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최고를 만나다
한참 기타 줄을 튕기며 연주하다 보니 어느새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아이고 나도 은근 카페인 중독인가 봐. 시간이 흐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커피가 당기는 걸 보면 말이야.”
나는 내 몸에서 일어나는 카페인 중독 증상에 관해 걱정을 하며 휴게실로 향했다.
말은 걱정한다고 하지만, 몸은 반대로 커피를 찾았기 때문이다.
“어? 이게 뭐야?”
휴게실 커피 기계 위에는 ‘고장’이라는 글자가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커피를 많이 마시는 작곡가들이 주로 일하는 곳답게 쉴 틈 없이 일하던 커피 기계가 혹사로 인해 퍼진 모양이다.
“어쩌지?”
당장 카페인을 섭취해야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에 빠졌다.
나는 고민 끝에 이대로 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다른 층에 있는 휴게실 안 커피 기계를 이용하려는 생각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앞으로가 버튼을 눌렀다.
“아, 그리고 보니 도훈 형 채널에 한 곡 더 해 주기로 약속했는데… 완전 까먹고 있었다. 근데 뭘 부르지?”
커피를 구하기 위한 머나먼 원정길에 오르며 불현듯 잊고 있던 도훈 형과의 약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막상 약속한 대로 형의 작업실로 가 노래를 부르려고 하니 고민이 한 가지 생겼다.
그건 바로 선곡에 대한 고민이었다.
노래만 정해지면 부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 선곡이 문제였다.
“약간 편곡을 해서 부르는 것이 더 낫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MR로 부르지 말고 직접 연주하면서 부르는 게 좋겠어.”
도훈 형과의 약속 이행을 위해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 보니 어느덧 내가 향하던 목적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내가 지금 향하는 곳은 7층에 있는 댄스 연습실 가운데 있는 휴게실이다.
그곳에 있는 커피 기계가 가장 고장이 적은 커피 기계라는 소리를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어 이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휴게실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 같이 사용하는 휴게실에 먼저 온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휴게실에 있는 주인공이 대한민국 걸그룹 원톱인 ‘쓰리타임즈’의 나영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쓰리타임즈’는 현존하는 대한민국 걸그룹 중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국민 걸그룹이다.
한국인 멤버 5명과 외국인 멤버 4명으로 구성된 이 다국적 그룹은, 그룹 이름의 속뜻처럼 팬들이 그녀들의 예쁜 외모을 보고 한 번 반하고, 그녀들의 멋진 음악에서 다시 한번 반하며 마지막으로 그들의 화려한 춤을 보며 세 번이나 반하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을 가진 그룹이었다.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로, 그리고 이제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쓰리타임즈의 맏언니 나영이 왜 이 시간에 휴게실 소파 위에 저렇게 널브러져 있는지 나는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위, 위층에 휴게실이 하나 더 있지?’
소파에 누워 있는 나영과 마주치는 것이 불편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 소파에 누워 있던 나영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 *##…….”
나영이가 내 쪽을 향해 뭐라고 하는 거 같았는데,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다시 나영 쪽을 집중해서 쳐다봤다.
그랬더니 휴게실에서 나를 보고 있는 나영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그녀는 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잉, 나 두고 가지 마요.”
엉?
지금 그 말은 나보고 하는 소린가?
나영이 내게 왜 그런 말을 하지?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으로 변해 버렸다.
* * *
“하하하, 오빠 미안해요.”
나영은 나를 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하고 있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매우 이질적인 그녀의 말과 행동에 난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에이, 오빠. 삐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사과하잖아요.”
“…알았어요.”
아무리 황당한 일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해도 내 화를 풀어 주는 사람이 ‘쓰리타임즈’의 나영이라면 그 화는 얼마 가지 않아 소멸될 운명이다.
그리고 그녀의 애교 말투에 어느새 화내던 얼굴은 수줍게 웃는 얼굴로 바뀔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근데, 아깐 왜 그런 거예요?”
약간 기행에 가까운 말과 행동을 보였던 그녀였기에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영은 내 질문에 약간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약간 속상해서 그랬어요.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거 같으니까…….”
방금의 상황은 이러한 사연이 숨어 있었다.
나영은 얼마 뒤 열리는 콘서트 연습 때문에 오랜만에 안무 연습실에 나왔다고 한다.
원래 다른 멤버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많이 일찍 온 덕분에 그녀는 혼자 춤을 추며 몸을 풀었고, 그러다 지친 그녀는 잠시 소파에 누워 쉬기 위해 휴게실에 들렀다고 한다.
안무 연습실 사이에 위치한 휴게실이다 보니 당연하게 많은 연습생들이 휴게실을 찾게 되었고, 그들은 먼저 와서 쉬고 있는 나영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나영 역시 오랜만에 후배들을 봤다는 반가움에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그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성큼 다가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연습생들의 입장에는 나영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물론 십분 이해는 간다.
워낙 대스타이다 보니 아직 데뷔도 못 한 그들의 입장에는 그녀가 편한 사람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다가가려던 나영은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연습생들은 자신을 어려워하며 휴게실을 나가 버리자 그 모습에 상처를 받아 버렸다.
“상처받아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도중에 오빠가 휴게실에 들어온 거예요. 근데 오빠도 휴게실에 와서 날 보고 그냥 나가려고 했잖아요. 그래서 순간 속상한 마음에 눈물까지 나더라고요. 그래서… 헤헤, 아무튼 미안해요.”
“아니에요.”
자세한 내막을 들으니 나영이 나에게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근데, 오빠. 왜 말 편하게 안 해요? 우리 전에 봤을 때는 말 편하게 했잖아요. 그때처럼 편하게 해요.”
“아,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말을 놓는 게 영 어색하네요.”
사실 나와 나영은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내가 예전에 은진 누나와 ‘쓰리타임즈’가 함께 곡 작업할 때 도와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라 내가 JYK에 입사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질 않던 시절이다.
그때 우연히 멋도 모르는 상태로 그녀들과 함께 작업을 했었다.
그리고 그녀들 덕분에 ‘내가 그 유명한 JYK에 들어온 것이 맞구나’ 하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제법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나영을 보고 그때처럼 말을 놓는 것이 매우 어색했다.
“언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갑자기 ‘쓰리타임즈’의 막내 채연이 휴게실에 나타났다.
아마 나영이 보이지 않아 찾으러 온 모양이다.
“우리 채연이 왔어?”
“언니 여기서 뭐 해?”
“언니가 먼저 와 몸 풀다 지쳐서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었어. 근데 애들 다 왔어?”
“응. 다 왔어. 그리고 정현 언니가 피자 사 왔어. 어서 가서 같이 먹자.”
“그래? 맛있겠다.”
피자라는 소리에 배가 고팠던 나영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쓰리타임즈’ 멤버들이 모인 곳을 향해, 아니 피자를 향해 날아갈 듯 움직이려던 그녀는 갑자기 멈칫하며 제자리에 서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는 식사했어요?”
“나? 이제 해야죠.”
엉겁결에 아직까지 공복임을 사실대로 실토했다.
그런 내 말을 들은 나영은 내게 함께 갈 것을 권했다.
“오빠 그럼 같이 먹으러 가요. 정현이가 손이 커서 아마 넉넉하게 사 왔을 거예요.”
“아, 아니 나는 됐어. 배도 별로 고프지 않고…….”
그녀들 사이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것이 싫어 배가 안 고프다는 거짓말로 격렬하게 사양했지만, 이미 나를 끌고 갈 결심을 한 나영에게는 소용이 없는 반항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채연까지도 나를 알아보고는 언니와 함께 내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이 오빠 전에 우리랑 같이 녹음했던 그 오빠 맞지? 은진 언니랑 타이틀곡 작업할 때 말이야.”
“응, 맞아. 우리 오랜만에 봤다고 이렇게 어색하게 대하네. 다음부터 우리보고 반갑게 인사하도록 끌고 가서 제대로 교육시키자.”
“흐흐, 좋아 언니.”
두 사람은 나를 끌고 다른 멤버들이 기다리는 안무 연습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두 여성의 힘이 거스를 수 없을 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강제력으로 인해 나는 두 여자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옛말에 시간이 약이라고 그랬나?
그 말이 실감이 되는 순간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주로 쓰는 말이 아니란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나와 ‘쓰리타임즈’ 멤버들 사이의 어색함도 시간이라는 묘약 덕분에 사라질 수 있었기에 이번에 내가 인용해 보았다.
피자를 먹으며 왁자지껄 떠들다 보니 어느새 그녀들과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예전에 작업할 때도 여러 가지가 어색한 나를 편하게 만들어 준 사교성 좋은 여자들이다.
“스케줄이 많이 힘들지?”
회사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녀들이기에 이런 질문을 물어보았다.
“오빠, 우리 아이돌 연차가 얼마인 줄 알아? 우리 정도 되면 이젠 그런 거 다 초월하게 돼.”
“맞아. 매니저 언니가 큐 사인만 주면 그냥 기계처럼 일하게 돼. 그러니 힘든 건 이제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안 돼.”
한 분야에서 숙련된 장인과 같은 의연한 모습의 쓰리타임즈였다.
하긴 데뷔한 지 이제 횟수로 6년째이니 어느 정도 달관하는 경지에 오를 만한 시기인 것도 맞았다.
“그럼 뭐가 문제야?”
이어진 내 질문에 일본인 멤버 사나다가 웃으며 말했다.
“연애?”
“뭐? 하하하.”
“사나다 입조심해라. 어디 기자가 숨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어느덧 한창 예쁠 나이의 그녀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애 이야기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그렇게 재밌게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 그룹 내에서 언니 측에 속하는 정현이가 다소 무거운 말을 모두에게 던졌다.
“나 진짜 고민 있어.”
“그게 뭔데?”
“우리 다음 노래. 이제 우린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
“…….”
진짜 고민이 정현의 입을 통해 나오자 멤버들은 전과 같이 웃으며 농담을 던지지 못했다.
방금 정현이 말한 고민은 정현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 자신들 전원이 하고 있는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반응을 보며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되는 고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