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쯤이라 꽤 많은 사람이 봤을 테고 지난주에 발정기가 왔던 걸 감안하면 임신설이 말도 안 되는 건 아니다.
다만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놀라울 뿐.
세상은 넓고 할 일 없는 사람은 많구나, 하며 수현은 사내 게시판을 빠져나왔다.
“이제 들어가야겠다. 오전 회의 시작할 시간이야.”
주간 회의가 곧 시작된다며 윤 팀장이 먼저 서버실을 빠져나가는 걸 본 수현은 바로 윤 팀장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충족감과 행복으로 가득한.
오전 회의 직후 이어진 몇 가지 서류 작업을 마무리한 수현은 마지막 작업을 끝낸 후 느긋하게 시각을 확인했다.
슬슬 점심때였다.
어차피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는 걸로 정해져 있어 고민할 것도 없으니 오늘도 점심 미팅이 있다는 현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가셨어요?]
어제와 같은 잠깐의 일탈을 기대하며 휴대폰으로 슬쩍 메시지를 보내곤 컴퓨터 화면을 보는 척하며 잠시 기다리자 곧 메시지가 도착한다.
[지금 나가. 넌?]
[전 좀 이따 점심 먹으러 나가려고요.]
[잠깐 볼까? 수면실에서.]
수현이 기대하고 있던 내용의 메시지에 막 ‘기다릴게요.’라고 쓰려는데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이 대리야…….”
내가 바로 4시간 전에 조심하라고 했냐 안 했냐, 라며 바로 뒤에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윤 팀장의 얼굴을 본 수현은 얌전히 방금까지 쓴 글자를 지웠다.
대신 아주 솔직하게 새 메시지를 적어 넣었다.
[팀장님이 안 된대요.]
그리고 그걸 윤 팀장도 봤다.
“이 대리…….”
“사실이잖아요.”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다 일러바치면 어떻게 해?”
“그럼 뭐라고 해요?”
“다른 직원들이 기다리니 안 된다고 하거나, 고등어조림은 특선이라 금방 팔리니 구내식당에 빨리 가야 한다고 하든가 해야지.”
“고등어조림은 거의 매진된 적 없는데요?”
최근 고등어를 안 먹는 사람들도 많아서, 라고 수현이 설명한 순간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 팀장님께 나중에 내가 따로 인사드린다고 전해. 우리 수현이 잘 부탁한다고.]
그 아래 웃는 이모티콘이 함께 떴지만 어쩐지 웃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형이 상당히 화가 나서 ‘이것 봐라.’ 하고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것 같은, 딱 그런 느낌의 이모티콘이었다.
“나중에 인사한다는데요, 형이?”
분명히 잘 부탁하러 인사 온다는데 왜 이렇게 등골이 서늘할까, 하며 윤 팀장은 수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밥이나 먹으러 가.”
어깨를 꽉 쥔 윤 팀장의 아귀힘이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그 힘 자체가 좀 닥치라는 의미 같았지만 수현은 그걸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뿐히 무시한 채 휴대폰만 챙겨 들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어제 산 옷은 왜 안 입어?”
“어제는 프러포즈하려고 입은 거고, 오늘은 별 필요 없어서요. 그리고 어차피 출근하는 건데요, 뭐.”
사실 어제 그 옷도 불편해서 싫었다며 복도를 걷던 수현은 울려오는 벨 소리에 주머니 안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삼촌이다. 팀장님 먼저 내려가 계세요. 저 전화 좀 받고 갈게요. 아, 전 고등어조림이요. 밥 많이.”
“빨리 내려와.”
“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해 가는 윤 팀장을 본 수현은 19층 탕비실로 향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 점심시간이지?
“응. 왜?”
- 점심은?
“지금 내려가려고. 삼촌은?”
- 나도 슬슬 나가야지. 오후에 현장 가야 해서 나가서 먹으려고.
“어디 가는데?”
- 전주.
“맛있는 데 많겠다. 그럼 내일 올라와?”
- 모레. 그보다 수현아…….
“응?”
용건이 있는 듯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뭐든 말하라고 대답했지만 답이 없다.
심란한 듯한 한숨만 돌아올 뿐이다.
- 하아…….
삼촌답지 않게 긴 한숨에 수현은 탕비실 안쪽의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 아니…… 무슨 일은 아닌데…….
“그럼?”
- ……너, 몸은 괜찮아?
“응?”
- 어디 아프지 않냐고. 몸살이나 미식거림이나…….
“아니, 전혀. 점심도 고등어조림에 밥 많이 먹을 건데?”
- 그래?
“응.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 그게…….
이번에도 역시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삼촌이 또 말을 질질 끈다.
너무나 삼촌답지 않은 분위기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긴 한숨 소리가 들린다.
- 내가 진짜……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거든.
“응?”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밖에 없어.
“뭐가?”
나밖에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고 묻는 순간 한 번 더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한숨에는 약간의 분노마저 실려 있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건가 하는 생각에 정자세로 앉아 눈만 껌뻑이고 있자, 곧 마음의 결심을 굳힌 듯 삼촌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러니까 이게…….
* * *
두근두근.
기분 좋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떠 정신없이 밥을 두 번이나 퍼먹고 고등어조림을 다 먹었는데도 양이 모자라 한 번 더 사 먹느라 팀장님한테 진짜 애 섰냐는 핀잔을 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식사를 하곤 잠깐 볼일이 있다면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디카페인 커피를 한 잔 사 들고 사무실로 돌아온 뒤에도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환하고 해사하게 미소 지은 채 미친 듯한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수현을 바라보는 직원들만 불편할 뿐.
“이 대리님…….”
“네?”
“……시스템에 문제 있는 건 아니죠?”
“아뇨. 왜요? 어디서 클레임 들어왔어요?”
“아뇨. 손이 너무 빠르셔서요…….”
보통 작업 중 아니면 그 속도 안 나오지 않냐는 직원의 물음에 수현이 문득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빠르긴 했다.
무아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