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158/160)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임신 테스트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순간의 기분은 그저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와는 전혀 달랐다.

현실에서 ‘임신’이라는 단어가 주는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임신 사실을 직접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다른데, 병원에서 직접 초음파를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어쩌면 그때는 기절할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도 좀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본인이 멍청하고 없어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같은 질문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현은 이번에도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평소와 달리 아주 야무지고 단호하게.

“네.”

그걸로 알았다.

그래, 임신은 확실하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난제 한 가지는…….

“……거기다, 쌍둥이라고?”

임신 테스트기를 손에 든 채 혹시나 해 또 한 번 묻자 수현이 그 부분에서는 살짝 말을 끈다.

“그건 아직은 몰라요. 쌍둥이 태몽이라고 하지만 태몽에 과학적인 근거는 없으니까요. 그건 초음파로 확인해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임신은 확실할 거예요.”

테스트기에서도 확실하게 양성이 나왔으니까, 라고 수현이 방긋 웃는 순간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선 현규는 벤치에 앉아 있던 수현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곤 수현이 마치 아주 어린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아 든 채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잘했어. 수고했어.”

“수고는 저보다 형이 했죠.”

안에 싸느라고, 라며 수현은 지나치게 높아진 시야에 어지러운 듯 현규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사이에도 현규는 정신없이 수현의 뺨과 이마, 그리고 목덜미와 머리통에까지 키스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 순간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처럼.

위협하는 것도, 한심해하는 것도, 기막혀하는 것도 아닌, 오롯이 순수한 기쁨으로만 가득 찬 그의 웃음에 수현도 현규의 목을 끌어안은 채 뺨을 비벼 댔다.

“사실은 아까 점심시간에 테스트기 사다 해보고 알았는데 형한테 제일 먼저 알려 주려고 기다렸어요.”

수현치고는 꽤나 기특한 짓에 현규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다른 사람은 아직 몰라?”

“네.”

“해준 형도?”

“네. 삼촌한테도 아직 얘기 안 했어요. 형한테 먼저 얘기하려고요.”

“우리 수현이, 많이 똑똑해졌네.”

사실 내심 얘를 어떻게 데리고 살아야 하나 걱정했는데, 수현도 확실히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대견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고 파격적으로.

말이 통할 듯 말 듯 안 통하는 건 둘째치고 눈치도 없는 애가 고집도 세 얘랑 같이 살려면 생불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다행히도 수현은 학습 능력만은 좋았다.

역시 신은 한 인간에게 모든 걸 주시진 않지만 부족한 부분을 극복할 수 있는 무기만은 꼭 챙겨 주신다는데, 그게 맞는 말 같았다.

그 짧은 사이 수현은 많이 성장해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물론, 눈치는 여전히 없지만.

“진짜 쌍둥이였으면 좋겠네. 딱 너 닮은 아기들로.”

수현이를 꼭 닮은 쌍둥이라니…… 키우면서 속은 두 배, 아니 세 배로 터지겠지만 그 아이 둘이 있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몽글몽글해지며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어느새 자신의 휴대폰 사진첩을 꽉 채운 수현의 어린 시절 사진만 봐도 환장할 것 같은데 실사를 바로 1열에서 직관하면 진짜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얘는 나 환장하게 하려고 태어난 애 같다.

“아, 형. 그리고 중요한 얘기가 하나 더 있어요.”

현규가 흥분을 제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여기저기 입을 맞추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수현은 용하게 방금 추가된 용건을 잊지 않고 꺼냈다.

보기 드물게도, 아주 똑 부러지는 수현의 태도에 현규는 뭐든 말만 하라는 듯 너그럽게 말을 던졌다.

“얘기해.”

“우리 결혼식 다음 주래요.”

조금의 맥락도 없이 뜬금없이 나온 결혼 이야기에 현규는 당황해 움직임을 뚝 하니 멈췄다.

이건 또, 놀라웠다.

아버지와 이 대표님이 결혼 이야기를 진행한다니 당연히 매일 싸우느라 지지부진하다 곧 너 같은 거랑 사돈 안 한다고 뒤엎고 끝낼 줄 알았는데 또 언제 결혼식 날짜가 잡힌 거냐?

이놈의 영감탱이들은 진짜 도움이 안 된다.

싸우지 말라고 할 때는 매일 핏대 세우고 싸우느라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더니, 막상 피 터지게 싸우라고 마우스피스 물려주고 글로브에 헤드기어까지 끼워 링에 올려놓으니 왜 안 싸우는 건데?

“……결혼?”

“네. 방금 큰형한테 전화 왔어요. 우리 다음 주 토요일 오후 1시에 결혼식 한대요. 장소는 우리 양평 수련원 야외고요.”

거기 웨딩 촬영과 드라마 촬영 장소로 유명한 자작나무 숲이 있는데 아마 거기일 거라고 수현이 설명하자 그대로 잠시 인상을 쓰고 있던 현규가 수현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러곤 수현을 마주 보고 선 채 묻는다.

“진원 형이 그래?”

“네.”

“확실해?”

“네. 일단 형 말로는요.”

“그걸로는 아직 모르지.”

“네?”

“언제 또 싸워서 엎어질지 모르니까.”

확실히 그건 그렇다고 수현도 동의했다.

지금 결혼을 공동 기획하는 건 아버지와 강 대표님이고 행동 대장이 큰형인 셈인데…….

지구상에 존재하는 포유류 중 제일 제멋대로인 1등, 2등, 3등이 뭉쳤으니 각자 할 말만 하고 각자 하고 싶은 대로만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잠깐 합의되어 청첩장까지 찍었다고 그대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지금은 몰라도 당장 내일이라도 얼마든지 엎어질 수도 있어. 그리고 안 엎어지더라도 우리가 안 가면 돼.”

내가 그딴 결혼식에 가겠냐고 혀를 차는 현규에게, 수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짜 우리 결혼식에 안 가실 거예요?”

“어차피 우리 핑계로 성대하게 돈 자랑 하시려는 게 뻔한데 뭐 하러? 피로연이나 근사하게 하시라고 해. 우리 아버지랑 이 대표님이랑.”

둘이 사돈 된 기념으로 손 꼭 잡고 식장 들어가면 되겠네, 라며 현규는 굉장히 시니컬하게 반응했다.

사실 결혼식까지의 과정은 귀찮고 번거롭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부라는 선언을 하는 만큼, 결혼식 자체에 대해서는 현규는 별 불만 없었다.

오히려 따뜻한 봄쯤 좋은 날을 잡아 가족끼리 모여 결혼식을 할 계획도, 나름 세우고 있었다.

물론, 그 자리에 아버지는 없겠지만.

다만 마음에 안 드는 건 이 결혼을 진행하는 주체가 하필 아버지 두 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두 분이 식을 기획할 경우, 이 결혼의 메인은 현규와 수현의 결혼이 아니라 두 어른이 사돈지간이 된 사연이 될 게 뻔했다.

일단 그 두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관심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이유가 첫 번째, 그리고 그들이 초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사돈이 되었는가에만 관심 있을 이들이라는 이유가 두 번째였다.

아마 그날 식장의 하객 대부분은 다들 두 사람이 어떤 얼굴로 식장에 앉아 있나를 궁금해하며 그쪽만 바라볼 게 뻔했다.

다른 곳도 아닌, 본인의 결혼식장에서 들러리로 전락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현규는.

그리고 그 생각에는 수현도 동의했다.

하지만 동의하는 건 동의하는 거고…….

“와…… 형 인성…….”

이미 현규와 한 번 대화했을 때도 현규는 어른들이 하시는 대로 내버려 두되, 결혼식에 참석할 생각은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으면서도 우리 이름으로 청첩장이 뿌려질 텐데 과연 결혼식에 참석 안 할 수 있을까 의아해했는데, 현규 형이라면 안 할 것 같다.

참석이 뭐냐? 수틀리면 야외 결혼식장에 살수차를 불러 깽판을 부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어른들보다 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현규 형의 사고방식에 새삼 감탄하자 현규 형이 싱긋 웃는다.

또 까분다는 미소였다.

이것도 오랜만이다.

“내 인성이 뭐라고?”

그다음 말도 할 자신 있으면 얼마든지 지껄여 보라는 현규의 살벌한 눈빛에, 수현은 얌전히 말을 돌렸다.

“……멋있다고요. 저도 동물원 원숭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현규의 말대로 우리 결혼식에 올 사람들의 관심사는 인맥 아니면 아버지들이 어떤 썩은 얼굴로 결혼식을 지켜볼까, 라는 걸 텐데 거기에 장단 맞춰 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주인공들이 없어도 결혼식은 잘 치러질 거다.

그분들이라면 어떻게든 한다.

“그래, 그러니까 상관하지 마. 애초에 다음 주 결혼식을 당사자들에게 오늘 통보하는 것 자체가…….”

결혼식에 오지 말라는 말과 뭐가 다르냐고 하려던 현규가 순간 뭔가 떠오른 듯 말을 멈춘다. 그러곤 작게 감탄사는 내뱉는다.

“아…….”

“왜요?”

뭐 문제 있냐는 물음에 현규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기가 찬다는 느낌과 꼴 좋다는 느낌이 고루고루 섞인, 비웃음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그날은 결혼식 못 치를걸.”

아니, 그래도 진행하려나? 그럼 그거 나름대로 재밌긴 하겠다고 현규가 계속해서 웃음을 흘리자 수현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되묻는다.

“왜요?”

“다음 주말에 태풍 소식 있어.”

그러고 보니 아까 재난 문자가 왔던 것도 같다. 올해 들어 최대 규모의 태풍이 한반도를 향해 북상 중이라고.

현규 형의 메시지만 기다리느라 재난 문자고 뭐고 대충 보고 넘겼는데 그런 내용이 있긴 했다.

그런데 자신이야 임신 때문에 정신이 나가 태풍 소식을 몰랐다지만 진원 형은 왜 모른 건데…….

“어쨌든…… 그럼, 다음 주 결혼식은 취소되겠네요?”

“아마도.”

지금쯤이면 큰형도 태풍 소식을 들었을 테니 새 일정을 짜고 있을 거다.

“결혼이 미뤄지면 11월인데…… 어차피 그때쯤 아버지는 알래스카로 날아갈 테니 아마 더 이상 시끄럽지는 않을 거야.”

“……알래스카요?”

“응. 드디어 할아버지한테 허락받았어. 해경이까지 나타나니 할아버지도 더는 못 버티시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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