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160)

그럼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라는 건데, 대충 짐작이 가는 인물이 있기는 했지만 현규는 일단 예의상 물었다.

대체 이런 정신 나간 짓을 계획한 머저리가 누구냐고.

그리고 범인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윤 팀장님이요.”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윤 팀장님, 연애 경험 없지?”

“본인은 있다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없어요. 최소 근 5년간은.”

점심도 늘 저랑 먹었거든요, 라는 수현의 답에 현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 연애를 못 하지.

“그런데 이걸 누가 다 한 거야? 이벤트 회사?”

기획자는 알았으니 실무자는 누구냐고 현규가 묻자, 수현이 어깨를 안은 현규의 왼손을 만지작거리며 답한다.

“아뇨. 저희 본가 이모님들이랑 삼촌들이요. 프러포즈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했더니 와서 해 주셨어요.”

“……이모님 손 크지?”

“네. 저랑 비슷해요.”

사실 그 김장 500포기 대란 때 이모님의 공도 혁혁했다고 수현이 배시시 웃자 현규가 득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럴 것 같았어.”

그러니까 대형 쓰레기봉투 두 개 분량의 장미잎을 침대에 쏟아부었겠지, 라고 현규는 납득했다.

침대에 수북이 쌓여 있다 두 사람이 침대에 눕자 결국 바닥으로 흘러내린 꽃잎은 침실 바닥을 온통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욕조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네…….”

그랬다면 대형 사고니까, 라는 현규의 중얼거림에 수현이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인다.

“어? 윤 팀장님은 욕조에 띄우라고 했는데요?”

역시나 연애 무경험자다운 발상이었다. 아무래도 윤 팀장과 수현은 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무신경한 모태 솔로와 책과 드라마로 연애를 배운 연애 무식자가 뭉치면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이모님이 그럼 하수구 막힌다고 안 된다고 하셨어요.”

“……이모님이 계셔서 다행이네. 그리고 너 앞으로 윤 팀장님 말 너무 믿지 마.”

“그래도, 반지 사이즈는 맞췄는데요.”

“응?”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반문에 현규의 왼손을 만지작거리던 수현은 반짝거리는 반지를 보며 반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형 반지 사이즈, 전 19호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윤 팀장님이 형 손에 그게 맞겠냐고 22호라고 해서 맞게 가져온 거예요.”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나 보네.”

“윤 팀장님이 눈썰미는 좋아요. 일도 잘하고. 하기 싫은 일은 아예 안 하려고 해서 그렇지.”

“그래, 그런 평이더군.”

솔직히 그 사람도 다루기 힘든 타입이라고 현규가 한숨을 내뱉는 사이 현규의 손가락을 본인의 손가락에 대 봤다, 마디마디를 누르고 만지작거리던 수현이 문득 묻는다.

“그런데, 진짜 임신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지. 넌 싫어?”

혹시 딩크냐며, 현규가 놀라워하자 수현이 재빨리 고개를 내젓는다.

“아뇨. 전 원래 아이 좋아해요.”

“난 애는 안 좋아해.”

순간 수현이 방금 일을 잊고 또다시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다 움찔하자 현규가 웃는다.

그런 수현이 귀엽다는 듯.

“아이는 안 좋아하지만 네 아이는 갖고 싶어. 널 닮았으면…… 양육 난도가 높기는 하겠지만…… 대신 그만큼 귀여울 테니.”

수현의 말 안 들을 것 같은 이마에 입을 맞추며 현규가 그렇게 속삭이자 수현이 이마를 비비며 다시 앞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침묵하다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전 형 닮은 애였으면 좋겠어요.”

“……왜?”

“그냥…… 예쁠 것 같아서요. 인성은 별로겠지만 그건 제가 잘 가르치면 되니까요.”

현규의 커다란 손을 주물주물하다 본인 왼손의 반지를 빼 현규의 약지에 넣던 수현은 “와, 들어가지도 않아.”라며 다시 빼 소지에 끼웠다.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직접 손을 맞대고 비교해보니 엄청 크다며 수현이 놀라워하는 모습에 현규는 조용히 수현을 불렀다.

“수현아…….”

“네?”

“너도 절대 키우기 쉬운 애는 아냐.”

“알아요. 삼촌이 전 손은 안 가는데 키우는 건 되게 피곤했다고 했어요. 형들은 사고 치면 소리가 나서 금방 찾았는데 전 혼자서 조용히 사고 쳐서 나중에 찾으면 이미 사건 종료 상태였다고요. 그래서 24시간 붙어서 감시하느라 되게 피곤했다고 했어요.”

“응. 뭔지 알겠어. 나도 되게 피곤하거든.”

해준 형에 이어 이젠 내가 널 키우고 있으니까, 라며 현규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수현을 입양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혼인신고 하고 보니 입양 서류까지 동시에 처리된 기분이었다.

사인을 하고 보니 아래에 입양 서류가 끼어 있던 것 같은…….

그래도 해준 형이 아니라 내가 키우는 거니까 상관은 없지만…….

“……그런데, 5년 전 얘기는 뭐지?”

해준을 떠올리자 문득 그 얘기가 생각나 수현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묻자 수현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바로 되묻는다.

“네?”

“해준 형이 너한테 직접 들으라고 하던데? 나 바람맞힌 날, 사정이 있었다고.”

“……어…….”

“응?”

대체 무슨 일이냐고 재촉하자, 수현이 계속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놓는다.

“……삼촌이요?”

“응.”

“아…….”

혹시 그걸 얘기한 건가, 중얼거리며 수현은 신기해했다.

그 일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삼촌은 그날의 사정을 다 눈치챈 모양이다.

신기하게도 늘 그랬다.

엄마처럼, 삼촌은 늘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몰래 엉뚱한 짓 하는 것까지.

“응?”

대체 무슨 얘기냐고 현규가 계속해서 채근하자 수현은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모든 게 자신의 오해이자 착각이었다는 걸 안 이후라 이야기를 꺼내기 어색했지만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였다.

이야기 나온 김에 서로 오해 없도록 깨끗하게 정리하고 가는 쪽이 좋다.

“그러니까, 그게요…….”

* * *

“……백해경을 봤다고? 그날?”

“네.”

“……그러니까, 연락도 없이 날 만나러 도서관까지 왔다가 우연히 그 녀석과 내가 함께 있는 걸 보곤, 그 녀석이 내 애인이라고 착각해서 그냥 돌아갔다고? 그리고 그날 몸살에 걸렸고?”

“네. 차에 히터가 고장 났었거든요. 제가 정신이 없기도 했고, 길이 하도 막혀서 고칠 데가 없어서 계속 가다 집에 도착하니 차가 냉장고가 됐더라고요.”

냉동실까지는 아니지만 냉장실 온도 정도는 됐을 거라고 수현은 그날 차 안의 온도를 생생히 증언했다.

그래서 이틀을 앓았고 앓고 나니 곧장 귀국 일자가 돼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하며 장미꽃잎 위에 앉은 현규는 신경질적인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수현이 본인 시점의 서사를 풀던 중 그날 도서관에서 백해경과 자신을 봤다는 이야기에 놀라 성기를 빼낸 현규는 곧장 수현에게 잠옷을 입혀 자리에 앉혔다.

그러곤 본인도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 취조하듯 그날의 일을 낱낱이 파헤쳤고, 그 결과 지난 8년간 늘 반복됐던 결론을 또 한 번 도출해냈다.

“역시, 그 새끼를 죽여야겠어…….”

지금 가서 죽이고 오겠다며 침대 밖으로 나가려는 현규를 수현이 재빨리 잡아 말린다.

“범죄는 안 돼요. 저희 어머니 대법원장까지 되셔야 해요.”

그러니까 가족 중에 누가 사고 치면 안 된다고 수현이 말리자 현규가 다시 침대 위에 주저앉는다. 그러면서 짜증스러운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모습에 수현이 작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건, 제가 오해한 거니까요.”

분명 혼자 오해하고 연락도 안 한 채 한국으로 돌아온 건 자신이니까, 그 부분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어쨌든 연락도 없이 약속을 깬 건 자신이니까.

미국에서 쓰던 휴대폰을 버리고 와 번호를 잃어버렸다는 건 변명이 안 된다. 마음만 먹었다면 현규 형의 번호는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수 형이나 삼촌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걸 자신이 안 한 거다.

겨우 아물어 가는 상처를 또 드러내기 싫어서.

“그래, 알겠어. 일단 그 녀석을 죽이는 건, 좀 미루기로 하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5년 전이면 그 녀석과 친하게 지내던 시기도 아니고 ‘백해경’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던 때였다.

단지 싫다는 감정을 넘어 거의 혐오하던 수준이라, 친구들이 “너 백해경 볼 때는 연쇄 살인마 같은 얼굴을 한다.”라고 해 일부러 그 녀석을 안 보려고 노력했을 정도였는데 어떻게 그때 그 녀석을 돌아보던 날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냐는 현규의 물음에 수현이 민망한 듯 머리카락을 긁적인다.

“그때 그 사람을 보던 형 표정이 너무 다정해서요……. 형, 취해서 눈 풀렸을 때처럼요.”

두 사람이 애인이라고 생각한 건 자신의 착각이었지만 그런 판단을 내린 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사실, 그건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현규 형이 그 사람을 싫어한다는 건 확실히 이해했다. 오늘 그 사람을 바라보는 현규 형의 눈동자에는 ‘극혐’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그때 그를 돌아보던 현규 형은 너무 온후하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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