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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오후의 하늘은 오전보다 더 높고 하얗고 맑았으며 햇살은 낮고 따갑게 흐르고 있었다.
피부 위를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옥상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정자 구석에 자리 잡은 수현은 연신 휴대폰을 봤다 다시 고개를 들어 입구 쪽을 보다, 또다시 휴대폰을 내려다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해준의 전화를 받은 뒤 검색해 본 내용을 읽으면서도, 수현은 정자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1년 전 처음 이직 후 옥상에 올라왔을 때, 이런 미로 같은 정자를 왜 설치한 건가 의아했는데…… 지금 보니 제법 쓸모가 있다.
비공식적으로 월급 도둑질을 하거나 지금처럼 몰래 사람을 만나야 할 때, 아주 유용한 구조였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두근두근하는 심장 박동에 휴대폰을 보다 혹시 몰라 후드티 주머니 안에 손을 넣은 수현은 조심스럽게 그 안의 물건을 손으로 확인했다.
다행히 그 물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자리해 있었다.
혹시 흘리기라도 할까, 오는 내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왔으니 갑자기 사라졌을 리 만무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은 하이(High)한 상태였다. 굳이 말하자면 아드레날린과 도파민 과다 분비로 인해 약간 정신이 나간 상태라고 봐야 한다.
솔직히 점심시간 이후 시간이 어떻게 흐른 건지도 모르겠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기쁨과 흥분 탓에 자꾸만 엉덩이가 의자에서 뜨는 걸 막으려,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만들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신경은 오로지 한 가지에만 쏠려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벤치에 앉아는 있지만 초조함에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도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빨리 와요, 형.
빨리빨리.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서두르다 사고라도 나면 안 되니까 다시 얌전히 기다리기로 하고 검색 페이지를 확인하는데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근무 시간이라도 날씨가 좋으니 옥상에 올라오는 사람이 또 있을 수 있지만 그 소리는 자신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였다.
다급하지만 보폭이 넓어 간격이 긴 느낌을 주는, 그러면서도 요란하지 않은 구두 굽 소리에 바로 벤치에서 일어서 앞으로 나서자 왼쪽으로 구부러진 입구로 들어서는 현규 형이 보였다.
살짝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재킷은 벗어 한 팔에 걸치고, 셔츠의 소매는 걷어 올린 채인 걸로 봐서는, 급하게 달려온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형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충분히 빨리 와줬다.
그래서 인사 대신 현규의 품에 폭삭 안겨 들었다.
“오랜만이에요, 형.”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진 뒤 7시간.
겨우 7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제까지는 6시간 이상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어서인지 7시간도 길었다.
아주 오랜만에 수현을 보는 듯한 기분에 현규는 수현을 품에 안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역시나 시원하고 맑은 향이 코끝을 스쳐 폐 속 깊이까지 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냄새에 겨우 숨을 고른 현규는 수현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오래 기다렸어?”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일은?”
“저흰 이제 완전히 한가해요.”
사실은 할 일이 없어서 팀원들이 전부 주식창 아니면 게임창만 들여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지간하면 팀장님이 그러고 있을 거면 차라리 나가서 놀다 오라고 할까?
그러니 이쪽은 전혀 문제없다고 웃으며 수현이 고개를 들어 현규를 올려다보자 현규가 수현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준다.
“다행이네, 한 사람이라도 여유 있어서. 오늘도 여전히 말 더럽게 안 듣게 생겼지만.”
하지만 그런 것도 귀엽다는 듯 현규가 툭 튀어나온 이마에 입을 맞춘 순간 수현이 간지러운 듯 웃는다.
“그게 뭐예요?”
“뭐긴? 너 진짜 말 안 듣게 생겼어.”
특히 이마는 더럽게 고집 세게 생겼고 눈은 반항적이라며 현규는 한 번 더 수현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말과는 달리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그렇게 몇 번인가 수현의 이마와 눈가, 그리고 콧등에 입을 맞춘 현규는 한참 뒤에야 겨우 수현이 충전된 듯 천천히 정자 안을 돌아봤다.
“그런데, 여긴 뭐지? 완전히 사각지대인데?”
“네. 옥상 CCTV 각도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있어요. 그래서 직원들끼리 상사 죽이고 싶으면 여기서 죽이라고 만들어 놓은 거 아니냐고 했었는데…… 이제 보니 숨어서 연애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아요.”
다른 직원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 라며 수현은 어제오늘 사내 게시판을 들끓게 한 진상 커플 입장에서 이 정자의 존재 가치를 재정의했다.
사실 오전에 윤 팀장님이 앞으로는 둘만 있는 거 조심하라고 그 게시판을 보여 준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여기였다.
앞으로는 여기서 만나야지, 하고.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이대로 퇴근까지 여기 있을까?”
“팀장님이 전 퇴근 시간까지 있다가 와도 된다고 했지만 형은 내려가야 할걸요.”
그 팀은 바쁘니까, 라고 수현이 내려가긴 해야 한다고 그를 달래자 현규가 한 번 더 수현의 눈가에 입을 맞춘다.
네가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냐는 듯, 다소 거칠게.
“됐어. 휴대폰 꺼 놓으면 그만이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억지를 부리며 수현에게서 조금 떨어진 현규는 벤치 위에 들고 있던 가방과 재킷을 내려놨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수현은 후드티 주머니 안에 두 손을 넣고는 안에 있는 물건을 꼼지락거리며 매만졌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며, 시간을 끌고 있는데 뜻밖에도 현규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까, 할 말 있다며? 뭐야?”
“……네?”
“아까, 메시지에 할 말 있다고 했잖아.”
전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게 뭔지 궁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며 현규는 털썩하니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재촉하듯 수현을 응시했다.
어서 말해 달라고.
“아…… 그게요…….”
오후 내내 현규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수현은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한 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이 너무 급해 다 건너뛰고 결론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또 중간의 과정이 아쉬웠다.
과정에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기에 계속해서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던 수현은 잠시 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저기…… 아까, 점심시간에 삼촌이 전화를 했는데요…….”
“해준 형이? 왜?”
오전에 메시지가 오간 걸 봤기에 두 사람이 통화할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호응하듯 용건을 물으며, 현규는 그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라는 뜻이다.
그 손짓에 얌전히 현규의 옆에 자리 잡은 수현은 조금 긴장한 듯 주머니 속의 손을 꼼지락거리며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잠시 후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아침에 제가 삼촌 메시지가 좀 이상하다고 했잖아요. 평소에는 구체적인 용건 없이는 메시지 잘 안 보내는데, 너무 포괄적인 질문을 했다고.”
“그랬지.”
그건 이쪽 정황을 살피려는 의도였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현규는 굳이 그걸 말로 하지는 않았다.
수현이 따로 이야기를 꺼낸 거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점심때 전화해서 뜬금없이 몸은 괜찮냐고 묻더라고요. 아픈 데 없냐고.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삼촌이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꿨대요.”
“……꿈?”
노인네도 아니고 설마 꿈자리가 뒤숭숭하다고 연락한 거냐고, 샤머니즘이든 토테미즘이든 비과학적인 현상이라면 질색인 현규가 인상을 확 찌푸린 순간 수현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주 옛날에 저희 본가 뒤에 커다란 연못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비단잉어들을 엄청 많이 키웠는데 제가 어릴 때 거기에 빠진 적이 있어서 곧장 메꿔서 없앴어요. 그런데, 어제 삼촌 꿈에 그 연못이 나왔대요. 그 연못 안에서 커다란 잉어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는 광경을 보고 이 연못이 왜 또 생겼지, 하면서 내려다보는데…….”
거기까지 말한 뒤 수현은 한 템포 쉬듯 숨을 길게 내뱉었다.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인 것 같다는 생각에 현규는 수현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후원으로 흰 호랑이 한 마리랑 검은 호랑이 한 마리가 들어오더래요. 엄청 크고 무섭게 생긴 호랑이들이요. 그걸 본 삼촌이 놀라서 집으로 도망갔는데 두 마리 다 어슬렁거리면서 집에 들어오더니 막 삼촌이 나가라고 화를 내고 물건을 던져도 나가지를 않더래요. 나가기는커녕 아예 바닥에 자리 펴고 누워 자는 걸 보고 삼촌이 기가 막혀서 뭐 이렇게 뻔뻔한 호랑이들이 다 있냐고 화내다 꿈에서 깼는데…….”
거기서 말을 멈춘 수현은 주머니 안에 넣은 손을 또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이내 얼굴에 연한 홍조를 단 채 머쓱한 듯 대화를 이어 갔다.
“깨서 생각해 보니 삼촌이 도망친 데가 제 방이었대요. 분명히 1층 현관으로 들어갔는데 제가 독립할 때까지 쓰던 2층 구석 방이 나온 것도 이상한데 꿈이 너무 생생했대요. 그 호랑이들 생김새뿐 아니라 냄새까지 기억날 정도로요.”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뭔지 알 것 같은, 마치 예언 같은 예감이 드는,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기분에 현규가 완전히 몰입한 채 수현을 응시하고 있자 수현이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는다.
“그래서 삼촌이 해몽 잘하는 친구에게 연락해서 물어봤는데…… 그게 태몽이래요. 그것도 쌍둥이 태몽.”
그 부분에서 수현은 겸연쩍은 듯 시선을 피한 채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수현의 표정에 현규는 쟤를 그냥 확 잡아 먹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태어난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사실 삼촌도 믿고 싶지 않았지만 하필 도망간 곳이 제 방이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삼촌 주변에서 임신 가능성이 있는 건 저뿐이라 임신 확인해 보라고 전화했더라고요. 그래서…….”
드디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듯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수현은 주섬주섬 주머니에 있던 작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 살짝 다리를 꼬며 그 물건을 현규의 앞에 내밀었다.
“……테스트해 봤는데, 임신 맞대요.”
수현이 건넨 긴 막대 같은 물건을 건네받은 현규는 그 위에 새겨진 선명한 두 개의 줄을 확인하곤 눈을 껌벅였다.
임신 테스트기를 본 게 처음이라, 그리고 사실 지금까지 관심도 없던 터라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모든 간이 테스트 키트에는 대조 선과 검사 선이 존재하고 그중 대조 선에만 선이 생기면 음성, 대조 선과 검사 선 양쪽에 선이 생기면 양성이라고 알고 있다.
지금 수현이 내민 임신 테스트기에는 선이 두 개가 있으니까…….
“……임신이라고?”
“네.”
“……진짜, 임신이라고?”
“네. 아직 초기라 피 검사가 제일 정확하기는 한데 임신 맞을 거예요. 삼촌이 태몽까지 꿨으니까요.”
역시나 임신 소식을 알리면서도 수현은 과하게 해맑았지만 현규는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어…….”
사실, 이건 이미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 댔는데 임신이 안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 임신 자체가 놀라울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안 되면 그게 놀랍지.
수현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유명한 아동 심리학 박사가 운영한다는 유치원의 TO까지 확보해 놓은 채였다, 현규는.
물론, 하나만 확보해 놔서 하나를 더 신청해야겠지만 어쨌든 임신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아니, 놀랍지 않아야 했다.
“진짜, 임신, 맞다고?”
하지만 머리로 예측하고 생각하는 것과 현실에서 직접 겪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