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160)

“……그랬죠…… 일단. 처음에는…….”

그러고 보니 처음 이 반지는 형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거였다.

사귄 지 좀 됐다고 해야 했기에 우리 커플링도 했어요, 라는 과시, 혹은 이미 커플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

딱 그런 의미였다.

그러니까 시작은 커플링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정신 차려 보니 웨딩 밴드가 되어 있었다.

사실 반지는 그래 봐야 반지고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든 중요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좀 중요해졌다.

“그런데, 강 팀장은 이 대리 반지 사이즈를 어떻게 알았대?”

“……네?”

“같이 반지 산 적 있으니까 안 거 아냐? 남자들 보통 자기 반지 사이즈도 잘 모르거든.”

연애 경험 없는 윤 팀장의 굉장히 합리적이고 나름 논리적인 의문에 역시나 연애 경험이 전무한 수현은 완벽하게 동의했다.

사실 자신이 17호라는 것도, 오늘 숍에서 확인한 거였다.

커플링은 맞추기 전까지 남자들은 보통 자기 사이즈를 모른다. 반지보다는 시계를 선호하니까.

“형은 연애 경험이 많으니까 대충 눈짐작으로 안 거 아닐까요? 아니면 그냥 가장 많이 나가는 사이즈를 주문한 거거나.”

반지를 준 날 급하게 친구한테 부탁해 평균 사이즈를 매장에서 가져왔다고 했으니까 대충 그렇지 않을까 했지만, 이번엔 윤 팀장이 그 의견에 동의하지 못했다.

“강 팀장 성격에 정확한 사이즈가 아니면 아예 반지를 안 샀을 것 같은데? 프러포즈하는데 막상 반지가 안 맞으면 서로 민망하잖아. 강 팀장은 그런 거 못 참을 텐데?”

그거야 그때는 사이즈고 뭐고 가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라고 하려다 수현은 말을 멈췄다.

아직 팀장님은 자세한 사정은 모르니까.

하지만 좀 이상하긴 했다. 윤 팀장님의 말대로 현규 형 성격에 정확히 맞지 않는 걸 가져올 리가 없다. 아마, 형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대한민국 남성 기본 사이즈인 16호부터 20호까지의 반지를 모조리 사 왔을 거다. 그중 하나만 맞으면 되니까.

하지만 형이 그날 차 안에서 내민 건 하나였다.

마치 미리 준비해 뒀다는 듯. 그 반지가 자신의 손가락에 안 맞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신기하긴 하네요…….”

“그렇지?”

“네. 그런데…… 뭐, 형은 저보다는 눈썰미가 있으니까요.”

“그건 맞네.”

이 대리보다 눈썰미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 라고 윤 팀장이 답한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 올라타 지하 3층 버튼을 누르는 윤 팀장을 보며 수현은 이번엔 진짜 마음을 정한 듯 메시지를 보냈다.

[22호로 주문해 주세요.]

* * *

회사로 돌아오는 내내 두 번 울렸다 끊기는 신호음에 현규의 인내심은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문제의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물론, 해준 형의 개인 휴대폰은 여전히 착신 거부 상태였다. 사무실 역시 비운 채라 회사로도 연결이 안 되고 있다.

“젠장…….”

일단 이지수에게 해준 형 나타나면 즉시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 놓긴 했지만 아직도 연락이 없다.

잠깐 경기도 쪽 현장에 나갔다고 했으니 곧 돌아오긴 하겠지만 그래도 초조함에 핸들을 손끝으로 두드리는 사이 벨이 울려왔다.

그 소리에 재빨리 화면을 확인하자 화면 위에 유독 번쩍이는 글자가 보였다.

볼드모트

또다.

질리지도 않는다, 이 자식도.

생각 같아서는 아예 착신 거부를 하고 싶지만 수현의 신분이 너무 많이 노출돼 있어 그것도 할 수 없다.

아예 연락이 안 되면 회사로 들이닥칠 수도 있는 녀석이라 일단 연락을 끊지는 않고 거부 메시지를 보냈다.

[회의 중입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라고.

“……망할 이지수.”

너 진짜 이번엔 가만 안 둔다고 이를 갈며 다시 해준 형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문자가 도착했다.

[최민성, 헤어 스타일리스트.]

“스타일리스트…….”

직업을 보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수현이 머리를 잘라 준 거다.

괜히 수현이한테 미리 안 물어보길 잘했다. 내가 사진을 하나 받았는데 머리 잘랐냐, 왜 잘랐냐 물어볼 것도 없이 얼굴을 보면 수현이 먼저 알아서 머리를 자르고 옷을 샀다고 다 말할 거라 안 물어본 건데, 좋은 선택이었다.

그냥 이 사람은 머리를 잘라 준 것뿐이다. 하지만 옷은 해준 형이 고른 거다.

어떻게 봐도 해준 형의 스타일이다.

사실 제일 거슬린 게 그 부분이었다.

인수인계까지 마친 뒤에 남의 것에 손을 대는 건 매너가 아니다.

물론 이젠 두 사람의 사이에는 가족애만 있을 뿐 그 외의 어떤 감정도 없으며, 단순히 해준 형이 수현의 옷을 못 봐준 것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너무 잘 이해하지만…….

그래도 불쾌한 건 불쾌한 거다.

그러니까 너무 취향이라 기분 나쁘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하는 애가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의 옷을 예쁘게 갖춰 입은 걸 보는 건 기분 좋지만……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게 그냥 기분 나쁘다.

내가 사서 입혀 주고 싶었는데 선수를 빼앗긴 듯한 패배감과 함께 해준 형과 묘하게 옷 취향이 겹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각자 입는 스타일은 전혀 다른데 수현에게 입히고 싶은 건 비슷하다.

“그게 기분 나쁘다고…….”

일단 발신자의 신원은 확인된 상태라, 메시지 하단에 남은 그의 숍 연락처로 직접 전화하려는데 또다시 벨이 울려왔다.

또 백해경이냐, 해서 화면을 확인하는데 이번엔 이지수다.

“응.”

- 삼촌 들어왔어.

방금, 이라고 작게 속삭이는 걸로 봐서는 해준 형 사무실 근처인 모양이었다.

“그럼, 바꿔.”

- 왜? 직접 전화하지?

“착신 거부 걸렸어.”

막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그렇게 답하자 지수가 빽 하니 소리를 내지른다.

- 삼촌이?

“응.”

- 야, 너 무슨…….

흥분해 목소리까지 뒤집으며 묻던 지수가 순간 아차 한 듯 목소리를 줄였다. 그리고 그 뒤로 바로 “죄송합니다.”라고 휴대폰 너머의 누군가에게 사과한 뒤 다시 소곤거리듯 물었다.

- 야,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우리 삼촌이 착신 거부까지 걸어?

우리 삼촌은 절대 그런 사람 아니라는, 해준에 대한 경애로 가득 찬 지수의 발언에 현규는 짜증 난다는 듯 혀를 찼다.

수현이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이 집안사람들의 해준 형에 대한 환상은 종교 수준이다.

더럽게 귀찮다.

“아무 짓도 안 했어. 오히려 내가 당했지.”

- 웃기지 마. 우리 삼촌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 삼촌이 착신 거부 거는 사람은 딱 셋뿐이야. 성범죄자, 음주 운전자, 마약이나 도박 중독자.

그중에 무슨 짓을 한 거냐는 다그침에도 현규는 꿋꿋하게 지수의 의견을 무시했다.

“닥치고 해준 형이나 바꿔.”

-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러는데?

“세 번 말 할까?”

내가 세 번째 같은 말을 한 후의 일을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는 위협에 지수가 입을 꾹 다문다. 그러곤 곧 상황 판단을 마친 듯 알아서 꼬리를 내린다.

- ……잠깐만.

다 기어들어 가는 답변 뒤로, 수화부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삼촌, 전화 좀 받아.”, “왜?”, “현규.”라는 짤막한 대화가 다 들려왔다.

그사이 주차를 마친 현규는 스피커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해준이 전화를 끊어 버릴까 초조한 듯 핸들을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는데 의외로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 생각보다 인내심이 있네.

금세 회사로 쫓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비아냥거림이었다. 하지만 현규는 이번에도 그 정도 빈정거림은 가볍게 무시한 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메시지는 왜 보내신 거죠?”

번호만 친구의 번호일 뿐, 그 메시지를 보낸 주체는 해준이었다. 그러니 메시지의 목적도 해준에게 물어야 했다.

해준 역시 그런 현규의 생각을 정확히 눈치챘다. 사실, 그러라고 한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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