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음악 방송 출연(1)
가수가 되기 전에는 몰랐는데, 가수가 되고 난 후 음악 방송에 출연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는 다른 방송에 나간다는 말과는 분명 다르게 들렸다.
뭐랄까?
설명하긴 어렵지만, 왠지 진짜 가수로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특별한 의미가 담긴 스케줄이라서 그런지 나는 아침부터 매우 설레는 기분이었다.
“오빠, 긴장했어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은비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응, 나 지금 너무 긴장돼. 어떡하지, 은비야?”
“오빠, 다른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아 보이더니 오늘은 특히 많이 긴장돼 보이네요. 제가 약이라도 사다 줘요? 먹으면 긴장이 풀린다는 약 있잖아요. 그거 사다 줄게요.”
많이 긴장한 내가 걱정되었는지 은비가 긴장이 풀리는 약 이야기를 꺼냈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먹어 본 적은 없었다.
수능 치는 날 너무 긴장한 아이들이 먹는 걸 본 적은 있었다.
“그럴까? 아, 아니다. 노래해야 하는데, 약 먹어서 몽롱하면 실수할 수도 있잖아. 정신 바짝 차려야 하니까 안 먹어야겠어.”
그러고 보니 수능 때 긴장을 풀려고 먹었다가 시험 도중 잠들어 버린 학생을 본 기억이 났다.
오늘 음악 방송에서 실수를 안 하려면 안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와 은비 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 실장이 내게 조언을 해 주었다.
“서준아,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 해.”
“익숙해지라고요? 뭘 익숙해져요?”
“긴장을 느끼는 걸 익숙해지라고. 가수란 무대에 서는 사람이잖아. 가수가 무대를 서야 한다는 건 항상 긴장감을 느끼며 지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러니 앞으로 네가 가수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긴장감은 항상 너를 따라다닐 거야.”
실장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나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항상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게 가수이니 차라리 익숙해지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조 실장님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지만, 쉽게 와 닿지는 않았다.
“너무 어려워요. 조금 더 쉽게 설명해 줄 수는 없나요?”
내 말을 들은 실장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미안하지만 없어. 왜냐하면, 방금 한 말은 내 말이 아니거든. 예전에 함께 일한 가수한테서 들은 이야기야. 그 형님은 긴장될 때 자신은 긴장감에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하더라고. 그걸 기억했다가 전달한 거야.”
“그 가수가 누군데요?”
“장현석.”
“헉.”
장현석이라는 이름에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장현석은 우리나라에서 노래 잘하기로 손꼽히는 가수였다.
1990년대에 주로 활약했던 가수였지만,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노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전 세대에 걸쳐 인정받은 노래 실력의 가수가 바로 그분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수보다는 노래가 더 유명한 분이기도 했다.
그런 유명한 분의 매니저를 맡았었다니 조 실장님이 갑자기 다르게 보였다.
“아니 장현석 선배님 매니저를 언제 맡으신 거예요?”
“너랑 일하기 바로 전에 함께 일했었지.”
“지금은 저랑 일하시니까 장현석 선배님하고는 헤어지셨다는 말인데… 왜 헤어지셨는지 여쭤봐도 돼요?”
나는 장현석이란 이름의 무게 때문에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았다.
“장현석 형님과 일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고.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잖아.”
“…네.”
왠지 실장님이 말하는 뉘앙스가 장현석 선배님과 깊은 이야기는 꺼내기 싫어하는 듯이 보였다.
그걸 느낀 난 더 묻고 싶은 여러 질문들을 일단 머릿속에 다시 묻어 두어야 했다.
기회가 된다면 실장님께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함께 일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 지금 나와 함께하는 조상구 실장님이었다.
그런 실장님의 개인적 히스토리가 문득 궁금해지는 아침이었다.
* * *
KBC별관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인파가 몰려와 있었다.
그들이 이 이른 시간에 소위 ‘음방 출근길’이라 불리는 이곳에 몰려와 있는 이유는 그들이 응원하는 가수들이 잠시 후 이곳을 지나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좋아하는 가수의 실물을 볼 수 있기에 사람들은 새벽부터 움직이는 수고를 감수하고 있었다.
출연하는 가수의 이름값에 따라 많이 몰리는 날에는 수천 명이 몰리기도 한다고 한다.
오늘은 그 정도 이름값을 가진 가수가 출연하는 날은 아니라서 수백 명 정도가 출근길 옆쪽에 자리한 상태였다.
오늘 출연하는 가수들의 팬덤 규모에 따라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르는 대인원이 몰려 있는 곳도 있었는데, 여러 무리 중 가장 적은 수의 사람이 모인 무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들은 신인 가수 이서준의 팬들이었다.
왠지 모르게 어색한 표정의 그들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의 눈치를 엿보고 있었다.
그들 중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이 10명도 안 되는 인원 중 제일 어려 보이는 여성에게 물었다.
“저기 서준사랑님,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 서준 오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 맞죠?”
그녀의 걱정이 담긴 물음에 앳된 얼굴의 그녀가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당연하죠. 제가 여길 한두 번 와 본 줄 아세요? 신인들은 반드시 이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어요. 홍보를 위해서 일부러라도 기자들에게 사진 한 장 더 찍혀야 하기 때문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가수들의 모습을 담으려고 기다리는 이 길을 포기할 수는 없죠.”
당당한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되는 닉네임 ‘쭌사랑’이었다.
‘쭌사랑’은 처음으로 덕질을 하는 직장인 여성이었기에 덕질에 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당연히 한두 번 온 건 아니죠. 아주 여러 번 왔었어요.”
갑자기 옆에서 훅 들어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닉네임 ‘서준사랑’의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무리 중 누군가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살벌한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서준사랑’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성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넌 왜 갑자기 우리끼리 대화하는 데 함부로 끼어들고 그러냐?”
“갑자기 잘 알고 지내던 목소리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네. 3년간의 의리를 저버리고 본진을 옮겨 버린 변절자의 목소리하고 너무 비슷해서 말이야… 그쪽 대화에 갑자기 끼어든 건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전혀 미안해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굳이 덧붙인 말을 보니 약간 비아냥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 같았다.
“이게 누구보고 변절자래? 우리나라 헌법에는 신체의 자유, 종교의 자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덕질의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몰라?”
“응, 그딴 건 몰라. 다만 일제강점기에 친일파가 나라를 팔아먹는 변절 행위를 했었다면, 최근에는 5년 된 친구 한 명이 우리 오빠를 버리고 다른 가수에게로 가 버리는 의리 없는 변절행위를 한 건 내가 잘 알지.”
“이게 누구보고 자꾸 변절자래? 너 오늘 나랑 한판 뜰까?”
“그래 좋다. 안 그래도 의리 없는 친구 년 제대로 교육해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네.”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들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난데없이 싸움이 일어나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거대 팬덤이나 라이벌 가수 팬들끼리 충돌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별로 무리가 크지 않은 두 무리에서 싸움이 난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기해하는 얼굴로 싸움을 구경했다.
잠시 후 머리가 많이 헝클어진 닉네임 ‘서준사랑’을 향해 닉네임 ‘쭌사랑’이 물었다.
“원래 서준사랑 님은 저쪽 분들이 응원하는 보이그룹 팬이었나 봐요?”
그녀의 물음에 ‘서준사랑’은 분이 풀리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샤크 데뷔 때부터 팬이었어요. 이번에 진정한 사랑을 찾기 전까지는 활발하게 활동했었죠.”
“그럼 아까 싸운 분은 친구?”
“정확히 얘기하면 친구였죠. 그것도 그냥 친구가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라서 등하교를 함께 하는 아주 가까운 친구였죠. 물론 지금은 친구가 아니라 원수가 되었어요.”
‘서준사랑’의 말을 듣고 ‘쭌사랑’은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 얼마 전까지 샤크 팬이었다가 이번에 서준 오빠를 보고 팬이 되었나 보네요.”
“맞아요. 서준 오빠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그만 찐으로 덕통 사고를 당하고 말았죠. 그래서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진짜 사랑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요.”
‘서준사랑’의 덕질 히스토리를 듣고 있던 그때,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웅성거리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왜냐하면, 기다리던 가수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먼저 출근길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서준사랑’의 옛사랑들인 보이그룹 ‘샤크’였다.
그들은 7인조 그룹이었는데, 아침부터 풀 세팅된 얼굴에 상큼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출근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오빠!”
“진수 오빠!”
샤크를 기다리던 팬들 무리에는 덕분에 난리가 났다.
그리고 ‘서준사랑’과 심하게 싸우던 여고생도 감격한 표정으로 샤크 멤버들의 이름을 부르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서준사랑’의 반응은 복잡했다.
얼마 전까지 좋아했던 오빠들이 나타났기에 크게 티를 내고 있진 않았지만, 어쩔 줄 모르는 듯 보였다.
아마 말은 안 해도 그녀의 심정은 매우 복잡할 것이 분명했다.
기자들의 요구에 따라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해 주던 샤크가 별관 안으로 들어가자 시끄러워졌던 분위기가 다시 조용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샤크의 팬들은 자신들이 머물던 자리를 치우는 행동을 보여 줌으로써 그녀들이 곧 떠나게 될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바로 그때, 다시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머, 잘생겼어.”
“누구야? 누군데 저렇게 잘생겼어?”
“저 사람 캐릭터 세상에 나왔던 사람이야.”
“작곡가라고 하지 않았어? 작곡가가 음방 출근길에 왜 나타나? 데뷔했나?”
출근길 근처에 모여 있던 팬들은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의 출중한 외모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은 그 남자의 이력에 대해 알고 있기도 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자 ‘서준사랑’과 ‘쭌사랑’도 멀리서 걸어오는 한 남자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 남자를 보던 그녀들의 눈은 점점 찢어질 듯이 커졌다.
왜냐하면, 그토록 만나고 싶은 사람이 바로 드디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서준 오빠!”
이서준의 이름을 크게 외치던 그녀들의 일행은 일제히 가방에서 무서워 보이는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바로 카메라였다.
이서준의 모습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기 위해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최상의 카메라를 준비한 그녀들이었다.
개중에는 전문 포토그래퍼가 들고 다닐 법한 카메라도 군데군데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