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토크 버스킹(1)
“저 왔어요.”
“왔니?”
이서준과 나영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연경은, 자신의 인사를 받아 주는 엄마에게 걱정하던 아빠가 집에 오셨는지부터 물었다.
“아빠 왔어요?”
“응, 오셨어.”
“지금 뭐 하셔?”
“오늘 일한다고 피곤하셨는지 밥 먹고 바로 주무신다.”
아빠는 지금 자고 있다는 엄마의 말에 연경은 아빠가 자고 있을 거라 예상되는 안방 문을 조용히 열어 보았다.
곤히 주무시는 아빠.
연경은 아빠의 자는 모습을 앉아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뇨병이 심해져서 생긴 부작용인지 눈에 띄게 살이 빠진 거 같이 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그런 아빠의 모습에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날 뻔했지만,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혹시 우는 소리가 굳게 다문 입 밖으로 새어 나오기라도 하면 주무시는 아빠가 깰 수도 있으니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지금은 내가 노래한다고 할 상황이 아니야. 그러니 포기하자.’
솔직히 다시 가수를 할 수 있다면 무조건 도전하고 싶은 것이 본심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집안 상황을 생각해서는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아빠의 사업 실패로 힘든 상황으로 변한 자신의 집 경제 상황.
사업 실패로 인한 빚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고3 수험생이던 남동생은 이제 내년이면 대학생이 된다.
게다가 아빠의 건강 악화.
원래부터 당뇨가 있으셨는데, 시간이 갈수록 증세가 심해지고 있어 요즘은 합병증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 집안 사정을 뻔히 아는데, 다시 연습생처럼 연습에만 몰두하며 기약 없는 데뷔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캔디걸 활동으로 정산을 받은 것도 없기에 가지고 있는 돈도 거의 없었다.
마침 아는 언니의 소개로 백화점 내 가방 브랜드 매장에서 일할 기회가 생긴 지금은 일을 선택하는 게 맞는 선택이었다.
“너 지금 거기서 뭐 해?”
갑자기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화들짝 놀란 연경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방에서 나오며 엄마한테 말했다.
“뭐 좀 생각한다고 잠깐 앉아 있었어.”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있었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 딸은, 마치 도망치듯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엄마는 딸의 행동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닫혀 버린 딸의 방문만을 하염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 * *
오늘은 tvx 방송국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토크 버스킹’이라는 프로그램의 첫 녹화가 있는 날이었다.
‘토크 버스킹’이라는 프로그램은 버스킹과 토크를 섞은 프로그램인데, 유명한 가수가 비밀리에 섭외된 버스킹 공연 장소에서 노래를 들려주고, 그곳에서 구경하던 관객들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의 음악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맡은 피디는 박지훈 PD였다.
그는 원래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들이 버스킹을 하는 프로그램의 막내 PD로 일하던 PD였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자신이 메인 PD를 맡아 프로그램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원래 하던 프로그램이 그런 프로여서 그런지 전에 하던 프로그램과 매우 유사한 포맷의 프로그램이었다.
“야, 스피커 점검했어?”
“네, 이상 없습니다.”
“카메라 위치는 왜 이래? 약간 오른쪽으로 옮겨.”
“네.”
첫 녹화라 그런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었다.
녹화 준비를 빠르게 훑어보며 미비점을 찾던 박 PD는, 자신에게 가장 불안감을 주는 존재를 우연히 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부터 내뱉었다.
‘하~ 내가 미쳤지. 저런 신인을 뭘 믿고 함께 첫 방송을 하기로 결정했는지…….’
그의 한숨을 만들어 낸 인물은 신인 가수 이서준이었다.
오늘 이서준은 이 프로그램에서 버스킹 공연을 담당할 가수로 초대되었다.
원래는 이서준이 섭외된 가수가 아니었다.
안단테 뮤직의 실력파 뮤지션인 샘리가 원래 섭외된 가수였는데, 그의 갑작스러운 맹장 수술로 인해 급하게 대타가 필요하게 되었다.
서둘러 대타 역할을 맡아 줄 가수를 구했지만, 이제 입봉하는 PD가 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이란 이유 때문에 유명한 가수들은 섭외가 안 되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겨우 구한 대타가 바로 저 친구였다.
안단테 뮤직의 수장이자 유명 작곡가인 유희상은 자신의 소속 가수가 펑크를 낸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직접 나서서 가수를 섭외했고, 그의 강력한 추천으로 박지훈 PD는 이서준의 음악을 들어 보았다.
그의 음악을 듣자마자 박 PD는 그의 너무 멋진 음악에 반하게 되었고, 그에게 출연 제안을 정식으로 보냈다.
잠시 후 출연하겠다는 답을 듣고 직접 만나게 된 이서준은, 자신의 예상보다 음악을 더 잘했다.
전문 세션보다 낫다고 여겨지는 기타 연주는 물론이고, 직접 들어본 그의 노래는 감히 말하건대 지금까지 들어본 어느 가수의 노래보다도 뛰어나게 들렸다.
그래서 전격적으로 그의 출연이 결정되었고, 오늘 이 첫 녹화장에서 그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첫 미팅 때와 다른 이서준의 약간 어리숙해 보이는 모습으로 인해 없던 불안감이 새롭게 생겨 버렸다.
이 프로그램은 출연 가수가 그냥 노래만 하면 되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의 포맷에 맞게 관객도 진짜 버스킹 장소를 지나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참석하였고, 관객과의 토크 내용 등도 정해진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 프로그램 포맷 때문에 진행자는 마이크만 주어지면 토크만으로 2시간짜리 콘서트가 가능하다는 김제영에게 맡겼지만, 가수 역시 재치 있는 멘트 정도는 가끔 양념처럼 해 줄 수 있어야 했는데, 지금 보이는 이서준의 모습은 정해진 노래조차 제대로 하겠냐는 의심이 들 정도로 어리숙해 보였다.
그런 어리버리해 보이는 출연자에게 가려던 박지훈 PD의 발걸음은 첫걸음을 떼자마자 멈추었다.
가서 마땅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마음에 조금 전에 직접 만나서 확인해 봤는데, 다행히 오늘 연주할 곡과 녹화 순서 등은 정확하게 숙지한 상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잔소리 같은 조언도 폭탄처럼 퍼부어 놓은 상황이라 지금 다시 뭐라 하기도 그랬다.
‘에잇, 어떻게든 되겠지. 최악의 상황이면 이 프로그램 파일럿만 촬영하고 끝내면 되는 거야. 그럼 난 다시 다른 프로그램에 가서 막내 PD로 선배들 뒤치다꺼리나 좀 하면서 내 다음 프로그램 준비나 하면 돼.’
지금에 와서 촬영을 접을 수도 없는 법이니 그냥 한번 밀고 나가는 방법밖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박지훈 PD는 일부러 이서준에게서 눈을 돌려 다른 곳을 쳐다봤다.
자꾸만 자신에게 불안감을 안겨 주는 애물단지는 지금은 그냥 안 쳐다보는 게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아주 이성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 * *
드디어 떨리는 녹화 시작의 순간이 되었다.
박지훈 PD 역시 자신이 메인으로 하는 첫 프로그램 녹화니만큼 무척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지훈 PD는 너무 많이 긴장해서 창백한 얼굴빛으로 변해 버린 얼굴빛으로 녹화 시작을 알렸다.
“자, 녹화 시작하겠습니다. 레디 큐~”
PD의 녹화 시작 신호를 들은 진행자 김제영은, 웃는 얼굴로 마이크를 들고 멘트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토크 버스킹의 사회를 맡은 김제영입니다.”
와아아아.
그의 인사에 버스킹 장에 앉아 있던 수십 명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 감사합니다. 저희 프로가 첫 녹화를 이곳 부산 해운대에서 하는데요. 화끈하다고 알려진 부산 분들답게 호응이 아주 제대로네요. 부산, 우리가 왔다.”
와아아아.
작고 못생긴 외모이지만, 현란한 말솜씨로 유명한 그답게 처음부터 재밌는 멘트로 버스킹 무대를 함께 해 주는 고마운 관객들을 웃기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박지훈 PD는 그나마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저희 프로그램 이름이 토크 버스킹입니다. 그러니 버스킹 무대가 빠질 수는 없지요. 일단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관객분들이 아무리 제가 잘생겼지만, 잘생긴 제 얼굴만 보고 앉아 계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있어요.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여자 관객의 뜬금없는 외모 칭찬에 김제영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크크, 이런 반응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젠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때도 됐는데 이상하게 오늘도 기분이 좋네요. 그리고 TV 화면을 보시는 분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 짓지 마세요. 저 사실 실물이 화면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렇죠, 여러분?”
“네.”
관객 반응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진짜로 기분이 좋아지는 김제영이었다.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은 녹화 날 어떤 관객분들이 함께해 주냐에 따라 촬영 장면이 크게 달라지는데, 오늘은 제법 괜찮은 관객들이 함께하는 거 같아 안심이었다.
“일단 프로그램 시작은 버스킹 무대로 시작해 볼게요. 오늘 저와 함께해 주는 가수가 실력이 진짜 부산말로 쥑입니다. 신인가수 이서준 씨입니다.”
김제영의 소개가 끝이 나자 기다리고 있던 이서준의 기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확한 타이밍에 시작된 이서준의 연주에 걱정하던 박지훈 PD는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서준이 첫 노래로 선택한 곡은 ‘붉어진 노을’이란 일명 국민노래였다.
현재 가요계의 살아 있는 레전드라 할 수 있는 가수 이문진이 부른 이 노래는, 경쾌한 리듬과 흥겨운 멜로디로 약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랑받아 온 명곡 중에 명곡이자 전 국민의 애창곡이었다.
♪붉어진 노을 사라져 간 하늘을 보고 있어요.♩
와아아.
경쾌한 리듬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이서준의 모습에 관객들은 환호성을 보냈다.
이서준이 첫 곡으로 이 노래를 선택한 이유는 제작진의 요구 사항 때문이었다.
토크 버스킹이란 프로그램 자체가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전 세대를 두루 아우를 수 있는 곡을 불렀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제작진이 이서준에게 먼저 한 것이다.
이서준은 그런 제작진의 요청에 따라 이 노래를 준비해 왔다.
원래의 곡을 최대한 살리면서 이서준만의 감성이 담기도록 편곡한 버전의 곡이었는데,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흔들어 대고 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자신도 아는 노래라 즐겁게 따라 부를 수 있었고, 젊은 측에 속하는 관객들도 요즘 스타일 곡처럼 느껴지는 멋진 편곡에 이미 아는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새롭게 느껴지는 이서준만의 마법을 경험하고 있었다.
거기다 이서준의 명품 보컬이 제대로 더해지니 어느덧 녹화장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마치 콘서트장에 온 관객들처럼 이서준의 노래에 흠뻑 빠져들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즐거웠던 약 5분간의 노래 시간이 끝나고, 즐거움을 느낀 관객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를 이서준에게 보냈다.
그 모습을 본 박지훈 PD는 생각보다 좋은 이서준의 라이브 공연에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다시 마이크를 잡은 김제영.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이서준을 향해 말했다.
“서준 씨, 노래 정말 좋았어요.”
“아, 감사합니다.”
먼저 좋은 노래를 들려준 이서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그는, 다시 관객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저 친구 사실 제가 좋아하는 얼굴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자, 저와 저 친구 얼굴을 동시에 보시며 비교해 보십시오. 완전 저와 종부터 다르다는 게 바로 느껴지죠?”
하하하.
관객들은 김제영의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그런 관객들을 보며 김제영은 말을 이었다.
“저 친구가 그 유명한 JYK 소속입니다. 그리고 놀라시지 마십시오. 저 친구가 작곡가로서도 엄청 유명하다고 합니다. 같은 소속사의 워너비 걸즈하고 쓰리타임즈 최근 노래도 저 친구가 작곡한 노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사실 저 친구가 오늘 저와 같이 녹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개인적으로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김제영의 말에 집중한 관객들은 어느새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JYK 소속 가수들은 모두 잘생기고 예쁜 얼굴이잖아요. 그리고 멋진 옷과 화려한 무대에 잘 어울리는 가수들이니 우리 프로그램같이 길바닥 냄새나는 프로그램에 어디 어울리겠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그의 의중이 궁금해진 관객들은 더욱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근데 이거 웬일입니까? 오늘 보니 너무 잘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덕분에 이곳 분위기가 완전히 살았어요. 그래서 제가 저 친구에게 나중에 제대로 사과해야겠습니다. 제가 색안경을 끼고 저 친구를 바라봤어요. 그렇게 전부터 남들보고 색안경 끼고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고 외쳤던 제가요. 아주 부끄럽습니다.”
그때, 가만히 김제영의 말을 듣고 있던 이서준이 갑자기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