 뒤로 물러섰다.
“삼촌, 나 그만 가 봐야 돼. 또 들를 데 있어.”
민성과 대화하느라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상황이라 수현이 서둘러 나가려 하자 민성이 아차 한 듯 수현의 등을 떠민다.
“그래, 어서 가. 가서 연애해. 여기서 시간 낭비하면 안 되지.”
“응. 열심히 할게.”
“잘되면 꼭 나한테 보고해. 머리 예쁘게 해 줬으니까.”
“응.”
많이 컸네, 이수현, 이라고 연신 수현의 어깨를 두드리던 민성은 문 앞에서 주먹을 세게 쥐어 보였다.
“화이팅! 꼭 성공해.”
“응.”
손을 흔들며 진짜 조카를 배웅하듯 인사를 마친 민성은 수현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확인한 뒤 곧장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곤 해준에게 수현의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수현이가 드디어 연애를 한다네? 축하한다, 엄마.]
식사 중 날아온 메시지를 본 해준은 가만히 휴대폰 화면을 응시했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왜 그래, 삼촌?”
“…….”
“삼촌 표정 보니 수현이 일인데? 걔 또 사고 쳤대?”
구내식당에서, 바로 앞에 앉은 지수가 질색하는 얼굴에 해준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삼촌 표정이 딱 수현이가 심란한 짓 했을 때 표정인데.”
수현이가 심란한 짓을 한 건 맞는데 메시지를 보낸 건 수현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민성이 헛소리를 할 녀석은 아니기에, 수현이 무슨 심란한 짓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식사해.”
반쯤 남은 식판을 들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해준이 지수에게 인사를 하자, 지수가 고개를 들어 불만 가득한 눈빛을 보낸다.
“수현이한테 전화하러 가지?”
“아냐.”
“그럼.”
“민성이.”
“민성 삼촌이랑 수현이랑 둘이 사고 쳤구나?”
완전히 틀렸지만 또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라, 해준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빠져나가 식판을 반납했다. 그러곤 곧장 민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이건 무슨 소리야? 수현이가 연애를 하다니?”
- 응? 너 몰랐어?
“전혀.”
지금 처음 듣는다는 답에 민성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 수현이가 너한테 얘기를 안 했다고?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해준에게 그날 급식 반찬까지 다 보고하던 수현이가, 라는 경악의 의미였다.
그건 해준도 이해했다.
지금 해준도 경악과 공포를 느끼고 있으니까.
“수현이가 직접 말했어? 연애한다고?”
- 어? 어…… 정확히는 연애할 예정이라고 했지. 머리 예쁘게 하고 멋있는 옷 입고 꼬시러 간다던데?
그러니까 대체 누구를, 이라고 하려다 해준은 입을 다물었다.
누군지는 뻔했다.
그래서 절망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 죽고 의기소침해진 건 가슴 아프지만, 그걸 계기로 다양한 스타일에 도전해보는 건 무척 건설적이고 진취적인 시도였다.
그래, 본인의 약점을 장점으로 발전시키려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마인드는 좋다.
사실, 애를 너무 곱게 키워 걱정스러운 면도 있었는데 수현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그건 매우 기뻐해야 할 일이긴 한데…….
“하아…….”
왜 하필 그 훌륭한 마인드를 현규에게만 쓰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