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160)

“어차피 뭘 해도 말이 나오게 돼 있다면 하고 싶은 건 다 해야지.”

“그건, 그래요.”

이런 점은 참 잘 맞는다고 웃으며 현규는 수현의 머리를 넘겨 주었다. 그러다 문득 본인의 왼손 약지에서 반짝이는 두 개의 링을 보곤 신기한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했는데…….”

이제야 말할 기회가 생겼다며 현규는 수현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물었다.

“가드 링, 네가 골랐어?”

수현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다이아몬드가 줄줄이 박힌 가드 링을 본 현규가 그렇게 묻자 수현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뇨. 매니저가 골라줬어요.”

원래는 그 숍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프러포즈 링을 사려고 했었다.

그게 수현의 초이스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소개해 준 숍의 매니저는 자신의 손을 보더니 지금 끼고 있는 반지는 뭐냐고 물었고 그래서 웨딩 밴드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프러포즈 링을 건너뛴 거냐고 해서 그렇다고 하자마자 그럼 차라리 레이어드로 할 수 있는 가드 링을 사는 걸 추천해 줬다.

남자들이 가드 링을 하는 일은 드물지만 웨딩 밴드보다 더 번쩍거리는 가드 링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니, 솔직히 그것도 현규 형에게는 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형한테는 아주 크고 예쁜 걸 해 주고 싶었다.

100캐럿쯤 되는 다이아몬드로, 세상에서 가장 큰 반지를.

“그래, 잘했어. 모를 때는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게 좋지.”

“네. 삼촌도 잘 모르면 직원한테 물어보라고 했어요. 그 사람들이 저보다 백 배는 잘 안다고요.”

그래서 이번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수현이 이실직고하자, 현규가 수현의 왼손 약지에 낀 웨딩 밴드를 매만지며 느긋하게 말을 던진다.

“이 반지는 내가 직접 고른 거야.”

“형이 직접요? 어, 친구한테…….”

분명히 반지를 줄 때는 매장에서 일하는 친구한테 대충 부탁했다고 하지 않았냐고 수현이 의아해하자 현규가 웃는다.

“친구한테 전화해서 정확히 얘기했지. 네 매장이든 어디든 다 뒤져서 메리 미 17호와 22호를 당장 들고 오라고.”

그건 좀 협박 같은데요, 라고 하려던 수현은 그 말을 뱉기 전에 3초를 참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3초 사이 그보다 다른 부분에 관심이 생겼다.

“그런데, 제 반지 사이즈는 어떻게 아셨는데요?”

나도 내 약지가 17호인지 몰랐는데, 어떻게 사이즈를 정확히 알았냐고 수현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윤 팀장님도 한 번 지적했지만 단번에 반지 사이즈를 맞추는 건 사실 불가능했다. 보이는 것과 실제 사이즈는 다르니까.

그래서 솔직히 내 반지 사이즈를 미리 알고 있었던 거냐고 묻자 현규가 솔직히 답해 준다.

“그날, 새벽에 쟀거든.”

“……그날요?”

“첫날밤.”

“첫날밤이요? 어…….”

첫날밤이라는 단어에 확 하니 떠오른 게 있었다.

일주일간의 철야 후 좀비 상태로 형을 만나 위스키를 마시다 뇌까지 알코올에 절었던 그날이었다.

“……저, 술 마시고 뻗은 날요?”

“응.”

“……왜요?”

그때까지는 우리 계약 결혼 아니었냐고 되묻자 형이 왼손 약지의 반지를 조심스럽게 매만진다.

“무조건 결혼할 생각이었으니까. 너는 이 반지의 이름을 몰라도 우리 또래 사람들은 다 알 테니 베타들도 반지 보면 약혼자가 있구나, 하고 금세 눈치챌 테니까. 그럼 나도 편하고 너도 편하고.”

그래서 바로 그날 반지부터 구매해 강제로 끼워 넣은 거라는 현규의 자백에 수현은 놀라 본인의 손을 바라봤다.

“그럼, 진짜 처음부터 저랑 결혼할 생각이었어요?”

“물론.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됐지. 예상보다 조금 빠르게 진행되긴 했지만…… 그건 너희 집안사람들이나 우리 아버지 성격이 너무 급해서 그렇게 된 거고. 임신은…… 사실 전혀 기대 안 했지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어. 그럼 양육권 문제 때문에라도 이혼이 쉽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모든 게 본인의 통제와 계획하에 이루어졌다는 현규의 고백에 수현은 그제야 그 말도 안 되는 혼후 계약서의 내용을 이해했다.

어쩐지 혼후 계약서를 전부 검토하신 정 변호사님이 이거 대체 누가 만든 거냐고 기막혀하시길래, 아마 현규 형이 만들고 최 변호사님은 받아,적기만 했을 거라고 하니까, 정 변호사님도 그러셨다.

너 그런 놈이랑 결혼한 거냐고.

그래서 그런 놈이랑 결혼했다고 하자 정 변호사님이 탄식하셨다.

그 혼후 계약서는 이혼 과정을 간소화하기 위한 계약서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절대 이혼은 하지 않겠다는, 쉽게 말하자면 종신 노예 계약서 같은 거라고.

그러니 절대 사인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시길래 설마 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설마, 혹시나 했는데 그게 진짜 종신 노예 계약서였던 모양이다.

“저도 혼후 계약서를 읽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진짜 이상한 거였네요.”

“응. 그러니까 사인해야지?”

이제 검수 끝났지, 라며 현규가 웃는 모습에 수현이 왜 굳이, 라는 얼굴을 한다.

“왜요?”

“그래야 이혼 못 하니까.”

“이혼 안 할 건데요.”

“그러니까 더욱 사인해야지.”

“안 할 건데 왜 해요?”

그때는 계약 결혼이니까 이혼할 때를 대비해 혼후 계약서를 쓰려고 한 거지, 이젠 진짜 결혼한 건데 그걸 왜 쓰냐고 수현은 반문했다.

솔직히 현규의 제안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현규의 입장은 완고했다.

“그 계약서대로면 너도 나도 이혼 못 해. 이혼 소송 거는 쪽이 거지 되는 거니까. 그리고 동시에 이제 막 생긴 우리 아이들 양육권뿐 아니라 친권까지 전부 빼앗기고, 면접 교섭권도 박탈당할 테니 절대 이혼 소송 같은 건 못 해. 그러니까 사인해야겠지?”

난 너와 이혼할 수 있는 여지 자체를 남겨두지 않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 현규는 예쁘게 웃으며 수현을 꼬셨다.

마치 사탕을 손에 쥐고 흔들며 아이들을 노리는 나쁜 어른처럼.

무조건 사인만 하면 된다며 수현의 의식을 혼란케 하는 현규의 말발에 수현은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현규를 바라봤다.

어차피 이혼은 안 할 거니까 이혼 과정을 지옥행 특급 열차로 만들어 놓은 혼후 계약서에 사인을 해도 상관은 없지만, 반대로 이혼을 안 할 건데 어째서 혼후 계약서가 필요한 거냐고 묻는다면…….

답은 ‘모른다.’다.

어차피 쓸 일이 없는 서류에 왜 사인을 받으려고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 그건, 일단 제 변호사랑 상의해 볼게요.”

“어째서?”

“그건 저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네가 뭘 싫어하는지 몰라서 일단 다 준비해 봤어, 라는 듯 온갖 혼전·혼후 계약서에서도 악질이라도 소문난 독소 조항으로만 꾸역꾸역 모으고 모아 작성된 게 바로 그 혼후 계약서라고 했다, 정 변호사님이.

이런 위험한 서류에 사인하는 건 아무리 성인이라도 부모님 허락, 특히 어머니 허락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무 서류에나 사인하면 어머니한테 혼난다고 수현이 모처럼 어머니 핑계를 대자 현규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다.

“진짜 많이 똑똑해졌네. 혼인 신고서에 사인할 때는 하란다고 그냥 하더니.”

사실 그때 사인하란다고 순순히 하는 널 보면서 솔직히 심란했다는 현규를 수현은 황당한 듯 올려다봤다.

두 눈 멀쩡히 뜬 사람 코 베 간 사람이 누군데?

“그건, 진짜 형이니까 한 거예요.”

“……나라서?”

“다른 사람이 구청에 끌고 가서 사인하라고 하면 서류 다 읽어 보고 하죠. 그런데, 그건 진짜 형이니까 믿고 한 거예요. 물론, 발등을 찍는 건 믿는 도끼라는 걸 그때 깨달았지만……. 어쨌든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거기까지 따라가지도 않았을 거예요.”

형이 부탁한 거라 서류에 사인하고 횡액 입은 거라고 수현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해져 수현은 조금 삐친 듯 삐죽거렸지만 현규의 얼굴 위로는 화색이 돌았다.

순수하게 기쁜 듯,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진짜 나라서 따라온 거야?”

“네. 형이랑 잠깐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요.”

만두도 먹고 싶었지만, 이라고 수현이 수줍은 듯 답한 순간 현규는 충동적으로 수현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곤 마구 뺨을 비벼 대며 탄식했다.

“아, 진짜 미치겠다. 너 때문에.”

“미치지는 마세요. 우리 아기들 태어나야 하니까요.”

“그래, 우리 아기들 먹여 살려야지……. 그러니까, 잠깐만.”

이라며 은근슬쩍 수현을 끌고 구석으로 간 현규는 완전한 사각지대에 속하는 그곳에서 깊이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옷 속으로 들어오는 현규의 나쁜 손에 수현은 놀라 그를 만류한다.

“형, 이러다 우리 감사팀에 끌려가요.”

“괜찮아. 아무도 안 봐. 카메라도 없고.”

“그래도…… 여기 사람…….”

여기가 나름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이 언제든 들이닥칠 수 있다고 수현은 재빨리 현규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보다는 현규가 빨랐다.

어느새 가슴 안으로 들어온 현규의 손이 유두를 매만지는 손길에 수현은 아찔한 듯 눈을 감았다 떴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아랫배가 저릿하게 울려오는 느낌에 수현은 현규의 목에 매달리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요한 옥상 위에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걷는 소리였다.

“잠깐만 자다 가야지. 날씨가 너무 좋네.”

“그냥 수면실에서 자라니까.”

“수면실 쓰면 티 나잖아. 그리고 오늘 날씨가 이렇게……아? 어……. 오…….”

수현에게 키스하며 구석에 서 있던 현규는 왼쪽 입구 쪽에서 들어선 두 명의 남자를 보곤 ‘또 너희냐?’라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벌써 세 번째다, 이번이.

저쪽은 땡땡이치다 걸리고 이쪽은 키스하다 걸린 게.

엘리베이터에서 두 번, 그리고 옥상에서 한 번.

저것들은 왜 일도 안 하고 매일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다 자꾸 마주치고 지랄이야, 라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 현규의 표정에 두 남자가 서둘러 뒤로 물러서려 하자 현규가 그들을 부른다.

“두 분, 잠깐요…….”

……라며 그들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확인한 현규는 그들의 소속이 홍보팀이라는 걸 알아내곤 웃었다.

“홍보팀이 요즘 한가한 모양이네요.”

“……아뇨. 전혀 안 한가한데요?”

어제도 철야한 상황이라 오늘 잠깐, 그러니까 진짜 아주 잠깐 볕 아래 눈 붙이러 온 거라고 호소하는 남자들의 표정에도 현규는 너희 사정 따위 내가 알 게 뭐냐는 얼굴을 해 보였다.

다시는 못 싸돌아다니게 해 주마.

“이제 곧 바빠지실 겁니다, 아주. 근무 중 사무실 밖으로 나올 꿈도 못 꿀 정도로.”

눈매를 휘어 웃으며 누가 들어도 악덕 기업주 같은 말을 내뱉는 현규에게 막 한 남자가 항의하려는 순간 다른 남자가 그를 말린다.

“그…….”

“야, 그만! 저기, 저흰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시던 거 계속하세요!”

그나마 두 남자 중 사회생활 잘할 것 같은 남자가 다른 남자를 질질 끌고 사라지는 모습에 현규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하던 걸 마저 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번엔 수현이 거절한다.

“형, 그만 내려가세요. 오늘 일찍 퇴근하고 저랑 병원 가려면 내려가서 일해야죠.”

형은 모른 척하고 싶겠지만, 형 휴대폰이 아까부터 가방 안에서 요동치고 있다고 수현은 벤치 위에 놓인 현규의 서류 가방을 가리켰다.

이제 슬슬 메시지를 확인하든, 전화를 받든지 하고 사무실로 내려가야 할 때였다.

하지만 현규는 아직 현실로 돌아갈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젠장.”

“그만 내려가 보세요. 저도 간식 사러 가야 돼요.”

“네가 왜 간식을 사?”

“전 제가 직접 고르는 거 좋아해서 제가 사러 가요. 그리고 날씨도 좋아서요. 이런 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걷고 오면 좋거든요. 햇볕도 쬐고.”

“햇빛 받으면서 걷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마. 임신 초기에는 뭐든 조심해야 하니까.”

“그럴게요. 이제 내려가요, 형. 우리 너무 오래 있었어요.”

형 팀원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겠다며 수현은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시각을 확인했다.

어느새 4시 40분이 넘어가고 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어디로 가?”

드디어 마음을 다잡았는지 재킷을 걸쳐 입으며 가방을 손에 든 현규가 그렇게 묻자 수현이 정자의 뒤쪽을 가리킨다.

“저쪽으로 한 블록 정도 걸어가면 맛있는 쿠키 파는 가게 있어요.”

“같이 갈까?”

“형, 그러다 대표님보다 형이 먼저 알래스카로 쫓겨 갈 수도 있어요.”

난 알래스카에서 애 키울 생각 없다고 수현이 웃자 현규도 더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정자를 빠져나갔다.

드디어 말을 듣는 현규의 옆에서 수현 역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나란히 걸음을 옮겨 정자를 빠져나온 순간 현규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형, 왜요?”

뭐 두고 온 거 있냐고 물으며 수현 역시 걸음을 멈추자 바로 입술이 겹쳐졌다 곧 떨어져 나간다.

스치는 인사 같은 그 키스에 수현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늦가을의 햇살보다도 더 말갛고 투명하게.

그 순하고 해사한 미소에 그를 바라보던 현규 역시 행복한 듯 미소를 흘렸다.

하늘은 더없이 높고 푸르며 바람은 차고 건조한, 청명한 가을의 오후였다.

정신없이 시작되었던 그들 인생 최고의 하루는 그렇게 상쾌하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해프닝으로 시작된 관계에 최고의 선물을 안겨 준 채.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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