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60)

설명은 나름 그럴듯했지만 불행히도 옆에서 윤 팀장님이 불러 주고 있는 게 다 들렸다.

역시나 수현은 거짓말을 못한다.

막말은 하지만.

“그럼 인터넷으로 보면 되잖아?”

- 그냥…… 실물이, 보고 싶어서요.

“장비들 실물은 봐서 뭐 하게?”

- ……그러게요?

잘 버텼지만, 결국 막판에는 수현의 본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래, 이게 이수현이다.

“지금 출발하면 15분 정도 걸릴 거야. 내가 사무실로 올라갈까? 아니, 그냥 1층에서 잠깐 볼까?”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보고야 말겠다는 현규의 선언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 틈으로 빠르게 빠져나간 현규가 본인의 차로 다가가는 사이, 수화부 너머에서 윤 팀장과 은밀하게 속닥거리던 수현이 잠시 후 너무나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 형… … 죄송한데, 저 지금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갑자기?”

- 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이따, 아주 이따가 봬요. 그래도 어쨌든 오늘 꼭 봐요, 형.

그야 같은 집에 사니 당연히 오늘 보긴 보겠지만…….

“잠깐, 수현아?”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뚝 하니 전화가 끊겼다.

마침 본인의 차 앞에 도착해 운전석의 문을 열려던 현규는 망연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연이은 푸대접이 놀랍고 신선한 반면, 이 자식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진이 오늘 사진이라면 그 귀엽고 예쁜 상태로 무슨 수작을 부리긴 부린다는 건데…….

“이 망할 자식이…….”

네가 아무리 예뻐도 나한테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지.

그러고 뭘 하려고?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에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현규는 일단 수현을 잡으러 가기 위해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서둘러 차에 올라타려는데 뒤에서 다가선 직원이 다급히 그를 잡는다.

“팀장님,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아뇨. 지금 보셔야 합니다.”

현규의 거절에도 직원이 휴대폰을 내밀자 어쩔 수 없이 받아 든 현규는 그 안에 내용을 보곤 잇새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야?”

* * *

“강 팀장 지금 들어온대?”

서버실 안에서 쭈구려 앉아 있던 강 팀장의 물음에 그의 앞에 쭈구려 앉아 막 통화를 마친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네. 지금 들어온대요.”

15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고 하자 윤 팀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럼, 가자.”

“어딜요?”

“어디겠어? 나간다고 했으면 나가는 척이라도 해야지.”

“진짜 가시게요?”

“내 친구가 하는 장비 업체 있어. 거기로 가. 어차피 한번 돌아볼 생각이었으니까.”

“게임용 컴 맞추시게요?”

“응.”

그걸 근무 시간에 보러 가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할 일도 다 마무리했고 시스템개발팀은 장비 보러 다니는 것도 일이니까, 라고 수현은 납득했다.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오히려 이 상황이었다.

“그런데, 꼭 피해야 돼요?”

죄지은 것도 아니고, 나도 현규 형 보고 싶은데 왜 피해야 하냐고 수현이 되묻자 윤 팀장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강 팀장한테 보여 주려고 일부러 꾸민 거라며? 그럼 꽃도 사고 반지도 사 들고 짠 하고 나타나야지. 지금 보면 약발이 떨어지잖아.”

“그때 보나 지금 보나 어차피 볼 거잖아요.”

지나치게 순진한 수현의 발상에 윤 팀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이 대리, 연애 안 해본 티가 여기서 나네. 연애는 타이밍이야.”

“팀장님도 연애 안 해 보셨잖아요.”

“무슨 소리야? 나 연애 많이 했어.”

“제가 팀장님하고 4년 넘게 일했지만, 팀장님이 연애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요?”

밥도 같이 먹고 일도 같이하고 거의 종일 붙어 있었는데, 라는 수현의 합리적인 의혹에 윤 팀장이 이를 꾹 악문다.

“이 대리, 자꾸 인신공격할래?”

조금 상처받은 듯한 그 말투에 수현은 금세 알아챘다.

연애 못 해 봤구나, 하고.

그래서 더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형들도 애인한테 차인 얘기만 하면 눈 까뒤집고 화내니까.

“……저도 오랜만에 장비들 좀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차 키는요?”

“아, 맞다. 차 키…… 사무실에서 가방이랑 차 키 가져올 테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려.”

먼저 내려가지 말라고 당부한 뒤 후다닥 서버실을 나선 윤 팀장은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곧 그를 따라 서버실을 나온 수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그사이 휴대폰에 검색해 놓은 내용들을 다시 확인한 수현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왼손 약지를 들여다봤다.

평균 남자들의 반지 사이즈는 16호에서 20호 사이고 자신의 반지 사이즈는 17호였다.

그건 숍에서 직접 확인했다.

하지만 현규 형의 사이즈는 모르겠다.

윤 팀장님과 현규 형 손 크기가 언뜻 보기엔 비슷해 보였는데, 막상 손을 맞대어 보니 윤 팀장님이 훨씬 작았다.

“나보다 이만큼 크니까…….”

이렇게 깍지를 끼면 여기까지 내려오고, 손등에서 포개면 완전히 손이 덮이니까…….

그 순간의 느낌을 떠올리자 괜히 조금 민망해지면서도 자연스럽게 입매가 풀렸다.

앞에서 하면 형 얼굴이 보여서 좋지만 뒤에서 하는 건 안정감이 있어서, 또 좋았다.

특히 등 뒤에서 전신을 내리누르는 그 무게감이 너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원래 좁은 공간에 처박혀 있거나 구석에 눌려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인지 완전히 형에게 안겨 있으면 정신적으로도 편안하고 행복했던 것 같다.

왼손을 들어 그 위에 현규의 손이 덮였을 때를 떠올리던 수현은 그 순간 결론을 내렸다.

“19호.”

나보다 많이 크지만 손가락이 길고 예쁘니까, 아마 19호가 맞을 거다.

그렇게 임의로 남의 반지 사이즈를 결정한 수현은 반지를 주문한 직원에게 메시지를 적었다.

[19호로…….]

“22호.”

어느새 등 뒤로 다가선 윤 팀장의 정정에 수현은 본인 손을 내려다보곤 다시 윤 팀장의 손을 바라봤다.

“팀장님이 20호라면서요?”

“그러니까 22호지, 강 팀장은.”

“형 손가락 가늘고 예쁜데요.”

“예쁜 것과는 별개로, 강 팀장 손이 나보다 큰데 19호가 말이 되냐?”

“팀장님 손가락은 소시지잖아요.”

형 손은 섬섬옥수고, 라는 수현의 말에 윤 팀장은 굉장히 무례한 말을 들은 기분이었지만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했다.

본인 손이 남자 손치고는 살집이 조금 있는 편이라 아기 손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해, 그냥 참아 준 거다.

“이 대리야, 생각이라는 걸 해 봐라. 아무리 손가락이 가늘어 보여도 손 자체가 커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 레귤러 사이즈 컵이 강 팀장 손에 들어가면 자판기 종이컵처럼 보이는데 그게 19호겠냐?”

몸이 3X라지인데 손이 미디엄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 윤 팀장은 답답해했지만 수현은 윤 팀장의 의견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가는데…….”

내 손가락이랑 별 차이 안 나 보였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수현은 본인이 극단적으로 눈썰미가 없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윤 팀장은 속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내 말 들어. 22호나 23호일 거야. 내 친구 중에 농구 선수가 있는데 걔가 22호야.”

농구공을 한 손으로 잡는다는 그 말에 수현이 순간 뭔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

“아! 맞아요! 형은 제 머리통을 한 손에 쥐어요.”

그럼 비슷하겠다고 드디어 납득한 수현을 보며 윤 팀장은 무슨 짓을 했길래 강 팀장이 이 대리 머리통을 쥔 거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지금 그도 수현의 머리통으로 드리블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파트너 반지 사이즈를 몰라? 커플링 같이 고른 거 아냐?”

비록 눈썰미는 없지만 기억력은 좋은 이 대리가 왜 그걸 기억 못 하냐고 타박하자, 수현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에요. 반지는 형이 사 와서 전 형 사이즈는 몰라요.”

“아, 프러포즈 링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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