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걸그룹 타이틀곡 도전하기(3)
그는 자신의 실패 요인을 남에서 찾고 있었다.
“이게 다 녀석들이 내 곡을 소화하지 못한 탓이라고…….”
자신은 요즘 제일 핫하고 트렌디한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시티팝 장르의 잘 빠진 놈을 준비했었다.
그리고 헤어에서 의상까지 완벽하게 챙겨 줬지만, 데이블랙이 자신의 곡과 디렉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과가 나쁘게 나온 것이다.
결과가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일까?
회사에서는 자신의 프로듀싱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아직 프로듀싱을 맡기에는 제임스 권의 능력이 부족하다.’라는 듣기 싫은 평가였다.
그런 찰나에 들려온 이서준의 드라마 OST 이야기.
솔직히 배가 아팠다.
그리고 호기심에 몰래 찾아 들어 보았더니 더 짜증 났다.
제법 괜찮은 노래라는 더러운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서준은 자신의 입사 동기였다.
저 녀석은 자신과 다르게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뭐 애가 성실하고 싹싹하다고 말하긴 하던데…….
작곡가가 노래를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싹싹한 것이 뭐가 중요한가?
그래서 더욱 꼴 보기 싫은 녀석이었다.
결국,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그에 관해 불편했던 마음이 오늘의 사건을 만든 것이다.
“이 자식들 하라고 시킨 일 똑바로 안 해 놓았으면 다 죽었어.”
그는 작업실로 가 열심히 일할 생각이었다.
물론 혼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붙여 준 호구 같은 작곡가들을 이용해서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JYK에서 성공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의 명함을 가지고 자신의 회사를 물려받길 원하셨다.
항상 하시는 말처럼 연예계는 인지도가 생명이었다.
JYK의 스타 작곡가란 인지도만 가지고 있으면 대충 만들어도 히트곡이고, 좀 괜찮으면 불후의 명곡이 되는 게 이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였다.
그래서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자신의 비밀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는 신인 작곡가들이었다.
음악 잘하고 어리숙한 놈들을 이용해서 제임스 권은 수월하게 곡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놈들이 생각해 낸 좋은 곡의 소스를 자신이 제대로 어루만져 곡을 완성하는 방식의 손쉬운 작업이었다.
호구들은 아버지 회사에서 작곡가로 정식 데뷔를 시켜 준다는 약속만 믿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데뷔하고 싶은 예비 작곡가의 기본적 욕심 때문에 뒤탈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기존에 데리고 있던 녀석들 사이에 괜찮은 놈들이 몇 놈 추가되면 지금 준비하고 있는 워너비 걸즈의 타이틀곡도 멋지게 뽑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천지도 모르고 까불던 이서준 놈에게 세상의 매서운 맛을 제대로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제발 없던 일로 해 달라는 부탁을 하면 어떻게 거절하지? 벌써부터 고민이네. 흐흐.”
흐뭇한 상상 덕분인지 거칠게 운전하던 제임스 권의 얼굴에는 어느덧 사라졌던 미소가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 * *
“휴~ 다 했다.”
드디어 곡을 마무리했다.
사실 서두르면 이보다 빨리 완성할 수도 있었지만, 내기까지 걸려 있는 상황이라 심혈을 기울여서 곡을 작업했다.
그러다 보니 마감 하루 전에서야 겨우 완성을 한 것이다.
“서준아, 드라마 보자.”
저녁에 함께 드라마 보기로 약속한 은진 누나가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은 내가 만든 곡이 나올지도 모르는 드라마 ‘의사 김서영’이 처음으로 방영되는 날이었다.
그러니 내 입장에는 본방 사수는 당연한 일이었고, 은진 누나도 덩달아 나와 함께 보기로 한 것이다.
나는 누나의 등장에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일한다고 정신없었나 보네. 곡은 다 되었어?”
“네, 다 됐어요. 이제 제출만 하면 돼요. 누난 다 됐어요?”
은진 누나는 내게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으스대며 말했다.
“나 정도 되는 작곡가라면 당연히 미션은 이미 클리어했지. 근데 어쩌지?”
누나가 갑자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급히 물었다.
“왜요? 무슨 문제 생겼어요?”
“내가 만든 곡이 너무 좋아서 그래. 네가 만든 곡이 재수 없는 상판대기 녀석의 곡을 이겨도 내가 쓴 곡이 너무 좋아 채택되면 결국 네가 이기지 못하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내기에 참가하는 건데 잘못 생각했어.”
그제야 누나가 다시 농담한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분명 농담으로 하는 말일 텐데… 누나가 그러니까 내가 웃을 수가 없네요. 워낙 잘하시는 걸 내가 잘 알잖아요. 정말 누나 때문에 내기에서 이기질 못하면 어쩌죠? 그 녀석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여야 하는데, 큰일이네요.”
이번에는 누나가 당황해서 말했다.
“어이, 그냥 동생 웃자고 한 소리야. 다큐로 받지 마.”
“다큐로 장르가 바뀐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런 젠장… 무슨 장르가 그렇게 쉽게 바꿔?”
남들이 보면 그저 실없이 까부는 것처럼 보일 만한 싱거운 농담들이 오가고 있었다.
편한 누나랑 있으면 이런 실없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어, 시작했겠다.”
“어? 안 돼요.”
농담 덕분에 중요한 시작 장면을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우리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녹음실 안의 TV를 황급히 틀었다.
* * *
자칭 TV 드라마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모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지금 고대하며 기다리던 ‘의사 김서영’을 시청하고 있었다.
드라마는 그녀들의 기대 이상이었다.
첫 장면부터 TV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수위 높은 베드신으로 시작하는 파격을 보여 주더니, 보는 내내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몰입감을 주는 끝내주는 드라마였다.
“아이고, 저 나쁜 놈. 제 마누라는 애들 챙긴다고 정신없는데, 자기는 딴 년이랑 저러고 놀고 있었네. 아이고, 나쁜 놈.”
“엄마, 좀 조용히 해. 집중하는 데 방해되잖아.”
엄마는 평소처럼 나쁜 등장인물을 욕하며 극에 빠져들고 있었고, 딸은 그런 엄마의 목소리를 시끄럽다고 타박하고 있었다.
함께 드라마를 볼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모녀 특유의 시청 장면이었다.
드라마는 어느덧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결국, 남편의 외도를 눈치챈 주인공이 놀라는 장면을 끝으로 드라마는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장면과 동시에 이서준이 만들고 이정희가 부른 ‘사랑이 끝나다’가 화면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드라마가 끝이 났음을 안 모녀는 안타까운 마음에 탄식했다.
“와아, 벌써 끝났어.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흘러가?”
“어머, 그렇네. 다음 편 보려면 또 기다려야 하잖아. 어떻게 기다리냐?”
“그래, 어떻게 기다려. 계속 생각나서 일도 안 될 거 같아.”
엄마는 지금 제일 궁금한 질문을 딸에게 물었다.
“딸, 내일도 이 시간에 2편 하지?”
“응, 엄마. 내일 이 시간에 2편 해. 주 2회 방영하잖아. 나 내일도 집에 일찍 들어와야겠다. 이런 재밌는 드라마는 본방 사수를 해 줘야 예의지. 엄마, 내일은 들어올 때 치킨 사 올까?”
“뭐 빠진 거 없어? 맥주도 사 와야지.”
“넵, 어머니.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엄마는 딸의 귀여운 장난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의 반응처럼 드라마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작가부터 감독, 그리고 주연 배우까지 최고의 제작진이 모인 탓인지 그들이 만든 드라마는 역시 기대대로 압권이었다.
1편이 방영되고 2편이 방영된 다음 날.
‘의사 김서영’과 관련된 기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서준의 곡에 대한 기사도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국 여가수 중 최고 가수라 불리는 그녀의 노래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2일이 지난 뒤 더욱 놀라운 일이 생겼다.
바로 ‘사랑이 끝나다’가 음원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적 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 * *
이서준이 만든 노래가 음원 차트 1위에 오른 순간에, 지금 JYK 사옥에서는 이서준에게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일은 바로 워너비 걸즈의 타이틀곡 선정 작업이었다.
“자, 모두 모였으면 시작할까요?”
유명 가수이자 작곡가, 그리고 JYK의 사장이기도 한 김진영이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외쳤다.
김진영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지금의 JYK의 신화를 만든 주역들이었다.
모인 사람의 직군도 매우 다양했는데, 유명 작곡가, 가수 등 뮤지션들도 많았고, 매니저, 팀장 등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스텝들도 다수였다.
그리고 의외로 외부 작곡가도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인원 구성이었다.
“자, 그럼 청음회를 시작합니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여러 작곡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노래들이 대형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듣고 있는 사람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노래를 듣고 각자 가지고 있던 점수판에 점수를 매겼다.
그리고 상위 50%의 높은 점수를 받은 곡들을 다시 반복해서 들으며 점수를 매겼다.
좋은 노래라는 것이 한 번만 들어서 알 수 없기에 수차례 반복해서 들었다.
무척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몇 단계를 거쳐 최종 후보 3곡이 추려졌다.
“우리 작곡팀에서 2곡이 나왔고, 나머지 한 곡은 외부 작곡가 곡이네요. 전 이 세 곡 다 좋아요. 다른 사람들 생각도 그런가요?”
“네.”
김진영의 물음에 사람들은 모두 동의했다.
그들 입장에는 무척 다행이었다.
이번에 마음에 드는 곡이 없으면 공모전을 다시 열게 된다.
공모전은 좋은 곡을 찾을 때까지 무한 반복이었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곡이 있다는 말은 이 힘든 심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분 좋은 소식이 담긴 소리였다.
김진영은 곡을 낸 작곡가의 프로필을 살피며 말했다.
“외부 작곡가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네요. 다들 ‘2층 창문’이라는 작곡팀 아시죠? 우리 애들 노래도 여러 번 작곡했잖아요. 이번에도 좋은 노래를 보내 줬네요.”
다음으로 그의 눈에 들어온 작곡가의 프로필은 제임스 권이었다.
“오, 제임스가 이번에도 좋은 곡을 냈네요. 데이블랙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좋은 곡을 썼어요. 이러면 이 친구는 확실히 좋은 실력을 가졌다는 것이 바로 증명이 되네요. 앞으로가 아주 기대되는 작곡가네요.”
김진영의 옆에 앉아 있던 기획팀장은 제임스 권의 개인적 바람을 김진영에게 전달했다.
“특이하게도 자신의 곡이 선정된다면 프로듀싱까지 맡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저번 데이블랙 때에는 처음이라 서툰 점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더 잘할 자신이 있다고 하네요.”
그 말을 들은 김진영은 웃었다.
“누구나 처음에는 실수가 있죠. 분명 많이 배웠을 거예요. 그리고 의욕적이라 참 보기 좋네요.”
김진영은 열정적인 제임스 권의 욕심이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