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 잤어요.”
“원래 학교 다닐 때도 보면 제일 집이랑 가까운 애들이 지각하더라고.”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버티고 싶어서 근처로 이사 온 거거든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12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닫힌다.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이 완전히 한산해졌다. 세 사람을 포함해 여섯 명만 남은 채였다.
“수현아, 이리…….”
윤 팀장을 가운데 둔 채 나란히 서 있던 현규가 수현을 잡아당기려는데 윤 팀장이 그 말을 불같이 끊어 낸다.
“이 대리, 오늘 구내식당 점심 고등어 조림이던데 같이 구내식당 갈래?”
“어? 갈래요. 생선 먹고 싶었어요.”
“그래. 그리고 내가 어제 부탁한 서류는?”
“오후에 다 넘겼잖아요.”
“아, 그랬지? 이 대리 서류 정리 잘해서 좋아.”
어쩐지 의식의 흐름대로 헛소리를 하는 것 같은 윤 팀장을 현규가 의심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는 사이 수현이 막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며 무심히 중얼거린다.
“팀장님이 너무 못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생 나랑 일하자, 이 대리.”
“싫어요.”
딱 잘라 수현이 거절한 순간 드디어 19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이 대리, 내리자.”
“어? 어, 네…… 형, 이따 전화 기다릴게요.”
얼결에 윤 팀장을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수현이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현규 역시 눈짓으로 인사를 받는다.
그리고 그사이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확인한 윤 팀장은 재빨리 수현의 손목을 잡아끌고 또 서버실로 향했다.
“아, 왜요?”
“이리 와 봐.”
“왜요? 저 늦어요.”
“이미 늦었어. 2분 늦으나 10분 늦으나지.”
지각인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9시 2분에 들어가는 거랑 9시 10분에 들어가는 건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데 수현을 끌고 서버실로 들어선 윤 팀장이 수현의 휴대폰을 턱짓으로 가리킨다.
“이 대리, 내가 보낸 메시지 확인 안 했지?”
“메시지요?”
“그래. 어젯밤에 보낸 거.”
어젯밤이라면 휴대폰이 현관에서 굴러다닐 때니 확인했을 리가 없다.
오늘 아침에는 눈뜨자마자 나오느라 바빴고. 솔직히 확인하기 귀찮아서 안 한 것도 있지만…….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내가 보낸 메시지 확인해 봐.”
“그냥 말로 하세요.”
“거기 URL을 눌러 보라고.”
커피를 마시며 그냥 말 좀 들으라고 윤 팀장이 혀를 차자 수현이 얌전히 메시지 창을 찾는다.
그러곤 곧 메시지 창에 올라온 주소를 누르자 곧장 사내 게시판으로 연결된다.
사내 연애 금지 조항 만들어 주세요.
21세기에 사내 연애 금지라니, 노조에서 알면 회사가 한바탕 뒤집히고도 남을 대담한 수위의 제목에 수현은 신기해하며 그 글을 읽기 시작했다.
과격한 제목이 다들 놀라셨을 걸 알지만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게, 누구 얘기인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최근 사내 부부 한 쌍이 사내에서 수시로 애정 행각을 할 뿐 아니라 회사 근방에서도 과한 스킨십을 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습니다.
사내 연애 금지 조항이 비인도적이고 반인권적인 사칙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권 문제를 이유로 풍기 문란한 행위를 좌시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내 분위기뿐 아니라 회사 밖에서도 튀는 행동을 해 회사 품위에도 지장을 주고 있으니까요.
사실 사내 연애 금지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내 연애 행각 금지 조항이라도 만들어 주십시오.
진짜 내가 짜증이 나서 못 살겠다는 듯한 말투의 글을 확인한 수현은 고개를 들어 윤 팀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검지로 본인을 가리켰다.
이거 내 얘기냐고.
그러자 곧 윤 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얘기 맞는다고.
“어…….”
지난주에 발정기가 와 현규 형에게 안겨 돌아갔던 일은 그나마 근무 시간이라 많이 못 봐 다행이었는데 어제는 퇴근길이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을 테니 이런 글이 올라올 만도 하다.
“이 대리, 이러다 강 팀장하고 셀럽 되겠어. 사내 바퀴벌레 진상 부부로.”
이미 셀럽은 셀럽인가, 라고 중얼거린 윤 팀장이 커피를 마시는 사이, 수현은 댓글을 확인했다.
└이거, 진짜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 부부는 좀 심합니다. 제가 급식 때부터 교내 커플 사내 커플 많이 봤지만 이렇게 눈치 안 보는 커플은 처음이에요. 어떻게 중학생들보다 더할 수 있죠?
└전 이 커플 키스하는 것만 두 번 봤어요. 제가 그럴 때만 보는 건지 아니면 항상 그러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지난번에 지나가다 보니 탕비실에서 키스하고 있더라고요. 좀 작작했으면 좋겠어요. 최대 주주 커플이라고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닌가요?
└저도 어제 이 두 사람 쪽쪽거리면서 가는 거 봤어요. 안구 테러 좀 작작했으면.
└전 왜 한 번도 못 봤죠? 저랑 안구 공유 좀.
두 사람의 과한 스킨십과 애정 행각을 지탄하는 수많은 댓글을 본 수현은 우리가 그렇게 스킨십을 많이 했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니까…… 탕비실에서도 한 적 있고 수면실에서도 한 적 있고 엘리베이터에서도 한 적 있으니까…….
……많이 했다.
그럴 만하다.
지금에야 말 나온 것도 대단한 거다.
“좀 주의해야겠네요.”
“해야지. 이러다 진짜 감사팀에 신고 들어가겠어.”
“감사팀이요?”
“응.”
“이런 것도 감사팀이 관리해요?”
“영업팀 오 과장님 불륜하다 회사에 신고 들어와서 품위 유지 문제로 좌천했잖아.”
“……좌천한 게 그 이유였어요?”
“정확한 핑계는 미묘한 리베이트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나는 거래였지만, 실제로는 와이프가 회사 찾아와서 오 과장 머리채 잡는 바람에 다 들켜서 보낸 거지. 그때 그 와이프 대단했어. 대표님도 있는 회의실까지 찾아와서 사진 뿌리고 머리채 잡았거든.”
“저런, 대표님도 많이 놀라셨겠네요.”
바로 그게 본인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의 모습이었을 테니까, 라고 수현이 중얼거린 순간 윤 팀장이 마시던 커피를 뿜는다.
스프레이처럼 사방으로 튄 커피에 수현이 인상을 쓴다.
“팀장님, 제가 저번부터 얘기하려고 했는데 서버실에서 커피 마시지 마세요.”
여기 식음료 금지인 거 모르냐고 수현이 잔소리하자 윤 팀장이 손수건을 꺼내 넥타이와 양복에 튄 커피를 닦으며 재미있다는 듯 말을 건넨다.
“이 대리는 시부한테도 할 말 다 하나 보네.”
역시 재벌가 막내, 라며 윤 팀장이 내뱉는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에 수현이 놀라 되묻는다.
“하면 안 돼요?”
“보통은 안 하지.”
“……그래요? 그럼 그것도 조심해야겠네요.”
마침 어제 말조심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후라 수현도 이번엔 진짜 뇌에 필터링을 장착해 볼 생각이었다.
뇌가 안 되면 혀에라도.
입이 모든 화의 근원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원문에 격렬하게 동의하는 댓글들을 훑어보던 중 뜻밖의 소수 의견이 눈에 들어왔다.
└뭐 이런 걸로 글까지 쓰시나? 어제 이혼설 도니 아닌 척하느라 그러는 것 같던데. 둘이 정략결혼인 거 알 사람 다 알잖아요.
“흐응…….”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수현이 신기한 듯 댓글을 읽어 내려가던 사이 옷에 튄 커피를 손수건으로 다 닦은 윤 팀장이 말을 돌린다.
“그래도 그 덕에 이혼설은 쏙 들어갔어. 대신 임신설이 돌더라?”
“……네?”
갑자기 웬 임신? 임신 이야기는 윤 팀장님한테밖에 안 했는데, 왜?
그런 생각에 수현이 의혹이 담긴 눈빛으로 윤 팀장을 바라보자 윤 팀장이 어깨를 으쓱한다.
“오늘의 증권가에서 임신설 도는 중이야. 이 대리 어제 카페에서 토했다며?”
“아…….”
그러고 보니 그게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