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160)

그렇게 마음을 결정한 순간 현규는 긴 한숨과 함께 나지막한 음성으로 수현을 불렀다.

“수현아.”

“네.”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사람 중 그걸 모르는 사람은 너뿐이야.”

이쯤이면 우리 회사 직원들뿐 아니라, 오피스텔 보안직원들과 1층의 카페 사장도 다 알 거라고 현규는 장담할 수 있었다.

아니, 구내식당 이모님들도 알 거다. 회사란 소문이 빠른 곳이니까.

그 정도로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살짝 오버액션을 한 것도 있지만, 은연중 저도 모르게 태도로 드러난 게 더 많았다.

눈빛으로, 그리고 손길로.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수현은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해준 형의 말대로 이 애는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아직도 갈 길이 먼 기분에 말없이 수현의 예쁜 눈을 바라보고 있자 잠시 멍하니 있던 수현이 한순간 환하게 웃었다.

마치 꽃이 피듯, 화사하게.

강아지처럼 맑고 큰 눈을 휘며, 세상에서 제일 말 안 듣게 생긴 얼굴로, 아주 예쁘게 웃었다.

그 미소에 홀려 잠시 멍하니 수현을 내려다보던 사이, 수현이 문득 말을 건넸다.

“저도 형 좋아해요.”

환한 미소와 함께 수현이 내뱉은 그 말에 지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귀로 듣긴 했는데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것 같았다.

“미안한데…… 방금 뭐라고?”

내 귀나 뇌가 좀 잘못된 것 같다고 수현에게 한 번 더 말해 달라고 요청하자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한다.

“형 좋아한다고요. 그것도 아주 많이. 오랫동안.”

“……어……?”

“서로 좋아한다니 다행이에요. 형이 고백 안 받아 줄까 봐 걱정했는데.”

천진한 고백 뒤로 한 번 더 환하게 웃던 수현은 쑥스러운 듯 뺨을 긁적였다.

아주 행복한 얼굴로.

하지만 이쪽은 웃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고백을 하면, 그리고 수현이 그 고백을 받아들여 주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한 적이 있었다.

하늘을 날 듯이 기쁠까?

아니면 너무 기뻐 미친놈처럼 사방을 뛰어다닐까?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고백 이후의 장면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만 현실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너무나 뜻밖의 고백을 받으면 사람은 뇌가 멈춰 굳어버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서 있는 게 다였다.

단순한 세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고백이 강력한 마법처럼 자신에게 저주를 건 것 같았다.

바보가 되라고.

“……날, 좋아한다고?”

“네.”

“……네가, 나를?”

“네.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홍조가 핀 얼굴로 웃던 수현이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더니 금색의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바로 얼마 전에 본, 익숙한 디자인에 익숙한 로고가 박힌 상자에 잠시 죽은 듯 고요하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시끄러울 정도로 요란하게, 그리고 빠르게.

설마, 설마 하는 생각에 그 상자를 내려다보고 있자 곧 상자의 뚜껑을 연 수현이 드물게도 수줍어하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저랑 재혼해 주세요.”

“……응?”

“지난번에 한 결혼은 이혼한 걸로 하고 이번엔 제대로 결혼해 주세요. 형하고 진짜로 결혼하고 싶어요.”

프러포즈와 함께 수현이 내민 상자 안에는 가느다란 보디에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힌 반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형을 많이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형하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배시시 웃으며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반지 상자를 든 수현은 눈을 빛내며 현규의 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거절당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 반짝거리는 그 눈빛에 원래대로라면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갔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아무래도 확실하게 저주에 걸린 것 같았다.

난 이제부터 그냥 바보다.

그걸 받아들인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복잡한 수사도 미사여구도 필요 없다.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린 순간 현규는 둘 중 조금 작은 반지를 먼저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반지를 수현의 왼손 약지에 끼워 넣었다.

“넌 언제부터 날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하지만 난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 아마, 내가 더 오래 널 좋아했을 거야.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니까…….”

가드 링은 정확히 수현의 손가락에 들어맞았다.

웨딩 밴드 위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가드 링을 본 현규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드디어, 수현의 청혼에 대답했다.

“대답은 무조건 예스야.”

예상보다 빠른 긍정의 답에 환하게 웃음을 흘린 수현은 그 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라 현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수현의 포옹에 현규는 재빨리 수현을 안아 든 채 입을 맞췄다.

가벼운 키스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간지러운 듯 웃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얼결에 남의 청혼 장면을 구경하게 된 해경이 당황한 얼굴로 묻는다.

“……대체 무슨 소리야? 재혼이라니? 너희 진짜 결혼한 거 아니었어?”

정략인지, 연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미 결혼한 거 아니었냐는 해경의 물음에 현규가 해경을 보며 웃는다.

너 아직도 거기 있었냐는 듯.

“집에 안 가고 뭐 하냐?”

“주환이 만나게 해 주면 갈게.”

“그럼 화장실에서 살든가.”

네가 그 녀석을 만날 일은 영원히 없을 테니까, 라며 현규가 문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에게 안긴 수현이 놀라 소리친다.

“형, 무거워요. 내려 주세요.”

“그래, 너 보기보다 무겁더라.”

“그러니까 내려 주세요.”

“무겁지만 안 무거워. 조용히 있어.”

말한 그대로 진짜 가볍다는 듯 수현을 안아 든 현규는 바로 문을 열고 지긋지긋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사이 화장실 앞을 에워싼 채 접근을 막고 있던 보안팀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 나오는 녀석, 한 회장님 쪽에 인계하세요.”

“네. 10분 후 도착 예정입니다.”

“그럼.”

이미 얘기가 다 끝났는지 짤막한 대화로 커뮤니케이션을 마친 현규는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급히 현규를 따라 나오던 해경의 앞을 보안팀이 막아섰다.

네다섯 명의 덩치 좋은 남자들이 앞을 막아서자 바로 화장실 문 앞에서 멈춰 선 해경이 당황한 듯 묻는다.

“뭐죠?”

“잠시 저희랑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신데요?”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이고 뭐고, 무슨 일인지부터 설명을 해야지.”

“가서 들으시죠. 얘기가 깁니다.”

“그러니까, 뭔데?”

살짝 신경질적인 해경의 반응에 유독 덩치가 큰 남자가 그 앞을 막아섰다.

바로 해경의 앞에 못 박힌 듯 남자가 주는 위압감에 해경은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듯 이미 멀어진 현규에게 소리쳤다.

“야, 강현규! 너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거래를 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냐는 해경의 외침에 현규는 말없이 오른손 중지만 들어 올렸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뜻이었다.

“자, 그럼 이제 가시죠.”

말 안 듣는 망아지의 고삐를 쥐듯 해경의 어깨를 잡아 누른 남자가 강제로 그를 밀며 복도로 나가자 다른 보안팀 직원들 역시 그 주변을 에워싸며 함께 걷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까마귀 떼가 복도를 가로지르는 것 같은 모습에 퇴근길 직원들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몰리려 했지만 그도 잠시였다.

일주일 전에 이어 오늘도 수현을 안아 들고 당당하게 로비를 가로지르게 된 현규는 걷는 걸음걸음 수현의 턱과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수현은 간지럽다는 듯 연신 웃고 있었다.

본인들이 저녁내 퇴근길 꼴불견으로 사내 게시판을 불태우게 될 줄은 전혀 모른 채.

* * *

20미터 남짓.

회사 건물부터 오피스텔 건물까지 돌아오는 내내, 수현의 이마와 턱, 그리고 뺨에 키스를 퍼붓던 현규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온 순간 거친 손길로 수현을 현관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곤 곧 깊이 입을 맞추며 다급히 수현의 하의를 벗겨 내기 시작했다.

잔뜩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린 뒤 실크처럼 부드러운 옷감의 하의마저 끌어 내리자 어느새 발기한 수현의 성기가 튀어나왔다. 그와 함께 수현의 엉덩이 안쪽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허벅지 사이를 적시고 있는 게 보였다.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달콤한 향과 함께 축축하게 시각을 자극하는 그 광경에 현규는 수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뒤돌아서 설 수 있겠어?”

침실로 들어가는 게 낫겠지만 거기까지 갈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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