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160)

- 너 진짜 그 녀석이랑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아?

“그 녀석이랑 저는 어떤 일이 있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했을 텐데요?”

- 넌 그렇게 주장하지만 내 귀에 들어오는 얘기는 또 다르니까.

“누가 무슨 소리를 하는데요?”

- 너희 둘이 사귀었다는 건 나도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백해경이 한국 들어오자마자 네 연락처 찾느라 난리였다는 건 확실히 알거든.

나한테까지 연락이 왔었다는 이야기에 현규는 진저리를 쳤다.

이 자식이 대체 어디까지 마수를 뻗친 거냐?

“저야말로 진심으로 궁금한데, 대체 왜 그 녀석과 제가 사귄다는 소문이 퍼진 거죠?”

- 백해경이나 너나 눈에 띄는 스타일이라 유명했는데,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다니면서 늘 붙어 있었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게 되지. 거기다 한 명은 알파, 한 명은 오메가니까.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소문이 안 나면 그게 이상한 게 아니냐는 해준의 지적에 현규는 뻣뻣해져 오는 목뒤를 잡았다.

역시나 그 부분이 문제였다.

솔직히 저 모든 서사 자체에 지적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걸 일일이 다 이야기하기엔 타인의 사생활이 너무 많이 걸려 있다.

그래서 가장 단순한 방법을 선택했다.

“이런 설명까지 구질구질하게 하기는 싫었지만, 이 김에 확실히 밝혀 두죠. 형, 제 성향 아시죠?”

- 구체적으로?

“제가 우리 아버지 혼외자 때문에 불륜, 혼외자라면 질색이라 가능하면 오메가와는 가까이 지내지 않는 거요.”

- 그건, 알아.

부친의 상식을 초월한 바람기와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이복형제들, 그리고 그런 부친에게 복수하듯 맞바람을 피우더니 동복동생을 낳아 기어이 부친의 호적에 입적까지 한 모친.

동물의 왕국이라 불리는 오메가와 알파 커뮤니티 안에서도 단연코 최고 막장이라 불리는 집안에서 자라다 보면 불륜이나 혼외자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 게 당연하긴 하다.

그 부분은 해준도 현규의 결벽증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현규니까 그냥 경기 정도로 끝난 거지, 보통은 트라우마가 생기고도 남는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현규도 그렇게 섬세한 편은 아니다.

“그럼, 제 연애 상대가 전부 베타 여성들이라는 것도 잘 아시겠네요?”

- 일단, 내가 알기로는 그랬지.

실제로 유학 중 현규와 사귀던 여자들은 많이 봤으니까, 라고 이번에도 해준은 순순히 답했다.

오래가지 못해서 그렇지.

“그런데 왜 제가 그 녀석과 사귀었다고 생각하시죠?”

- 네 태도가 이상하니까.

“어떻게요?”

- 네 성격에 백해경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 쓰잖아. 진짜 아무 사이 아니라면 신경도 안 썼겠지.

일반적인 관점에서, 해준의 의견은 꽤 논리적이고 타당했다.

하지만 전제가 잘못됐다.

정확히는 주체가 잘못됐다.

“왜 제가 전 애인은 신경 쓸 거라 생각하시죠?”

내가 그렇게 착해 보이냐는 물음에 해준은 침묵했다.

양심상, 차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서였다.

헤어진 후 빌린 물건들은 택배로 발송하고 깔끔하게 착신 거부까지 거는 녀석이 전 애인에게 신경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되긴 한다.

드디어 납득한 듯한 해준의 침묵에 현규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넨다.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전 불륜, 혼외자는 절대 용납 못 합니다. 아버지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거라면 차라리 제 손으로 거세를 하겠습니다.”

현규라면 그러고도 남을 성질머리라 해준은 이번에도 침묵으로 긍정의 답을 대신했다.

“그런 제가 수현이 데리고 바로 그날 침대까지 갔다는 건 수현이랑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더하자면 태어나서 제가 사귄 오메가는 이수현 하나뿐입니다. 이수현이 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고, 제 아이를 낳을 사람도 이수현 하납니다.”

이 정도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거라, 현규는 슬슬 대화를 정리하려 했다.

“통화가 너무 길어졌네요. 그럼, 이제 서로 오해 없는 걸로 알고 끊겠습니다.”

뒤에 도착한 다른 직원들은 이미 사무실로 올라간 후였다. 차 안에서 너무 시간을 끈 상태라 서둘러 시동을 끄고 막 안전띠를 풀려는데 해준이 현규를 부른다.

- 잠깐만.

“……얘기하세요.”

- 네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 5년 전 그날 수현이 진짜 많이 아팠어. 고열에 몸살 기운이 심해서 응급실까지 갈 뻔했는데 다행히 열이 내려서 응급실까지는 안 갔고. 하지만 그 뒤에도 몸살 기운이 오래가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앓았어.

“……그렇게 많이 아팠나요?”

- 차 히터 상태가 안 좋았던 것 같아. 가족 없이 혼자 여행 왔다고 신나서 컨디션 생각 안 하고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그렇다는 건, 당시 수현이 자신이 싫거나 불편해서 억지 핑계로 피한 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제 와서 아무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꽤 큰 상처가 되었던 일이라서인지 꽤 위로가 되었다.

확실히, 날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고.

그래, 날 싫어할 리가 없지, 라고도.

-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수현이한테 들어. 그리고 생각난 김에 한 번 더 말하겠는데, 수현이한테 네가 먼저 고백해.

“……고백요?”

- 그래. 잔머리 굴리지 말고 무조건 네가 먼저 해.

안 그러면 가만 안 둘 것 같은 해준의 기세에 현규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 반응했다.

“이미 했는데요?”

- ……했다고?

“설마 결혼하고 애 낳기 직전인데 아직 고백도 안 했겠어요?”

- 아냐, 안 했어, 너.

“했어요.”

- 언제?

“언제긴요, 발정…… 아…….”

그러고 보니 그때 했던가, 라는 의문에 기억을 더듬던 현규는 순간 아차 했다.

수현의 발정기가 시작된 날 오후, 일찍 돌아와 일단 소파부터 치운 뒤 샴페인과 케이크를 준비하며 프러포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준비 중 갑자기 최 변호사님께 아버지가 수현이를 납치했다는 연락이 왔고 그래서 급히 아버지 사무실로 쳐들어갔는데, 갑자기 수현의 발정기가 시작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다.

그러니까 결론은…… 안 했다.

“……그래도, 각인까지 했는데 설마 모르겠어요?”

- 너, 진심으로 수현이가 알 거라고 생각해?

너 지금까지 뭐 들었냐, 내가 수현이가 너랑 이 이상 발전된 관계가 될 생각이 없다고 했냐, 안 했냐, 너나 수현이나 왜 이렇게 남의 말을 안 듣는 거냐고 해준이 다그치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현규가 목소리를 높인다.

“진짜, 모른다고요?”

- 모르니까 내가 이러지.

“그 정도로 표현을 했는데도요?”

내가 얼마나 정신 나간 놈처럼 대놓고 예뻐하고 티를 내고 다녔는데 그걸 모를 수가 있냐고 현규는 경악했지만 해준은 그런 현규를 굉장히 한심해했다.

짝사랑 경력만 길지, 현규는 수현이를 아직도 너무 모르고 있었다.

- 수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본인 이름보다 더 많이 들은 게 ‘귀엽다.’라는 말이야. 온 가족이 ‘귀엽고 예쁘다.’를 입에 달고 살아서 걔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기를 귀여워한다고 생각해. 지수 빼고.

“……수현이가 귀엽긴 하죠.”

- 그래, 그러니까 당연히 너도 자기를 귀여워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동생처럼.

“세상에 어떤 변태 새끼가 자기 동생이랑 섹스를 해요?”

자신이 말을 내뱉으며 동복동생인 주환을 떠올린 순간, 현규는 닭살이 돋은 듯 몸서리를 쳤다.

솔직히 토할 것 같았다.

- 동생이랑은 혼인 신고도 안 되지.

우문현답이었다.

너희는 혼인 신고가 되니 섹스도 가능한 거 아니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해준의 발언에 현규는 극히 드물게도 당황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는 건…… 설마, 수현이가 아직도 우리가 계약 결혼을 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요?”

- 정확히, 맞아.

딱 그거라고 해준이 짚는 순간 이번엔 현규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요?”

- 걔 사고회로에서는 그래. 어쨌든 그러니까 네가 먼저 고백하고 제대로 처리해. 너 머리 너무 굴리느라 순서가 전부 엉망진창이야. 더 꼬이기 전에 빨리 바로 잡아.

“허…….”

솔직히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상황에 현규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내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 이쯤 되면 우리 아래층 사는 포메라니안도 다 알겠다고 생각했지만 수현은 아랫집 포메라니안보다 복잡하면서도 단순했다.

약간의 혼란과 당혹감, 그리고 어이없음의 복잡한 감정으로 멍하니 운전석에 앉아 있는데 해준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 늘 말하지만 수현이한테 ‘눈치로’, ‘대충’, ‘어림짐작으로’라는 말은 안 통해. 걔는 눈앞에 보이는 현상과 과학적 데이터만 믿는 애야. 이심전심 같은 건 몰라. 걔는 무조건 말로 해야 돼. 하다못해 텍스트로라도 남겨야 돼.

그래, 그랬던 것 같다.

그간 일상이 달콤해서 잊고 있었다.

진짜 부부 같았으니까.

- 이쯤 했으면 잘 알아들은 걸로 알고 끊을게. 그럼, 이만.

마지막 인사와 동시에 뚝 하니 끊긴 전화에 멍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던 현규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곤 서둘러 수현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통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는데 세 번 정도의 신호음이 울린 뒤 곧 툭 하니 신호음이 끊겼다. 그리고 곧 메시지가 도착했다.

[회의 중입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의는 무슨…….”

장비 업체 돌아본다며 무슨 헛소리냐?

장비 업체와 미팅 중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해준과 그런 대화를 해서인지 마음이 급해졌다.

초조함에 이번엔 윤 팀장님 번호를 찾아 전화했지만 그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곧 연락드리겠다는 메시지만 돌아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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