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160)

당시 드라마를 같이 보다 완전히 남자 주인공 역에 몰입한 둘째 형은 난 저러면 두 여자 다 포기 못 한다고 해서, 둘째 형에게는 절대 그런 일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욕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첫째 형은 냉정하게 부동산의 경우를 예로 들며 서류에 남은 흔적이 없으면 현 점유자가 유리하니 여자 주인공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했다.

형들의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저 입장이라면 어떨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나오는 말은 현실적이었다.

“……크다…….”

화이트베이지 니트 셔츠에 선명한 파란색의 각이 진 트랜치 스타일의 쇼트 재킷, 그 아래의 검은 스트레이트핏의 면바지와 검은 워커.

액세서리는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연한 갈색의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과 유독 화려한 이목구비 탓인지 빛이 나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번쩍번쩍 빛이 나며 엄청 튀었다.

너무 화사하고 아름다워서.

그리도 동시에 너무 커서.

진짜, 문짝만 하다.

이 정도면 현규 형하고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정도였다.

아버지와 형들뿐 아니라 삼촌이나 어머니도 큰 편인 데다, 최근엔 그들보다 더 큰 현규 형을 매일 보고 살아 빅 사이즈에 관대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 사람도 진짜 크다.

그러고 보니 5년 전에 현규 형과 함께 서 있었을 때도 둘은 시선의 높이가 비슷했다.

그때는 날씬하다 못해 하늘거린다고 느꼈는데, 전혀 아니었다.

워낙 마른 슬랜더 체형인 데다 하필 함께 있던 사람이 몸이 두꺼운 현규 형이라 그렇게 보였던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상대적인 거였다.

현규 형이 아닌 자신과 선 남자는 길고 컸다.

- 이수현, 너 거기서 꼼짝도 하지 말고 기다려. 그 자식이 끌고 가려고 하면 걷어차고 도망쳐!

거의 고함을 지르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뚝 하니 끊긴 전화에 수현은 멍하니 옆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순간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이야, 강현규 몸이 달았네. 내가 전화할 때는 받지도 않더니.”

“…….”

“네가 현규 파트너 맞지? 5년 전에 현규 바람맞혀서 화병 나게 했던 애.”

“……현규 형의 파트너도 맞고 5년 전에 현규 형 바람맞힌 것도 맞는데…… 화병은 모르겠는데요…….”

“응. 몰라도 돼. 그런데, 진짜 작네.”

“……제가 작은 건 아닌데요…….”

그쪽이 너무 큰 거예요, 라는 말을 대신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현은 일단 카운터로 다가가 음료를 주문했다.

“뱅쇼 라지 하나 주세요. 테이크아웃으로.”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계산은 이걸로 같이.”

바로 옆에 서서 같이 주문을 한 남자가 내민 카드를 보곤 재빨리 휴대폰을 내밀었다.

“제 건 제 카드로 결제해 주세요.”

“그냥, 먹어도 돼. 내가 이 대리님 보니 반가워서 사 주는 거야. 내가 이 대리님 많이 만나고 싶어 했거든. 그런데, 살다 보니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살짝 고개를 기울여 시선을 맞춰 오는 남자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 사람 나 좋아하나 착각이 들 정도로 다정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게 좀 이상했다.

분명히 달콤하고 따뜻하고 사르르 녹아 들어갈 것 같은 눈빛인데 그 안에 미묘한 광기가 느껴지는 게…….

“아!”

“네?”

“응?”

순간 문득 떠오른 기억에 탄성을 내뱉자 옆의 남자와 계산 중이던 직원이 동시에 이쪽을 바라본다.

무슨 문제 있냐고 묻는 듯한 그 시선에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산해 주세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 이 대리님이?”

높은 카운터에 여유 있게 몸을 기댄 채 다정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을 본 순간 수현은 그제야 현규가 했던 말을 납득했다.

엄청난 미인인데 눈이 좀 돈 것 같은 녀석이 나타나서 말을 걸거나 빤히 쳐다보면 절대 상대하지 말고 도망가라던.

그때는 현규 형의 묘사가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주 정확했다.

하지만 굳이 현규 형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보는 순간 도망치긴 했을 거다.

이 사람은 자신이 무조건 피해 다닐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현규 형하고 비슷하니까.

웃을 때 오히려 더 살벌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은은히 돌아 있는 것 같은 눈빛도, 그리고 냄새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익숙한 냄새에 옆에 선 남자를 쭈욱 훑어보던 수현은 때마침 직원이 건네는 휴대폰을 들고는 도망치듯 빈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자 카드를 받아 든 남자 역시 바로 옆으로 와 앉는다.

그를 피하려 일부러 1인석에 앉은 건데 굳이 옆자리까지 따라와 앉은 남자를 본 수현은 스르르 의자를 끌어 그와의 간격을 벌렸다.

어떻게 봐도 난 네 옆에 앉기 싫다는, 노골적인 거부의 제스처에 옆에 앉은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현규 형과 비슷했다.

“대놓고 사람을 피하다니, 예의가 없네.”

“……모르는 사람하고는 대화하지 말라고 배워서요.”

“모르는 사람? 나 말하는 건가?”

지금 내 얘기 한 거냐고 물으며 슬쩍 의자를 끌고 옆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움직임에, 수현은 또 의자를 끌어 그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옆 의자가 걸렸다.

더 이상 이동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옆 의자로 가 앉았다.

그러곤 너무 노골적으로 피한 게 조금 미안해져 그를 힐끔거리자 그가 잔뜩 짜증이 밴 얼굴로 웃는다.

“이 대리님, 사람 상처받게 하네? 난 이 대리님이랑 좋게 좋게 가고 싶은데?”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테이블에 턱을 괸 그는 사람을 홀릴 듯한 눈빛으로 수현을 응시했다.

대놓고 추파를 던지는 그의 태도에 수현은 몸을 움찔하며 그를 힐끔거렸다.

엄마, 쟤 이상해, 라는 눈빛이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수현은 얼굴로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다 뱉어 내고 있었다.

과하게 솔직한 얼굴 탓에 남자도 수현의 생각을 다 읽어 낼 수밖에 없었다.

“이 대리님, 거짓말 못 하지?”

“네.”

“응. 못 할 것 같아. 얼굴로 다 말하네. 너무 솔직해서 짜증 날 정도야.”

얼굴은 웃고 있지만 화가 난 듯한 그의 말투에 수현이 시선을 피하려는 순간 진동벨이 울려왔다.

“주문하신 뱅쇼 두 잔 나왔습니다.”

지금 순간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그 소리에, 수현은 후다닥 카운터 앞으로 가 뱅쇼 한 잔을 손에 들었다.

“그럼. 전 이만 사무실에 돌아가 봐야 해서요.”

그래도 잠깐이라도 대화를 했다고, 예의상 꾸벅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마친 수현은 서둘러 문을 향해 걸었다.

도망치듯 빠르게, 평소답지 않게 바쁜 걸음으로 막 카페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어깨가 잡혔다.

그러곤 곧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깨에 둘러진 팔에 놀라 고개를 들자 바로 옆에 선 그가 예쁘게 웃어 보인다.

“어차피 퇴근 시간인데, 잠깐 나랑 대화 좀 하지?”

“……전 할 말 없는데요?”

“응. 괜찮아. 내가 많아.”

“……무슨 용건이신데요?”

“그냥, 안부 인사? 아니면 호구 조사도 좋고. 그것도 아니면, 세상 사는 얘기를 해도 좋고. 뭐든 상관없지. 아니, 그것보다 나랑 현규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지 않아?”

“…….”

“왜 나한테서 현규랑 비슷한 냄새가 날까? 처음부터 그게 신경 쓰이지 않았어?”

사실, 신경이 쓰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같은 향수 쓰시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같은 향수를 써도 체향에 따라 냄새가 다르다는 거 알지 않나? 베타라면 못 느끼지만 오메가니까.”

분명 현규 형에게서도 같은 설명을 들었다.

그래서 조향이 굉장히 중요하고 본인에게 맞는 향수를 써야지, 잘못 사용하면 악취가 난다고도 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서 현규랑 같은 냄새가 날까?”

“…….”

“현규 페로몬 같지 않아?”

남자가 그렇게 말한 순간 향이 짙어졌다.

희미하던 향이 진해지자 확실해졌다.

분명히 비슷하다.

너무나 좋아하는 냄새였다.

하지만 아주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 차이가…….

“……저기. 초면에 죄송한데요.”

“응?”

“냄새, 토할 것 같아요…….”

“말도 안 돼, 이건…….”

“…….”

“맙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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