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160)

“얘기한 적 없나? 우리 어머니 유일한 취미가 유기견 임시 보호라고. 그래서 우리 집은 365일 개판이야. 그것도 주로 입양 안 되는 대형견들만 데려와서 아예 개들만 따로 돌보는 사람들도 고용해 놨어. 1층에 개들 침실도 따로 있고.”

그러다 집에 눌러앉은 개들도 많다며 부지런히 머리를 말려 주는 현규의 손길에 수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쩐지…….”

“왜?”

“목욕시켜 주고 털 말려 주는 스킬이 보통이 아니라서요.”

한순간 개가 된 기분이었다고 수현이 그루밍 당한 소감을 말하자 현규가 웃는다.

“비슷하긴 하네.”

“애 잘 키우시겠어요.”

“그건 보증할게.”

그러니 애는 나한테 맡기라며 수현의 머리통에 입을 맞춘 현규는 수현의 머리가 다 마른 걸 확인한 뒤 드라이어를 내려놨다.

“이제 옷 입자.”

방금 말한 대로 진짜 서너 살짜리 아이를 돌보듯 수현을 드레스룸으로 끌고 간 현규는 차곡차곡 수현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속옷부터 시작해 이너로 입을 긴소매 티셔츠와 검은색 조거팬츠, 그리고 검은색의 기모 후드티까지.

본인의 손으로 완벽한 바퀴벌레 룩을 완성한 현규는 그 뒤에 본인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양복을 고를 시간도 없어 대충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드레스셔츠와 양복, 그리고 넥타이를 꺼내 걸치는 사이 수현은 유독 눈에 띄는 회색 트렌치코트를 꺼내 현규에게 건넸다.

넥타이핀까지 꽂은 뒤 코트를 받아 든 현규는 고맙다는 말을 대신해 수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그대로 수현과 함께 방을 나서며 말을 건넸다.

“휴대폰하고 사원증 챙겨.”

“네.”

가방은 회사에 두고 온 채라 일단 현관 앞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들을 발굴해 각자의 사원증과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10분 남았어요.”

보통은 8시 20분경에는 집을 나서 회사로 가 느긋하게 커피를 사 들고 잠깐 대화를 하다 들어가는데 오늘은 커피도 사치다.

“나가자.”

각자 운동화와 구두를 신은 채 집을 나서 거의 달리듯 엘리베이터로 향해 가는데, 막 엘리베이터의 계기판 숫자가 ‘18’에서 멈춘 걸 본 현규는 눈 깜짝할 새 5미터 정도를 달려가 하행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17층에 내려온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대박…….”

순발력과 반사신경이라는 걸 장착해 본 적이 없는 수현은 현규의 초인적인 반사신경에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형, 빠르시네요.”

나 목욕시킬 때도 내가 하는 것보다 빠르더니, ‘빠릿빠릿’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현규는.

“네가 느린 거야.”

“저도 느리진 않아요.”

판단까지 오래 걸려서 그렇지, 라고 중얼거리는 사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엘리베이터 안은 이미 만원이었다.

들어갈 틈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현규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수현을 밀어 넣었다.

양해를 구하며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붙어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현규를 본 수현은 집에서 했던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삼촌이 애는 빠릿빠릿해야 잘 본다고 했는데 형은 진짜 애 잘 키우시겠어요.”

애가 아무리 아침에 유치원 가기 싫다고 땡깡을 부려도, 형이 직접 씻기고 입히고 안아서 데려가면 학교 보낼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수현은 안도했다.

사실 집안 DNA로 보아 아이가 생기면 가장 걱정인 게 그 부분이었는데 거기는 확실히 해결됐다. 현규라면 애 서넛 정도는 한 번에 안아 들고 학교로 달려가 처넣을 것 같다.

마치 럭비 경기에서 쿼터백이 공을 안고 트라이(Try)를 하듯.

빠르고 정확하게.

아직 임신도 안 했는데 벌써 애 학교 보낼 걱정을 하던 수현이 안심하는 모습에 현규는 뭘 그리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거만하게 웃었다.

“어차피 네가 애를 잘 볼 건 기대도 안 하니, 키우는 건 내가 다 할 거야.”

“형이요?”

“응. 베이비시터들도 당연히 준비하겠지만 필요한 건 내가 다 할 테니 넌 낳기만 하면 돼. 괜히 고생할 필요 없어. 그런 허드렛일은 원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거야.”

“그럼, 진짜 다섯 명 낳아도 돼요?”

“축구팀 만들어도 돼.”

내가 열한 명 못 키우겠냐며 현규는 수현의 앞머리를 다시 앞으로 빗어 내렸다. 필사적으로 이마와 눈을 가리려는 그의 손길에 수현이 인상을 쓴다.

“형, 눈 찔러요.”

“이 길이면 안 찔려. 그리고 오늘부터 열심히 콩 먹고 빨리 머리 길어서 눈 가리고 이마 가려.”

“왜요?”

“눈이 너무 예뻐서 안 돼.”

장난 같은 말을 진지하게 하며, 현규는 툭 하니 삐져나온 수현의 이마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어쩌면 이렇게 짱돌같이 생겼을까, 라며.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은 그 손길에 수현은 괜히 이마를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현규의 등에 가려진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른 채.

수현과 현규에게만 행복한 출근길이었다.

“와, 아슬아슬하겠어요.”

정확히 집을 나와서 엘리베이터까지 7분. 법적 출근 시각까지는 이제 3분 남은 상태였다.

오늘따라 오피스텔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멈추는 바람에 회사 엘리베이터 앞까지 7분이나 걸렸다.

아슬아슬한 시간대인 탓에 엘리베이터 앞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틈에서 가장 빨리 움직이는 기기 앞에 선 현규는 수현의 후드를 매만져 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만 오면 되니 시간 그만 봐. 시간 보고 있는다고 엘리베이터가 빨리 오진 않으니까.”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 최고속도로 달려왔으니까. 비록 20미터라도.

19층까지 걸어 올라갈 게 아닌 이상 이제부터 지각이냐 아니냐는 기기의 속도와 타이밍에 달려 있다.

“오늘 점심은 어떻게 할래?”

“형은요?”

“난 오늘도 미팅.”

“그럼, 전 오늘 윤 팀장님하고 먹을게요.”

“맛있는 거 사 먹어. 너무 만두만 먹지 말고. 아, 그리고 네 카드 곧 나올 거야.”

“카드요?”

“카드부터 바꿔야지. 그리고 앞으로 옷도 내 쇼퍼가 준비할 거야.”

그러니 앞으로 해준 형에게 SOS 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건.

“어제 옷 많이 샀는데요.”

그러지 않아도 어제 엄청 사서 오늘 내로 옷들이 도착할 텐데, 여기서 더 사면 드레스룸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수현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현규를 바라보자 현규가 살짝 인상을 쓴다.

해준이 고른 옷이라면 아마 아주 마음에 쏙 들 거다.

지금까지 수현이 입은 옷 중 마음에 들었던 건 전부 해준 형 작품이었으니까.

그래서 기분 나쁘다.

해준 형과 취향이 겹치는 게.

“공간을 확보해 봐야지. 어차피 얼마 안 가 이사할 거니까.”

“왜요?”

이 편한 집을 두고 왜, 라는 듯 수현이 충격받은 얼굴을 하자 현규가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조곤조곤 달래 준다.

“임신하면 어차피 옮겨야 돼. 오피스텔은 일반 주택과 구조가 달라. 사무실을 겸하는 곳이라 소음에 취약해. 그런 곳에서 아기를 키우는 건 이웃에 민폐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수현도 동의하지만 회사에서 집이 멀어지는 건 또 싫었다.

“여기 집 구하느라 힘들었는데…….”

이제 또 차로 출퇴근해야 하나,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짓던 수현은 손에 쥔 휴대폰에서 울려온 알림에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별일 없지?]

보통 용건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먼저 말을 하는 해준인데, 왜인지 그답지 않게 굉장히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그게 의아해 수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무슨 문제 있냐는 현규의 물음에 수현이 그에게 메시지를 보여 준다.

“……해준 형?”

상대 이름이 ‘삼촌♡’이라고 적혀 있는 게 거슬리긴 했지만 현규는 그 부분은 너그럽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이 메시지가 왜?”

“삼촌은 이런 메시지 안 보내거든요. 용건 있으면 먼저 말하는데…….”

수현은 바로 어제도 통화했는데, 라며 의아해했지만 해준의 용건이 뭔지 현규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마 어제 자신이 제대로 고백을 했냐, 안 했느냐 하는 부분을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보내고 점심시간에 전화드려.”

“네. 그럴게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수현이 열심히 답장을 보내는 사이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다행히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은 한산했다.

어차피 지각은 확정이라 현규는 느긋하게 수현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그러곤 어깨를 안아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자, 자. 저도 들어갑시다. 엘리베이터 왔네요.”

커플 사이에 낀 눈치 없는 인간은, 윤 팀장이었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일행인 척 두 사람의 틈바귀에서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윤 팀장은 그 안에서도 떡하니 두 사람 사이의 국경처럼 우뚝 섰다.

그게 거슬린 듯 현규는 인상을 쓴 채 그를 내려다봤지만 윤 팀장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수현도 신경 쓰지 않았다.

“팀장님도 지금 오셨어요?”

“아니, 출근부 찍고 커피 사러 내려왔지. 이 대리는 오늘 아슬아슬하네?”

벌써 9시 넘었다며, 윤 팀장이 시계를 확인한다.

수현 역시 정시 출근은 포기한 상태라 느긋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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