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160)

“뭘 하는 거야, 둘이?”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에 재빨리 시스템 개발팀으로 연락하려는데 또다시 벨이 울려왔다.

이번엔 비서팀이다.

지금은 절대 받고 싶지 않았지만 비서팀이면 일 관련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곧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강현규 팀장입니다.”

* * *

“오늘 유독 피곤하네요…….”

따뜻한 가을볕 아래 테이블에 앉아 유자 민트 티를 마시던 수현은 길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차는 맛있고 날씨는 더없이 청명한데 너무 나른했다.

그리고 졸리다.

“그러게, 커피 마시라니까.”

윤 팀장의 친구가 운영하는 장비 업체에 들러 대충 눈도장만 찍은 뒤 굳이 카페에 들른 건 연신 하품을 하는 수현 때문이었다.

오랜 휴가 때문인지, 발정기 때문인지 오늘 수현은 내내 하품하며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고 있었다.

마침 날씨도 좋고 지금이 가장 졸릴 시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평소의 수현답지 않았다.

“졸리기는 한데, 그래도 당분간 커피 끊어 보려고요.”

“왜?”

“카페인 중독도 심하고, 또 임신할 수도 있으니까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넘기던 수현의 태연한 답에 윤 팀장이 마시던 커피를 내뿜었다.

“팀장님, 더러워요.”

테이블에 다 튀었다며 본인의 컵을 든 수현이 타박하자 냅킨으로 옷에 튄 커피를 닦던 윤 팀장이 진저리를 친다.

“이 대리야, 이럴 때는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라. 갑자기 끼어들면 놀라잖아.”

“뭐가요?”

“갑자기 임신…… 소리를 하니까.”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는 듯 잠시 커졌던 목소리를 낮추며 윤 팀장이 그런 사적인 이야기는 좀 작게 하라고 했지만 수현은 뭐 그따위 걸로 놀라냐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발정기가 왔으니까 임신 가능성은 염두에 둬야죠. 일반적으로 첫 발정기의 임신 확률은 낮은 편이지만, 그건 청소년기에 첫 발정기가 왔을 경우의 얘기고 제 케이스는 특이하니까요. 이번엔 콘돔 없이 꽤 여러 번 했으니까 확률이 높을 거예요.”

“그럼, 출산 휴가 가는 거야?”

“임신을 했으면요.”

“어쨌든, 임신하면 출산 휴가 들어가는 거지?”

“그렇겠죠?”

휴가 없이 애를 낳을 수는 없으니까, 라는 답에 윤 팀장이 간절한 얼굴로 묻는다.

“몇 개월 신청할 거야?”

출산 휴가는 3개월이지만 육아 휴가는 1년인데, 1년은 안 돼, 라는 윤 팀장의 애원 섞인 눈빛에 수현은 눈을 껌뻑였다.

“그건, 일단 임신부터 한 뒤에 할 얘기 같은데요.”

아직 임신도 안 했는데 벌써 그런 얘기를 하기엔 이르지 않나, 하며 잔을 휘휘 저어 흔들어 남은 차를 비운 수현은 잔을 내려두는데 메시지 알림이 울려왔다.

[주문하신 물건 도착했습니다. 언제든 편하실 때 픽업하세요.]

“반지 왔대요.”

“그래?”

“네.”

“그럼 찾으러 가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윤 팀장이 재킷을 드는 걸 보며 수현은 의아하다는 듯 윤 팀장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적극적이세요?”

“나 원래 이런 이벤트 좋아해.”

“남의 이벤트만 좋아하지 말고 빨리 본인 연애를 하세요.”

이런 걸 좋아하는 걸 보니 연애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 같아 수현은 안쓰러운 듯 윤 팀장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컵을 치우던 윤 팀장이 짜증스러운 듯 수현을 돌아본다.

“이 대리.”

“네.”

“이런 것도 직장 내 괴롭힘이야.”

“뭐가요?”

“연애 얘기.”

내가 이 대리한테 연애 안 하냐고 다그치면 기분 좋겠냐는 반문에 수현은 금세 이해했다.

“귀찮죠, 그런 거. 앞으로 연애 얘기는 조심할게요.”

“알았으면 됐어.”

이번만 봐준다는 듯 삐친 얼굴로 컵을 반납대에 놓은 윤 팀장이 먼저 카페를 나서자, 바로 뒤로 따라온 수현이 시각을 확인했다.

슬슬 퇴근 시간이다.

타이밍이 좋았다.

“그럼, 가죠.”

반지 찾으러.

“무슨 짓을 했길래, 아직 결혼식도 안 했는데 이혼 소식이 떠?”

급한 일이라고 당장 대표실로 오라고 해서 사무실도 안 들르고 곧장 왔더니 처음 나온 말이 그거였다.

같지도 않은 루머 타령에 현규는 소파에 기대앉아 이마를 꾹꾹 눌렀다.

팀장이 수선을 피워 무슨 일인가 했더니,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이런 말씀 새삼스럽지만…… 시간 많으시네요?”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은 특히 더 한가해 보인다는 현규의 잔소리를 강 대표가 웬 헛소리냐는 듯 무시한다.

“말 돌릴 생각 하지 말고, 갑자기 이혼설이라니 뭐야?”

“99%의 루머와 1%의 추측으로 돌아가는 익명 게시판에서 나온 이야기를 믿으세요?”

본인의 아이디도 노출하지 않는 익명 게시판에 올라오는 이야기들은 100% 픽션이었다.

그중에 가끔 맞는 게 있다고 익명 게시판을 맹신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건 그 글을 쓴 사람이 그날 잠시 작두를 탄 것뿐이다. 즉 점사 같은 거라는 소리다. 혹인 인디언 기우제나.

로또도 일주일에 한 명은 맞추는 사람이 있는데 그 수많은 루머 중 하나 정도는 맞겠지.

그러니까 결국 확률의 문제였다.

그런 걸 믿을 거라면 차라리 신점을 보러 가라는 조언에 강 대표가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듯 인상을 쓴다.

“익명 게시판이라니? 거기에도 뭐가 올라온 거냐?”

처음 듣는 얘기라는 강 대표의 반응에 현규가 그럼 또 어디서 뜬 건가, 하며 되묻는다.

“……오늘의 증권가 보신 거 아닌가요?”

“난 방금 이정현한테 들었어.”

“아버님이요?”

현규의 입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 ‘아버님’ 소리에 강 대표가 기가 찬다는 듯 웃는다.

“언제 봤다고 아버님이야?”

낯도 더럽게 가리는 데다 그다지 서글서글한 편도 아닌 녀석이 어디서 넉살 좋은 척이냐는 부친의 타박에도 현규는 꿋꿋하게 호칭을 이어 갔다.

“아버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본론이나 말하라는 현규의 다그침에 강 대표가 진짜 못 볼 꼴 본 얼굴로 인상을 쓴 채 말을 이어 간다.

“이 대리 이직한다며?”

이직이라니, 확실하다.

출처는 오늘의 증권가였다.

원래도 온갖 루머가 판치는 곳이라 고소할 사람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이 김에 한 번 요란하게 굿판을 벌여야 할 것 같았다.

“역시, 익명 게시판을 보신 모양이네요.”

“이정현이 익명게시판을 왜 봐?”

“시스템에 걸린 겁니다. SNS와 커뮤니티를 계속 모니터링하니까요.”

이쪽도 그래서 알아챈 거지만, 그래도 이 대표님도 참 쓸데없는 데에 신경을 많이 쓰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백한 시간 낭비다.

“그렇다는 건 어쨌든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거네.”

“사실무근이니 무시하세요. 다들 신경도 안 쓰는 일을 왜 아버지가 신경 쓰시죠?”

실제로 그 소문이 적힌 글은 그 게시판에서 댓글 몇 개 달렸을 뿐이고 그 시간 이후로 오히려 주가는 소폭 상승했을 정도다.

즉, 아무도 관심을 안 둔다는 소리다.

주식 폭등 직전 손 털었다 그 이후 오르는 주가에 어서 망하라고 염불 외는 몇몇 외에는.

“진짜 이혼설은 전혀 없는 얘기라고?”

“전혀요. 제 이혼보다는 우리 회사 상장 폐지가 더 현실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댓글을 달아 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강 대표가 그 단어가 거슬린 듯 날카롭게 반응한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상장 폐지가 뭐야?”

“그러니까, 그럴 일은 없다는 소립니다.”

아버지는 지분이 없으셔서 이혼설이 자주 돌았지만 전 이 회사 최대 주주라 주식에 해 끼칠 일은 안 한다며 현규는 기분 좋은 듯 눈웃음을 흘렸다.

이것도 다 아버지의 업보라는 듯 약을 올리는 그 미소에 강 대표가 이를 살짝 악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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