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60)

갑자기 대낮부터 소주 생각이 나 해준이 길게 한숨을 내뱉자 민성의 의아한 듯 묻는다.

- 왜? 무슨 일 있어?

“아냐……. 그냥 속이 좀 답답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속이 터질 것 같다.

수현아, 꼬실 필요도 없이 이미 현규가 널 더 많이 좋아해…….

그 녀석은 지금도 위험할 정도로 널 좋아하는데 거기서 네가 더 빠지게 하면 어디까지 갈지 모른단다.

“미치겠네…….”

이걸 수현이에게 직접 말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두고 보자니 괜히 복장이 터질 것 같아 해준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자, 민성이 놀라 묻는다.

- 네가 왜 미…… 어? 혹시, 수현이가 좋아하는 놈이 좀 이상한 놈이야?

직업이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직이다 보니 눈치 하나는 귀신 같다.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많이 이상하긴 한데…….”

- 뭐야? 그걸 네가 그냥 뒀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 왜?

“이미 결혼했거든.”

- 응?

“수현이가 꼬시려는 상대가 자기 파트너라고.”

- 파트너?

“응.”

- ……수현이가 지금 파트너를 꼬신다는 거야?

“응.”

- ……왜?

“묻지 마. 복잡해.”

말하기도 피곤하고 속 쓰린다는 반응에 이번에는 민성이 잠시 침묵하다 묻는다.

- 그럼, 혹시 정략이었어? 그래서, 살다 보니 눈 맞아서 꼬시고 싶다고 뭐 그런 거야?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정략이었으면 차라리 낫지.”

내가 골랐을 테니까.

“그럼 뭐야? 아니, 그 전에 결혼은 언제 했는데? 난 금시초문인데?”

“갑자기 자기들 마음대로 즉흥적으로 한 거야. 우리도 나중에 혼인 신고서로 통보받았어.”

- 혼인 신고서로 통보? 수현이가? 와, 대박.

“대박은 대박이지. 그거 다 얘기하려면 3박4일은 잡아야 되니 나중에 날 잡아서 얘기해 줄게.”

- 뭐가 그렇게 복잡해? 수현이가 그렇게 복잡한 애가 아닌데?

“수현이가 아니라 수현이 파트너가 복잡해.”

- 누군데?

“있어, 복잡하고 이상한 놈.”

- 그 복잡하고 이상한 놈한테 수현이를 맡겨도 되는 거야?

“어쩌겠어? 수현이 뺏으면 물려 죽게 생겼는데. 수현이한테는 잘하니 그냥 두고 보는 거지.”

- 그럼 그쪽도 수현이 좋아하는 거네?

“그쪽이 더 많이 좋아해.”

- 잘됐네, 그럼. 서로 좋아하는…….

거기까지 말하던 민성은 그제야 이 상황의 문제점을 인식한 듯 말을 멈췄다, 이었다.

- 그런데, 수현이는 상대를 왜 꼬시려는 건데?

“그러니까, 내 속이 터진다고…….”

강현규가 이수현을 미치게 좋아한다는 건 지금쯤이면 그 회사 사람들뿐 아니라 그 주변 상가 상인들도 다 알 거다.

눈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다.

수현을 바라보는 현규의 눈빛이 아우성을 치고 있으니까.

난 얘가 예뻐서 미치겠다고.

자신처럼 천성적으로 타고난 눈빛이 다정해 오해를 사는 게 아니다.

현규의 눈빛은 디폴트값이 ‘한심함’과 ‘귀찮음’이었다. 그리고 가끔 거기서 ‘경멸’과 ‘혐오’가 더해져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가끔 인간혐오증인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을 하찮게 바라보는 녀석이 수현을 바라볼 때만은 눈이 반짝반짝 빛나 모를 수가 없었다.

문제는 정작 본인인 수현이 그걸 모른다는 사실일 뿐.

자존감이 하도 낮아 현규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못 믿는다는 가슴 아픈 사연도 아니라, 그냥 모르는 거다.

애가 둔해도 너무 둔해 환장하겠다.

이렇게 현규 좋은 일만 시켜 줄 수는 없는데…….

순간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가는 얄팍한 꾀에 서둘러 민성에게 물었다.

“최민성, 너 수현이 사진 많이 찍었어?”

- 네가 찍으라고 해서 잔뜩 찍긴 했어. 왜? 아예 사진으로 현상해 줘?

“아니, 내가 메시지로 번호 하나 보낼 테니 거기로 전송해. 그리고 그쪽한테 내 친구인데 내 번호 착신 거부해서 대신 보내 주는 거라고 해.”

- ……혹시 파트너?

“응.”

- ……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진진하네. 보정 빡세게 해서 제일 예쁜 걸로 발송할게.

굳이 설명 안 해도 대충 눈치로 상황 알아먹는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건 아주 편안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대화가 빠르게 이어지니 너무 좋다.

“그럼, 내가 지금 번호 남길게.”

- 오케이. 그럼 나도 보정 시작할게.

내가 미용만큼 잘하는 게 사진 보정이라 연예인 SNS용 사진도 다 손봐 준다며 민성은 신이 나 전화를 끊었다.

답답했던 속이 그나마 시원해지는 기분으로 통화를 마무리한 해준은 현규의 번호를 찾아 민성에게 발송하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드디어 애 다 키워 결혼까지 시켜 손 놓나 했는데,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육아에는 끝이 없다.

* * *

“아이스 아메리카노 디카페인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볼일을 다 마친 뒤 편의점에서 급히 식사를 때우고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근무까지 정확히 10분 남은 시각이었다.

딱 커피 한 잔 살 시간이 남아 현규의 말대로 디카페인 커피를 사 들고 사무실로 올라가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윤 팀장님이었다. 오전에 일 떠넘긴 게 미안했는지 만둣국 사 준다는 걸 거절했더니 혼자 먹고 온 모양이다.

“팀장님, 점심 잘 드셨어요?”

“응? 당연히 잘 먹…….”

수현의 인사에 휴대폰을 보고 있던 윤 팀장이 반사적으로 답을 하며 뒤를 돌아보다 뒤에 선 수현을 보곤 멈칫한다.

그러곤 눈동자만 움직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수현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본인이 직접 본 걸 믿지 못하는 듯한 그 표정에 수현이 “왜요?”라고 묻듯 그를 바라보자, 다시 한번 시선을 내려 수현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확인한 그가 묻는다.

“……이 대리?”

“네.”

“……진짜, 이 대리 맞아?”

“네.”

그럼 내가 누구겠냐고, 어이없어하는 눈빛으로 윤 팀장을 바라본 수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나 태연하고 익숙한 그 움직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수현을 훑어본 윤 팀장은 이내 뒤에 선 이가 수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이 대리?”

“팀장님이야 늘 잘못하고 있죠. 뭘 새삼요.”

“그래서, 이직할 거야?”

갑자기 나온 이직 이야기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직 이야기에는 솔깃한 눈치였다.

“제가 이직을 왜 해요? 바로 옆에 오피스텔 있는 회사 드문데.”

이직하면 집도 옮겨야 하는데 내가 뭐 하러 그 귀찮은 짓을 또 하겠냐는 수현의 답에도 윤 팀장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얼굴로 수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런데, 왜 이래?”

“왜요?”

“아니, 이상하잖아. 이 대리, 면접 볼 때 아니면 절대 정장 안 입잖아. 내가 하다못해 셔츠나, 니트라도 입어 달라고 애걸을 해도 매일 후드티만 입고 다녔으면서 갑자기 웬 정장이냐고?”

포멀한 복장은 아니지만 실키한 재질의 티셔츠와 진한 회색의 각이 진 오버 사이즈 재킷, 그리고 같은 라인의 팬츠와 브랜드 로고가 박힌 하얀 스니커즈.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한 면접 복장이었다.

심지어 신상이다. 그것도 급하게 구매한.

수현의 옷장을 직접 봤기에 그렇게 장담할 수 있었다.

수현의 옷장에는 흰 반소매 티와 검은 후드티와 검은 조거팬츠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때 스티브 잡스 팬이냐고 물었던 것도 기억한다.

“이 대리야, 불만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해 줘. 이직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지. 아니, 물론 이 대리는 이직 안 해도 되겠지만…….”

“이직 안 한다니까요.”

현규 형도 있고 조금만 가면 근처에 노포 맛집도 많고, 삼촌 회사랑도 가까워서 좋은데 내가 왜 이직하냐며 수현이 커피를 마시는 사이 지하에서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완전히 열리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수현이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하는데, 윤 팀장이 애가 타는 얼굴로 바로 수현의 옆으로 달라붙어 징징댄다.

“그럼, 갑자기 왜 이래?”

계속해서 보채는 윤 팀장의 물음에 막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던 수현은 무심히 답했다.

“사람 좀 꼬시려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