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이지만 재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잘난 최대 주주께서 왜 벌써 이혼설이 돌게 하지? 거기다, 불륜설까지?”
듣던 중 불쾌한 단어에 현규의 입가에서 잠시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현규는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반응하는 게 우스웠다.
“제 얘기가 아니라, 아버지 얘기겠죠.”
“아니, 네 얘기야.”
“아뇨. 아버지 얘기예요.”
“맞아. 네 얘기야.”
“어떤 새끼가 내가 불륜을 한다고 하는데요?”
어디 감히, 나한테 불륜 같은 더럽고 추잡한 걸 뒤집어씌우냐고 현규가 버럭 화를 내자 강 대표가 바로 그 주장의 논거를 제시한다.
“유학 중에 사귀던 녀석하고 다시 만난다며? 그것 때문에 이 대리가 화나서 이직하려고 하는 거고.”
지나치게 구체적인 이야기에 현규는 기가 찬 듯 입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이정현이.”
그럼 또 그 게시판이다.
아무래도 아버님이 그 게시판 죽돌이인 듯했다.
그래서 이번엔 그냥 웃고 말았다.
그 소문 자체도 어이가 없었지만 아버지가 불륜 이야기를 한다는 게 우스워서였다.
솔직히 말해 가소로웠다.
“아버지가 저한테 그 이야기를 하실 입장이 아니실 텐데요?”
양심 어디 갔냐고 비난하는 현규의 눈빛에 강 대표는 순간 눈을 빛냈다.
너 잘 걸렸다는 얼굴이었다.
“말 돌리는 걸 보니 찔리는 데가 있는 모양이지?”
“저보다 아버지가 찔리실 일이죠.”
갑자기 거기에 왜 나를 들먹이냐고, 강 대표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지금 네 얘기 중이야.”
“아뇨, 아버지 얘기 중입니다.”
“……무슨 소리야?”
“알고 싶으세요?”
그걸 밝히면 본인도 아주 조금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이쯤 되니 더 이상 숨기는 것도 귀찮아 현규는 이번엔 진지하게 물었다.
조금의 악의나 비아냥거림 없이, 순수하게.
진짜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궁금하냐고.
알고 싶다면 알려 줄 수는 있지만 감당이 되겠냐고.
지나치게 차분하고 담담한 현규의 눈빛과 음성에 강 대표 역시 잠시 말을 멈췄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현규가 다시 한번 경고하듯 묻는다.
“한 번만 더 묻겠습니다. 진짜 알고 싶으세요?”
“…….”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눈빛으로 현규가 부친을 응시하던 사이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왔다.
정적을 깨는 그 소리에 동시에 두 사람은 각자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화면을 켬과 동시에 알림창에 뜬 메시지를 확인한 현규는 그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화면을 누른 뒤 메시지 창으로 돌아가 그 안에 뜬 이미지를 클릭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첨부된 이미지를 확대했다 축소했다 하며 배경을 확인해 봤지만 몇 번을 봐도 이미지는 그대로였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이 미친 새끼가…….”
* * *
“저 여기서 내려 주세요.”
볼일을 모두 마친 뒤, 바로 회사로 돌아온 수현은 건물의 1층 카페를 손으로 가리켰다.
“왜?”
“음료수 좀 사 가게요.”
“그냥 커피 마시라니까.”
차 안에서도 계속 눈을 비벼 대던 수현을 보며 윤 팀장은 연신 커피 한 잔 정도는 괜찮다고 했지만 수현의 고집도 대단했다.
“이제 퇴근 시간인데 먹기 아까워요.”
퇴근 즉시 눈이 번쩍 떠질 텐데 지금 먹는 건 손해라는 수현의 주장에, 윤 팀장은 그 의견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이미 졸린 시간은 다 지났으니까, 라며 윤 팀장은 카페 바로 앞에 정차했다. 그사이 안전띠를 풀곤 오는 내내 만지작거리던 작은 상자를 주머니에 쏙 넣은 수현은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도 음료 더 드실래요?”
“난 됐어.”
“그럼, 먼저 들어가세요. 저도 금방 올라갈게요.”
“그래.”
차에서 내려서 곧장 차 문을 닫은 수현은 보도로 올라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곧 현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 지금 회사 들어왔어요. 형은 어디세요?]
오늘부터 저녁 모임이 잦아질 거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메시지를 보낸 수현은 곧장 카페로 들어가 음료를 고르기 시작했다.
커피는 안 되니 패스하고 차가운 음료도 패스.
“뱅쇼…….”
가을이라 나온 건지, 오랜만에 보는 메뉴에 곰곰이 뱅쇼를 마셔도 되던가 떠올려 보는데 벨 소리가 울려왔다.
그리고 화면 위에서는 ‘새엄마’라는 글자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반가운 그 이름에 이번엔 ‘거절’이 아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미 준비는 모두 끝났다.
지금 만날 수 있으면 좋다.
“네.”
- 너, 지금 어디야?
“저 회사요. 방금 들어왔어요. 형은요?”
- 나도 지금 회사야. 넌, 지금 사무실이야? 아니면 주차장? 엘리베이터?
현규는 제발 그 셋 중 하나라고 말해 달라고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수현은 그 세 군데 중 어디도 아니었다.
“아뇨. 졸려서 음료 한 잔 사서 들어가려고요.”
- ……카페?
“네.”
- 어디?
“1층 카페요.”
- ……우리 건물?
“네.”
- 왜? 오피스텔 카페로 가지…….
“거기 가면 커피 마시고 싶을 것 같아서요.”
그 카페는 라테 전문 카페로, 차 종류는 없이 라테 메뉴만 있었다. 물론, 전문점인 만큼 디카페인 메뉴가 있긴 하지만 디카페인 라테는 사람이 먹을 게 아니다.
라테의 맛은 카페인 특유의 톡 쏘는 끝맛이 있어야 완성되므로 당분간 라테는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블렌딩 별로 차를 마스터해 볼 생각으로 유심히 메뉴판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그늘이 졌다.
메뉴를 보려는 사람인가 하며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아 왔다.
느릿하고 부드럽게.
마치 가벼운 깃털이 어깨에 얹어지는 듯한 감촉과 함께 익숙한 냄새가 났다.
아주 좋아하는 베르가못 향이었다.
조금 낯설지만 익숙한 그 향에 반가운 얼굴로 옆을 돌아봤다.
“……형?”
분명히 현규 형과 비슷한 느낌의 냄새와 감촉에 옆을 돌아봤지만 뜻밖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예쁘게.
“……이수현 대리님?”
아주 옛날에, 그런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다.
지극히 흔한 통속극으로, 전 애인에게 상처받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남자를 오래 짝사랑해 온 여자가 구원하는 스토리였다.
당시 꽤 화제가 된 드라마였는데 아마 그때 봤던 부분이 드디어 마음의 응어리를 푼 남자가 자신의 곁을 지켜 준 여자에게 고백할 준비를 하는 부분이었을 거다.
여자에게 고백하기 위해 반지와 꽃을 준비하고 막 그녀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려는데 남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도움을 청하는 전 애인의 전화가.
전 애인의 사정인즉,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집안에서 그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의 사업을 망하게 하겠다고 협박해 부유한 가정 폭력남과 결혼했다는 거였다.
정략결혼이었고, 또 집안이 남편에게서 도움을 받은 게 있어 폭력을 참고 살았지만 아이까지 손을 대기 시작해 겨우 아이만 데리고 도망쳐 왔다는 게 전 애인의 주장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