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대체 그때 왜 그랬던 거냐고 수현이 추궁하듯 현규를 응시하자 가만히 5년 전 기억을 떠올린 현규가 아차 한 듯 난감한 얼굴을 한다.
그걸로 알아챘다.
뭔가 있다.
“……형?”
뭔가 있으면 어서 말해 달라고 압박하는 수현의 눈빛에, 잠시 시선을 피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현규가 다시 수현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이실직고한다.
“그건…… 아마, 그때 네가 온다고 해서 그랬을 거야.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자서 제정신이 아니기도 했지만 네가 온다고 해서 기분 좋았거든. 그런데 네가 날 바람맞혔지.”
연락도 없이, 라고 마지막에 뒤끝을 더한 현규는 갑자기 그 순간이 떠오른 듯 욱했다.
그게 오해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았고 수현이 그 일로 겨우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으니 한 번은 겪을 일이었다고 좋게 넘어가려고 했다.
그래, 분명 머리로는 그랬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했다고 심장도 납득한 건 아니다.
아직도 그날 바람맞은 걸 떠올리면 울화통이 치밀어,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날 정도였다.
수현과 혼인 신고를 한 후로는 그나마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불쑥불쑥 성질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당분간 또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5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그날 만약 수현이 빨리 전화해 주차장에서 만났다면, 자신이 그날 조금만 더 빨리 도서관에서 나와 해경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아니, 하다못해 삐쳐 있지 말고 지수를 만난다는 핑계로 본가에 잠깐 들러 수현에게 넌지시 그날의 일을 물었더라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일긴 했지만 그건 이미 지난 일이었다.
과거를 탓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은 없다. 명백한 시간 낭비다.
하지만 사람을 탓할 수는 있다.
“그 자식, 빨리 다시 보내 버려야겠어.”
“해경 형이요?”
수현의 입에서 나온 ‘형’이라는 호칭에 현규는 불쾌한 듯 인상을 구겼다.
그런 일을 겪고도 쓸데없이 속이 좋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아무 생각도 없는 건지, 너무 ‘형’ 소리가 쉽게 나온다.
“언제 봤다고 해경 형이야?”
“형이니까요.”
저보다 동생은 아니잖아요, 라는 수현의 답에 그건 그렇다고 현규도 수긍했다.
우문현답이다. 그래, 형은 형이다.
앞으로 해경과 수현이 만날 일은 영원히 없겠지만 대화 주제로는 가끔 등장할 수도 있다.
그 방사능 같은 녀석과는 끊을 수 없는 천륜이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호칭은 있는 편이 좋다.
“그래, 형은 형이지…….”
그냥 ‘방사능’ 혹은 ‘볼드모트’라고 불러도 되지만 수현이 또 그럴 성격은 아니다. 그러니 형이라는 호칭 정도는 너그럽게 봐주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수현이 살짝 몸을 떤다.
“왜? 추워?”
“조금요.”
그러고 보니 공기가 차다.
이제 밤에는 제법 춥다.
슬슬 트렌치코트를 넣고 울 코트를 준비해야 할 시기였다.
“보일러 온도 좀 올리자.”
“그 정도는 아니에요.”
“춥지 않아?”
“이불 덮으면 돼요. 그리고 형이랑 잘 거잖아요.”
슬쩍 이불을 끌어 올리며 수현은 침대 위를 톡톡 두드렸다.
같이 눕자는 의미였다.
아이 같은 그 제스처에 현규는 스르르 풀린 입매를 한 채, 수현을 안고 바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눕자마자 또다시 피부에 달라붙는 꽃잎들이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다시 일어나 치우기는 귀찮았다.
사실은, 너무 피곤했다.
어젯밤 임신 이야기에 들떠 잠을 설친 상태로 오늘 종일 강행군을 소화하느라 체력이 바닥난 채였다.
더불어 수현의 돌발 행동에 놀라 우왕좌왕한 탓에 정신적인 피로도 역시 높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좀 쉬어야 한다.
그렇게 판단 내린 현규는 오늘도 역시나 수현이 이불을 걷어차지 못하게 온몸으로 수현을 끌어안아 내리눌렀다.
그러곤 작게 속삭였다.
“잠깐, 자자.”
말과 동시에, 현규는 수마에 저항하지 못한 채 곧장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 식사도 하고 침실도 정리해야 하니까 잠깐만 잘 생각이었다.
아주, 잠깐만…….
완전히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깨어난 순간 수현이 가장 먼저 느낀 감상은 ‘행복하다.’였다.
늦가을 아침의 적당히 차갑고 적당히 건조한 공기 사이로 피부에 닿은 따뜻한 체온과 몸을 내리누르는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냄새…….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둔 천국 안에서 깬 수현은 배시시 웃으며 눈을 뜨다, 바로 눈앞에서 자고 있는 현규를 보곤 눈을 껌뻑였다.
투명하고 낮은 아침 햇살을 받은 현규의 얼굴은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낮에는 보통 인상을 쓰거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 차갑고 무서운 인상이지만 잠이 든 얼굴은 청량하고 온후하다.
청년도 아닌 소년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의 형도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보자마자 도망 다니느라 얼굴을 가까이서 볼 일은 없었지만…….
아직도 멀리서 현규 형 실루엣만 보여도 핫바 물고 도망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진짜 형이 무서웠다.
지금 생각하면 나름 이유 있는 공포였지만…….
새삼 오래된 기억을 되짚으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기에는 부담스럽고 과분한 미모를, 하나하나 뜯어보듯 관찰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피부와 윤곽이 뚜렷한 얼굴선, 그리고 환한 햇살 아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긴 속눈썹과 붉은 입술.
아침 햇살 탓에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섬세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수현은 한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햇살이 너무 환했다.
아침이니 환한 건 당연한데, 환해도 너무 환했다.
그러니까, 시간에 맞지 않게…….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체내 본능 센서가 울리는 경고등에 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휴대폰을 찾았다.
하지만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휴대폰이 든 옷을 현관에 던져 두고 왔으니까.
순간, 예감은 확신이 되었다.
“……지각이다…….”
휴대폰 대신 사이드 테이블에 장식품처럼 둔, 알람이 울리지 않는 알람 시계를 확인한 수현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오늘도 역시나 현규의 팔과 다리가 전신에 칭칭 감긴 채였다.
“형! 일어나요! 우리 늦었어요!”
현규의 어깨를 흔들며 수현이 아주 드물게도 고함을 내지르자 곤히 잠들어 있던 현규가 그제야 겨우 눈을 뜬다.
하지만 아직 잠이 덜 깨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아침부터 부담스러운 멜로 눈깔을 장착한 현규는 이 비상사태에도 과하게 다정한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아주 사랑스러운 뭔가를 본 듯, 녹아들 듯 상냥하고 예쁘게.
괜히, 아침부터 심장 떨리게.
“잘 잤어?”
수현의 머리를 끌어안아 입을 맞춘 현규의 아침 인사에 수현도 일단 인사를 받았다.
“네. 잘 잤어요. 그런데 너무 잘 자서 큰일 났어요.”
“……응?”
수현의 구체적인 설명에도 현규는 여전히 입매를 풀고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잠을 너무 푹 자서 완전히 긴장이 풀렸거나 너무 행복해서 좀 미친 것 같았다.
어지간해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듯한 그의 반응에 수현은 말로 하기보다 확실한 충격 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정확히 ‘AM 8:13’라고 쓰인 장식용 알람 시계를 현규의 눈앞에 들이미는 걸로.
“……응?”
바로 눈앞에 들이밀어진 시계를 본 현규는 시각을 확인한 순간 수현의 손에서 휙 하니 시계를 뺏어 들었다.
그러곤 못 믿겠다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뜨곤 다시 시각을 확인한 뒤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8시 13분…….”
“네.”
“……늦었네.”
“늦었어요.”
내 말이 바로 그거라고 수현이 재차 강조하자 뇌에 과부하가 온 듯 그 상태로 얼어붙어 있던 현규가 바로 몇 초 후 튕기듯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곤 곧장 수현을 안아 들고 욕실로 달려간다.
“어? 형 먼저 샤워…….”
……하세요, 라는 수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미 두 사람은 욕실에 도착해 있었다.
형 빠르네요, 라고 말하려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그럴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욕조 안에 수현을 던져 넣은 현규는 곧장 수현을 씻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본인도 샤워를 하는 모습에 수현이 멍청하게 “어, 어, 어어…….”라고 말을 더듬는 사이 어느새 수현의 머리까지 감긴 현규는 배스 가운을 가져와 입힌 뒤 다시 수현을 둘러메고 나가 파우더룸 앞에 섰다.
그와 거의 동시에 수현의 머리와 본인의 머리를 동시에 말리는 모습에 수현은 감탄했다.
두 사람이 샤워하는 데 겨우 7분 걸렸다. 거기다 머리도 잘 말린다.
“형, 이 다급한 상황에 이런 걸 묻기는 좀 죄송하지만 혹시 개 키우신 적 있어요?”
“말라뮤트, 사모예드, 레트리버, 보더콜리 등등.”
“그렇게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