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서서히 반응이 온다
내게 관심이 없는 아이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즉흥 연주였다.
이 연주를 통해 내 노래를 들게 될 아이들이 내가 노래하는 동안 마치 내 팬처럼 열광하게 만들고 싶었다.
일단 1단계 목표인 ‘호기심 자극하기’는 성공한 것 같았다.
쳐다보지도 않던 이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으니 성공이라고 생각해야겠지.
그렇다면 다음 목표인 ‘열광하게 만들기’에 돌입할 차례였다.
듣는 이들이 열광하게 만들기 위해서 기타 연주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나의 현란한 연주 실력에 감탄하도록 만들어야 저 녀석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주를 보여 주었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녀석들에게도 반응이 점점 오고 있었다.
그러나, 약간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 속도라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간다면 내가 바라던 반응까지는 도달하기 힘들다고 보였다.
그때, 생각도 못 했던 지원군이 등장했다.
갑자기 내 기타 연주와 어울리는 드럼과 베이스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난 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그러자, 오늘 내 음방을 위해 세션으로 함께하는 연주자 형님들이 날 보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표정은 마치 ‘혼자서는 심심하지? 어때? 같이 신나게 어울려 볼까?’ 하고 묻는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었다.
내 기타 연주가 형님들의 연주 본능을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다.
이제 완성된 로큰롤의 세계.
이걸 듣고 있는데, 목석처럼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다면 그건 단언컨대 어디 건강상의 큰 문제가 생긴 거다.
다행히 지금 방청석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은 건강상의 문제는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신나게 몸을 흔들며 우리의 연주를 즐기고 있었으니까.
서서히 원하던 반응이 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난 처음의 목적을 잊고 어느덧 연주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음악 방송 녹화장에는 난데없는 로큰롤의 세계가 활짝 열려 버렸다.
* * *
이틀 동안 잔 시간이 5시간도 채 못 되었다.
그래서 피곤해 죽을 것만 같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일은 해야 했기에 지금 좀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해야 하는 내 팔자가 문득 서러웠다.
‘확 그냥 사표를 던져?’
이런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 번을 하였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정작 단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와 그대로 쓰러져 잘 것 같았지만, 쏟아져 내리는 졸음을 꾹 참고 녹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귀에 들려오는 기타 소리.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음악이 좋아서 방송국에 들어왔지. 시청자들이 사랑하는 음악 방송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어서 말이야.’
어느새 잊어버렸던 내가 방송국에 지원한 동기가 생각났다.
방송국에서 일하기 위해 엉덩이에 종기가 생길 정도로 일했던 이유가 음악 방송 PD가 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어느새 외로웠던 기타 소리에 베이스랑 드럼이 합세했다.
프로 연주자로 보이는 세 사람의 환상적인 연주가 잠시 잊고 살았던 자신의 락스피릿을 일깨우는 거 같았다.
“이예~”
자신도 모르게 멋진 음악에 대한 탄성이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그때, 귀에 차고 있던 인이어를 통해 총괄 PD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최성국. 지금 녹화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정신 안 차려?]
그의 호통 소리를 듣고 비로소 자신이 본분을 잠시 망각하고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이 든 그는 황급히 무대 앞으로 뛰어가 손을 휘저으며 연주 중단을 요청했다.
“스톱! 스톱!”
신호를 본 가수들이 갑자기 연주를 중단했다.
그때 방청석에서 아쉬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의외에 반응에 놀랐지만, 지금은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지금 시간 없으니 서둘러 녹화에 들어가야 합니다. 아시겠죠?”
“아, 네, 알겠습니다.”
최성국 PD가 다시 물었다.
“준비 다 되신 거 맞죠?”
“네, 준비 다 됐습니다.”
한 번 더 확인한 그는 녹화 시작 사인을 대기 중인 전 스텝에게 보냈다.
“자, 녹화 들어갑니다.”
시작 소리를 들은 무대 위의 남자 가수는 관객석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러분 놀 준비 됐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차는 최성국 PD였다.
‘으이그, 여기가 무슨 홍대 라이브 카페인 줄 아나? 저기 앉아 있는 애들 대부분이 네 뒤에 나올 가수들 기다리고 있는 건데 퍽이나 네 말에 호응이 나오겠다.’
착각에 빠진 무대 위 가수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관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네, 준비됐어요!”
최성국은 이해가 가질 않은 장면의 출연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관객석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시작된 노래.
무대 위 남자 가수는 정말 열정적으로 연주했고, 드럼과 베이스도 마치 콘서트장에서 공연하듯이 열기를 뿜어내며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스으윽.
노래의 첫 소절만 들었을 뿐인데, 곧바로 소름이 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물론 노래도 좋았지만, 가수의 목소리가 압권이었다.
꺄아악.
방청하던 타 가수 팬들 사이에서도 난리가 났다.
아마 자신과 같은 소름 끼치는 느낌을 받았기에 저렇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정신없이 흘러간 1절이 어느새 끝나고 노래 중간 간주 부분이 되었다.
무대 위 남자는 이곳이 음방이란 사실도 잊은 듯 무엇에 홀린 듯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미칠 것같이 멋진 애드리브를 선보인 그는 2절을 시작하기 전 마이크를 잡고 다시 소리쳤다.
“미친 듯이 좋은 사람 소리 질러!”
꺄아아악.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음방 조연출 최성국은, 혹시 지금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어 봤지만, 너무나 아픈 것이 꿈은 분명히 아니란 걸 잘 알 수 있었다.
“…꿈이 아니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장면들은 도대체 뭐지?”
음방 조연출 생활 2년 차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낯선 상황에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마치 콘서트처럼 열광하는 관객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 * *
JYK 홍보실.
국내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답게 홍보실에 근무하는 직원 수도 다른 연예 기획사와 비교해서 상당히 많았다.
수많은 직원이 모여 일하는 이곳에서 이대진 팀장을 중심으로 2명의 여인이 테이블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자, 우리는 오늘도 이서준의 홍보를 위해 열심히 뛰는 거야. 알았지?”
이대진의 모습을 본 최선화는 웃으며 말했다.
“호호, 우리 팀장님 또 대표님에게 한 소리를 들으셨나 보네요. 회의 시작하자마자 파이팅을 외치시는 걸 보니.”
그녀의 말을 들은 이대진은 그녀의 추측이 사실임을 바로 인정했다.
“맞아. 오늘도 일부러 나에게 오시더니 홍보팀이 진행하고 있는 일들 꼬치꼬치 캐물으시더라. 아주 이서준에 관한 관심이 대단하셔.”
“엄청나게 기대하고 계신 건 확실해요. 그래서 그 덕에 이서준 담당인 우리만 스트레스를 받고요.”
갑자기 직장인의 애로 사항을 토로하는 장이 되자 정신을 차린 이대진 팀장이 올바른 회의 주제를 두 직원에게 상기시켰다.
“아, 시간 없으니 회의 시작하자. 대표님 뒷담화는 회사 마치고 술집에서 하기로 하고.”
“오~ 그럼 오늘 마치고 치킨에 맥주 한잔합니까?”
“그래, 내가 쏜다. 모두 콜?”
“콜!”
퇴근 후 일정까지 신속하게 결정한 그들은 이윽고 본격적인 업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앨범 주문은 어때?”
“계속 늘고 있어요. 그것도 폭발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속적으로 주문 숫자가 늘고 있어요. 이대로 간다면 곧 2차 주문을 넣어야 할 거 같아요.”
시작부터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 이대진 팀장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윤정 씨, SNS 홍보는 좀 어때?”
“역시 좋아요. 특히 이서준 씨 영상 조회 수가 계속 급등하고 있어요. 반응이 제대로 오고 있다는 소리죠.”
“오케이, 그것도 반가운 소식이군.”
이서준이 데뷔하고 대중에게 반응이 제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신인이라 팬덤이 형성되기 전이므로 폭발적인 반응까지는 없었지만, 다른 신인 가수와 비교해서 말도 안 되는 빠른 속도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음원 차트 순위는?”
“저쪽 동네에선 30위, 이쪽 동네에선 31위, 마지막으로 이 동네에선 29위네요. 처음으로 30위의 벽을 깼어요.”
“이야, 성장세가 아주 좋은데…….”
김진영에게 보고서를 올리면 그가 좋아할 내용이 다수라 기분이 더욱 좋아지는 이대진 팀장이었다.
직장인은 아무래도 상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야 직장 내 생활이 편해지는 법이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윤정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이세린이 우리 서준 씨 노래 이야기를 자기 SNS에 올렸어요.”
김윤정의 말을 들은 이대진이 깜짝 놀랐다.
“뭐? 진짜?”
“네, 정말요. 직접 보여 드릴까요?”
“그래, 모두 함께 보자.”
세 사람은 가까이 모여 이세린이 올린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제 처음으로 들은 노래 sight… 이 노래 도대체 뭐죠? 우리나라 노래가 아니라 저기 물 건너서 가야 하는 동네에서 들을 법한 노래 같아요. 정말 너무 좋다…….>
내용을 본 이대진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이거 놓치면 안 되지. 기사로 연결하자. 이건 선화 씨가 맡아.”
“네, 팀장님. 기자랑 연락할게요.”
한국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이세린이 칭찬한 셈이니 기사 형식으로 홍보하기에 아주 최적의 소재였다.
이 좋은 홍보 거리를 그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또 있어요.”
“또?”
“네.”
김윤정의 말에 이번에도 놀라는 이대진이었다.
“이번에는 누군데?”
“이정희요.”
“이정희? 내가 아는 그 이정희?”
“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이대진은 다시 보여 달란 몸짓을 보이며 말했다.
“뭐 해? 함께 확인해야지.”
“네, 팀장님.”
다시 조금 전과 같은 자세로 이정희가 올린 글을 확인하는 세 사람.
<미국에서 듣는 이서준 군의 노래. 너무 좋네요. 정말 앞으로 기대가 되는 뮤지션입니다. 나랑 작업하겠다고 한 약속 제발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한국에서 만나요.>
이것 역시 대박 홍보 거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근데, 이정희 씨는 개인 SNS 안 하지 않아?”
이대진의 물음에 김윤정이 답했다.
“해요. 그냥 사진만 올려서 그렇지. 활동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 자신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오래된 팬들을 위해 최근에 찍은 사진을 주로 올렸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글을 직접 올렸다는 거 자체가 아주 이례적인 거죠. 우리 서준 씨를 진심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니까요.”
김윤정의 설명을 들은 이대진은 다시 기분 좋은 말투로 지시했다.
“그럼 이건 윤정 씨가 기사로 연결해.”
“네, 팀장님.”
“그리고 팬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니 팬 관리 시작하자. 내가 회사에 팬 담당 직원 배치 요청할게.”
“네, 안 그래도 지금 인원이면 담당 직원 배치할 때에요. 오히려 늦은 거죠.”
“나도 알아. 그래서 나도 서두르는 거고. 아무튼, 회의를 이것으로 마치고 자기가 맡은 일부터 처리합시다. 오케이?”
“네.”
회의를 마친 세 사람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점점 인기를 얻는 이서준 덕분에 날이 갈수록 할 일이 많아지는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