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160)

해경이 그 난리를 치며 인터뷰까지 했는데 버티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다고 현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나하나 귀찮은 것들이 정리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미세먼지나 방사능 같은 것들은 주변에서 모조리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백해경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 형도 도움이 될 때가 있네요.”

“이럴 때라도 도움이 돼야지. 그 녀석의 존재 가치는 오로지 그거 하나뿐이니까.”

그러려고 내가 착신 거부까지 풀었는데 그 정도 가치도 못 하면 내가 손해라고 현규가 한숨을 내쉬자 수현이 뭔가 떠오른 듯 묻는다.

“어, 그럼, 혹시…… 그 얼마 전에 인터뷰했다던 대표님 서자가 설마…….”

“맞아. 백해경.”

그래서 어제 인터뷰니 뭐니 했던 거구나, 하고 수현은 납득했다.

자꾸 인터뷰까지 해 줬는데, 라고 해서 연예인인가 했었다, 잠깐.

“그럼, 대표님 진짜 알래스카로 가시는 거예요?”

“응. 거긴 오메가가 드무니 더 이상 이복동생들이 늘지는 않겠지.”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부분도 그거고, 라며 현규가 태연하게 답하자 수현은 조금 아쉬운 듯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강 대표님 알래스카 가시면 우리 아버지 심심해하시겠어요.”

그간 강 대표님하고 싸우는 낙으로 사셨는데 강 대표님 멀리 가시면 적적하시겠다고 수현이 걱정하자 현규가 걱정 말라는 듯 수현을 달래준다.

“손자들 생기면 심심하실 틈도 없으실걸.”

그것도 한 번에 둘이나, 라며 현규가 장하다고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수현이 조금 민망해한다.

“그건 아직 몰라요.”

“맞을 거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럴까요?”

“응. 그럼, 이제 뭐든 다 두 개씩 사야겠지?”

침대도 두 개, 배냇저고리도 두 개, 신발도 두 개, 유모차도 두 개.

뭐든 작고 귀여운 것들이 나란히 두 개씩 놓여있는, 상상만 해도 심장이 간질거리는 풍경에 수현의 허리를 끌어당긴 현규는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눈빛으로 수현을 응시했다.

사실 어떤 것들보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게 수현이었다.

그래, 여전히 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좀 걱정스럽기도 했다.

“임신은 좋은 소식이지만…… 좀 걱정은 되네. 애가 애를 낳게 생겼으니.”

그 말에 수현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간지럽게 웃는다.

“저 이제 스물여덟이에요, 형.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아요.”

이제 20대 초반도 아니라 후반에, 내일모레면 서른이라고 환하게 웃는 수현은 본인의 말과는 달리 여전히 앳된 고등학생 같아 보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수현이 딱 제 나이로 보이겠지만 현규의 눈에 수현은 언제나 고등학교 시절 그 얼굴로 보였다.

그건 아마 앞으로 나이가 더 들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죽는 그날까지도 자신에게 수현은 교복 입고 핫바 물고 도망가던, 그 모습으로만 보일 거다.

그래서 쿨하게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미친 사람 취급을 해도 어쩔 수 없지. 가끔 내가 좀 미치는 건 사실이니까.”

누구 때문에, 라고 덧붙이며 현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수현을 응시했다.

뜨거운 눈빛으로 그 ‘누구’가 누군지 아냐고 수현을 다그치듯 바라보는 현규의 시선에 수현이 놀라 눈을 번쩍 뜬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형 가끔 좀 미친 것 같아요.”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신기해하며 수현은 뚫어져라 현규의 눈을 바라봤다.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 반응에 현규는 쓰게 웃으며 수현의 뺨을 세게 잡아당겼다.

수현은 여전히 눈치가 없고 여전히 막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었다.

“여전히 입이 자유분방하네.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저 방금 많이 생각하고 말한 건데요?”

말할까 말까 3초나 망설였다고 수현은 자신 있게 덧붙였다.

말조심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몸으로 깨우친 터라, 잠깐 짬이 날 때 막말을 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글들을 찾아봤는데 다들 말하기 전에 딱 3초만 참고 생각한 뒤에 하라고 하기에 딱 3초 동안 생각하긴 했다.

별 효과가 없어서 그렇지.

“……생각을 한 거라고? 그게?”

“네.”

그런데도 부족한 거냐고 묻는 듯한 수현의 눈빛에 현규는 천천히 수현의 뺨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차분한 시선으로 수현을 내려다봤다.

방금 그게 진짜 생각하고 말한 거라면 수현의 거침없는 발언의 문제는 필터링이 아니다.

얘는 생각의 기준 자체가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럼, 그냥 생각을 하지 마. 세상에 너처럼 웃으면서 막말하는 녀석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아무리 피하려 해도 자신과 결혼한 이상 수현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아버지와 부딪쳐야 한다. 물론, 그런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지만 영원히 아버지를 피할 수는 없다.

한국은 너무 좁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녀석처럼 해맑게 막말을 퍼붓는 쪽이 낫다, 아버지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그런 의미에서 수현의 이 대책 없이 해맑은 성격은 나쁘지 않다.

속은 터지겠지만.

“그런데요…… 진짜 형이 저 볼 때 눈빛 보면 좀 돈 것 같아요. 그래서 어릴 때는 진짜 무서웠어요. 사실 지금도 좀 무섭기는 해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이라는 말을 목 안으로 삼키며 수현은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현규가 화를 낼까 걱정하는 그 눈빛에 현규는 쓰게 웃고 말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현규도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전혀 몰랐지만 아마 그때 이미 맛있겠다는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봤던 것 같다.

그것도 잔뜩 허기진 얼굴로.

수현이 비록 눈치는 없지만 생존 본능만은 누구 못지않은 녀석이다 보니 그때 잡히면 먹힌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도망 다녔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걸 보면 어디서든 잘 살아남을 녀석 같아 안심이 됐다.

어리바리하고 어딘지 많이 모자라고 어수룩하지만 쓸데없는 부분에서는 아주 야무지다.

귀여운 녀석이 야무지기까지 한 건 어려운데, 그 어려운 일을 수현이 해냈다.

“지금도 많이 무서워?”

“지금은 조금요. 그런데 도망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에요. 형이 나 좋아하는 거 아니까.”

“그래.”

내가 널 아주 좋아하지, 그래서 이 고생이지, 라고 한탄하며 현규는 수현을 품에 안았다. 그러곤 등을 다독이며 물었다.

“몸은 괜찮아? 몸살도 임신 때문에 온 것 같았는데. 임신 초기에는 몸살하고 아랫배의 통증이 있다고 하던데?”

“괜찮아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지럽거나 속이 메슥거리는 건?”

“전혀요. 아까 고등어조림에 밥 두 그릇 받아왔는데 그거 다 먹고 고등어조림 하나 더 주문해서 먹었어요. 그래서 윤 팀장님이 애 섰냐고 놀렸는데, 애 선 게 맞더라고요.”

“……윤 팀장님이 그래?”

“네.”

“조만간에 윤 팀장님하고 술 한잔해야겠네.”

아무리 애가 게걸스럽게 특식을 두 번이나 주문해 먹었다고 해도 감히 우리 애한테 그딴 헛소리를 하냐고, 완전히 수현의 보호자로 각성한 현규가 싱긋 웃어 보이자 여전히 눈치 없는 수현이 눈을 반짝인다.

“어? 그럼, 저도요!”

곱창에 소주, 라며 수현은 재빨리 안주까지 지정했지만 현규는 수현의 의견을 단칼에 썰어 냈다.

“넌, 안 돼.”

“왜요?”

물음과 동시에 왜일 것 같냐, 라는 눈빛이 날아들었다.

순간 수현은 아차 했다.

맞다. 나 임신했지, 라고.

“임신 중에는 술도 마시면 안 되는 거예요?”

“와인 한 잔 정도만 가능해.”

“아……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애 낳기 싫어하셨나 봐요.”

“응?”

“술 엄청 좋아하시거든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 촉발된 원인을, 수현은 그제야 알아챘다.

다른 건 몰라도 술을 못 마시게 했다면 어머니가 참으셨을 리가 없다.

그나마 갈비만 나간 게 천운이었다, 아버지에게는.

“인사드릴 때 좋은 술 갖고 가야겠네. 그리고, 병원은 예약했어?”

임신 테스트기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으니 산부인과에 진료 예약은 했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현규의 질문에 수현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병원이라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어…… 아뇨. 형한테 말할 생각만 하느라 다른 건 생각 안 했어요.”

“잘했어. 병원은 어차피 나랑 같이 가야 하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다니던 병원으로 가는 게 편하지? 오늘도 정시 퇴근이지? 6시?”

역시나 자신과는 달리 빠릿빠릿했다, 현규는. 그런 그에게 감탄하며 수현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그런데, 그 시간이면 병원도 문 닫을걸요. 보통 진료 5시까지만 보시더라고요.”

“내가 연락해 둘 테니 퇴근하고 가면 돼. 가서 피 검사 하고 확실히 해야지.”

그냥 오늘 한 번에 다 처리하겠다는 현규의 의지에 수현도 동의했다.

어차피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니 전화 한 통이면 진료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내일 정규 진료 시간에 병원에 가려면 또 반차를 써야 하는데 지난주에 휴가를 너무 많이 썼다. 시스템 개발팀은 지금 개점휴업 상태니 상관없지만 현규 형은 일이 너무 많이 밀렸다.

“그런데, 형은 오늘도 바쁘지 않아요?”

“괜찮아. 오늘은 최대 주주의 특권을 써야지.”

“그러다 갑질로 블라인드랑 오늘의 증권가에 떠요, 형.”

우리 이미 진상 커플로 유명해졌다고 수현은 웃는 낯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말로는 걱정하는 척하지만 누가 뭐라든 전혀 상관없다는 그 태도에 현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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