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내 앨범 청음회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쯤 회의실에 직원분들이 모여 내 노래들을 듣고 있겠지?’
계속 청음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내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닫혀 있던 내 작업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서준 작곡가님, 뭐 하고 계십니까?”
한 손에는 컵을 든 채 장난 가득한 말투로 내 작업실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회사에서 나와 가장 친한 은진 누나였다.
“어, 누나 왔어요? 전 그냥 멍 때리고 있어요.”
“그냥 멍만 때리고 있다고? 그럼 입은 놀고 있다는 뜻이니… 옜다, 이거나 마셔라.”
누나는 내게 들고 온 큰 컵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컵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난 충격적인 비주얼의 액체를 보고 놀라 물었다.
“이게 뭐예요?”
“내가 만든 건강 주스. 몸에 좋다는 걸 다 때려 넣어서 만들었지. 근데 이 누님이 마음처럼 손도 크다 보니 너무 많이 만들어 남더라고. 그래서 불철주야 작업한다고 건강에 관심 없는 불쌍한 동생에게도 좀 나눠 주려고 가지고 왔지.”
내 건강을 챙겨 주려고 일부러 가지고 왔다는 말을 굳이 남아서 가지고 왔다고 둘러 표현하는 귀여운 누님의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항상 이렇게 챙겨 주는 누나이기에 언젠가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전에도 여러 번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도 누님의 사랑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괴상한 색깔을 띤 무서운 액체를 보고는 선뜻 손이 내밀어지지 않았다.
“…색깔이 무서워서 그러는데, 그냥 마음만 받으면 안 될까요?”
“…내가 직접 네 입을 벌려서 부어 줄까?”
자신의 정성이 가득 담긴 창작물의 외모에 대해 내가 악평을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누나는 곧 살벌한 눈길로 날 위협했다.
그래서 나는 울상인 얼굴로 누나가 건네는 독약 같은 비주얼의 주스를 억지로 마셔야만 했다.
“으악, 이거 왜 이렇게 써요?”
“원래 몸에 좋은 것이 쓴 법이란 옛말도 모르냐? 내가 특별히 몸에 좋은 것만 넣었으니 맛은 당연히 쓸 수밖에 없겠지. 그러니 건강 챙긴다는 생각에 그냥 참고 마셔.”
나는 혀에서 느껴지는 괴로운 맛을 꾹 참고 남은 주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내가 주스를 다 비우니 그제야 누나가 뿌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고마운 마음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다음에는 너무 많이 만들지 마시고 누나 드실 만큼 딱 정량만 만드세요.”
“오케이. 내일도 줄 테니 감사히 먹어. 네 건강은 내가 꼭 챙길 테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거려 내일도 이걸 마시게 되었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으니 내일은 현명하게 작업실에 나오지 않을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은진 누나가 갑자기 무엇이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자신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나를 보며 말했다.
“아, 맞다. 야, 이서준. 너 이 누님한테 제대로 한번 쏴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뭘 쏴요?”
“너 재계약했다며? 회사 안에 소문이 파다해. 우리 회사 소속 작곡가 중 최고 조건으로 재계약했다고 하던데… 아니야?”
내 계약 이야기가 벌써 회사 내에 퍼졌나 보다.
원래 회사 내에서 소문이 빨리 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 이야기가 이렇게 빨리 도는 걸 직접 실감하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제가 계약한 조건이 최고 조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재계약한 거는 맞아요. 그리고 누나는 제가 항상 고마운 사람이니까 한 방이 아니라 여러 방 쏴 드릴 수도 있죠.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은 제가 살까요?”
“오, 이서준. 이제 성공했다고 돈을 좀 만지나 보네. 혹시 정산 들어왔어?”
“아니, 아직요. 근데 며칠 안에 정산금 들어올 거 같아요. 회사에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리고 계약금 받은 거 있으니 우리 누님 드시고 싶은 건 뭐든지 사 드릴 수 있는 주머니 사정은 됩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비싼 거 드셔도 돼요.”
내 말을 들은 누나는 기분 좋은 얼굴로 크게 외쳤다.
“오케이, 오늘 오랜만에 바다에 사는 생물 좀 먹어 보자. 초밥 오케이?”
“오케이.”
그렇게 누나와 나는 저녁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잊고 있던 고민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부모님한테도 이젠 사실대로 말해야겠어. 근데 막상 아버지, 어머니 앞에 가면 입이 떨어질지 모르겠다.’
그동안 부모님께는 내가 작곡가로 일한다는 사실을 속여 왔었다.
그냥 평범한 회사에 취직했다는 말로 대충 둘러대고 있었는데, 이제 정식으로 앨범이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더 늦기 전에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대충 우리 집의 경제적 상황이 썩 좋은 편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마침 내게 목돈이 들어왔고, 앞으로도 들어올 계획이 있으니 이번 기회에 부모님께 돈을 드리는 것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정이한테 연락해야겠네.’
이런 어려운 상황일 때는 나의 든든한 우군인 여동생 찬스를 쓰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내 머릿속 노트에 적힌 오늘 할 일 목록에 ‘여동생과 통화하기’라는 새로운 문구가 적히는 순간이었다.
* * *
JYK 사옥 내 대회의실.
지금 이곳에는 이서준의 노래에 대한 청음회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오늘 참석한 청음회 멤버는 모두 15명이었다.
그들 가운데 앉아 있던 JYK 대표 김진영은,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 10곡 모두를 들어 보았습니다. 이 곡들을 모두 다 들으신 여러분의 소감이 어떤지 너무 궁금하네요. 어떠셨어요?”
김진영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른 사람의 소감을 물었다.
그들 중 김진영의 물음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오늘 처음으로 청음회에 참석한 ‘비스트보이즈’의 메인 보컬이자 싱어송라이터 준명이었다.
“사실 노래들을 듣고 난 제 소감은 ‘충격’이라는 두 글자로 설명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저도 가수 생활을 제법 오래 한 편에 속하지만, 이런 노래들은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마치 예전 추억의 팝스타의 명반을 듣는 기분이 들었어요. 지금 여기 계신 다른 분들도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지금은 다른 형태로 음악을 접하지만, 과거에는 가수의 앨범이 나오면 레코드 가게에 가서 구매한 후 자신의 방에 콕 틀어박혀 조용히 음반 수록곡을 정주행하는 것이 평범한 음악 감상의 모습 중 하나였다.
지금 준명은 이서준이 만든 노래들을 듣고 과거 자신이 유명한 팝스타의 앨범을 산 후 집에서 혼자 들으며 감탄했던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은 김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이야, 준명이랑 저랑 같은 생각을 했네요. 전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존경하는 가수인 제이크 브라운의 음반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감동을 받았어요. 노래들이 정말 좋아요. 근데 이건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닌데… 서준이 노래 정말 잘하는 거 같지 않나요? 우리 회사 연습생들에게 교육용으로 들려주고 싶을 정도예요.”
이서준의 보컬에 감탄한 김진영의 말에 준명은 곧바로 반대 의견을 냈다.
“대표님, 전 반대입니다. 괜히 들려줬다가 연습생들 자괴감만 생길 거 같아요. 이서준이란 친구는 타고난 음색에서 거의 90%는 먹고 들어가잖아요. 아무리 가수를 지망하는 연습생이라도 이런 매력적인 보이스를 가진 사람은 찾기가 힘든 게 현실이죠. 그러니 괜히 애들에게 보여 주면 노력으로는 넘지 못하는 거대한 절망의 벽을 접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어요. 지금 저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연습생들은 아마 더 심하겠죠.”
김진영은 진명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서준은 이번에 만든 노래를 부를 때 그다지 기교를 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노래에 적합한 감성을 담아서 특유의 매력적인 톤으로 자연스럽게 발성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김진영이 항상 다른 가수나 연습생에게 하는 말이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노래를 불러라는 말이었기에 회사 연습생에게 들려주고 싶단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진명의 말대로 타고난 재능에 압도당하는 부작용도 생길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만큼 이서준의 목소리 톤은 사기에 가까운 매력적인 톤이었다.
그때 조용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획실장 강호석이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잡았다.
“전 다른 쪽의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괜찮을까요?”
그의 말을 들은 김진영은, 반색하며 말했다.
“아, 물론 너무 좋죠. 좋은 회의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법이거든요. 그럼 우리 모두 기획실장님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 볼까요?”
김진영의 농담 섞인 말에 기획실장 강호석은 멋쩍은 미소를 띤 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청음회에서 들은 이서준의 곡들이 모두 좋았습니다. 아마 오늘 들은 노래가 정말 좋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모두 어떠한 이견도 없을 거란 확신이 들 정도입니다.”
기획실장 강호석도 이서준의 노래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노래가 좋다는 감상이 아니었다.
“다만 저는 이 훌륭한 곡들을 발표하는 방식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이런 좋은 곡들을 정규 앨범 형식으로 한 번에 소모하는 것이 과연 옳은 생각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곡들의 발매 방식이었다.
“이 정도로 좋은 노래들은 우리가 원한다고 쉽게 얻어지는 그런 성질의 곡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까운 노래들을 전략적으로 순서를 짜서 차례대로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이 더 나은 생각이 아닐까요?”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열 곡 모두가 괜찮으니 아끼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 많은 가수가 여러 곡을 준비했다가 순차적인 계획에 따라 발표하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그는 이서준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니면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서준 작곡가가 먼저 자신이 원하는 곡 중 몇 곡을 골라 미니 앨범으로 발표를 합니다. 그리고 남는 곡들은 우리 회사 다른 가수들에게 주는 것도 좋은 방법들 중 하나가 아닐까요?”
강호석의 의견에 회의실에 앉은 몇 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지금 이곳에서 들은 곡들은 한 번에 소진하기에는 아까운 곡들이었다.
기획실장의 발언이 끝나자 김진영이 곧바로 마이크를 잡았다.
“기획실장님 의견도 분명 일리가 있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먼저 확실히 알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서준 작곡가와 제가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정규 앨범 형태로 발매를 해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니 방금 기획실장님의 의견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그런 안타까운 의견입니다.”
김진영에게서 숨겨진 사연을 들었지만, 기획실장은 여전히 미련이 남았다.
“그거야 이서준 씨를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회사 차원에서 굳이 비효율적인 생각을 고집하는 이서준 씨의 의견을 반드시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희는 사업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지극히 사업적인 마인드로 의견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대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가수이기도 한 김진영의 생각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