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토크 버스킹(2)
이서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색안경 이야기를 하시니까 생각나는 노래가 있네요.”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이서준의 말에 김제영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생겨났다.
“무슨 노래가 생각이 나는데요?”
“사람들이 살아가며 받게 되는 편견에 대해 노래한 곡이 있는데요. 요즘 인기가 제법 많은 곡입니다. 제목은 sight라고 하고요.”
슬쩍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김제영.
그래서 물었다.
“누가 부른 노랜데요?”
“이서준이란 가수가 부른 노랩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얼굴도 아주 잘생겼는데, 노래도 엄청 잘한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곡도 좋고요.”
김제영은 오래된 노래 마니아답게 최신곡에 가까운 ‘sight’라는 노래는 잘 몰랐다.
근데 방금 말한 가수 이름이 이서준이라면 지금 자신과 이야기하는 눈앞의 있는 사람 이름과 같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당신 이름이 이서준 아니에요?”
“네, 맞습니다.”
“그럼, 방금 말한 노래가 당신 노래라는 말이 되잖아요.”
“네, 그것도 맞습니다.”
“에라이!”
이서준이 농담을 건넨 것을 알게 된 김제영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신인 가수가 방송에 나온 것이라 긴장해서 얼어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의 예상을 깨고 중간에 양념과 같은 멘트를 치며 들어왔기 때문이다.
혼자 멘트 친다고 고생 엄청나게 하겠다는 예상을 하고 시작한 방송인데, 의외로 재치 있는 이서준의 모습에 오늘 방송이 생각보다 잘되겠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지금 상황에 맞게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하여튼 이래서 잘생긴 것들하고 내가 상종하기 싫다니까요. 저 잘생긴 게 사람이 방심하는 틈을 타 자기 노래 홍보하고 있잖아요. 여차하면 완전히 당할 뻔했어요. 여러분, 저 사람 정말 너무 뻔뻔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동의를 얻으려는 듯이 김제영이 말했지만, 관람 중인 여성 한 분이 의외의 말을 큰소리로 외쳤다.
“sight 듣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김제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친 여자 관객에게 물었다.
“진짜요?”
“네!”
“허어, 이것 참…….”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마음을 나타내는 몸짓을 하던 김제영은, 이젠 오기가 생긴 듯 한번 붙어 보자는 식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한번 들어 봅시다. 지 말대로 진짜 가사가 그런 내용인지도 직접 들어서 확인해 보고, 본인 입으로 지 노래가 인기 많다고 하니 진짜 인기가 있을 만한 노래인지 내가 아주 냉정하게 들어줄 테니 한번 제대로 불러 보세요.”
마치 골이 난 사람처럼 말하는 김제영이었지만, 사실은 이서준의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속내가 담긴 행동이었다.
초반에 분위기 좋게 치고 나와 준 이서준을 향한 고마움이 담긴 배려이기도 했다.
“진짜 할까요?”
“해 봐요. 얼마나 잘하는지 진짜로 들어 봅시다.”
이서준은 김제영의 배려에 미소 지으며 노래를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어쿠스틱 기타 버전의 ‘sight’를 부르게 되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본래의 강력한 락 사운드가 아니라 미디움 템포의 어쿠스틱 버전의 노래였다.
원래의 버전보다 훨씬 감미로운 느낌이 가미된 편곡 버전의 노래였기 때문에 노래를 모르는 사람들도 충분히 즐기며 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고 관객의 박수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김제영이,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서준을 향해 말했다.
“뭐… 노래는 나쁘지 않네요. 가사도 말한 대로의 내용이고요…. 뭐 일단 좋습니다. 나중에 저 건방진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 좋은 기회가 올 겁니다. 그때는 제가 저 건방진 신인 가수의 버릇을 제대로 고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오늘 버스킹에 오신 분들하고 잠깐 이야기를 좀 나눠 볼까요?”
자연스럽게 진행을 이어 가는 김제영의 모습은 역시 베테랑 진행자다운 노련한 진행이었다.
토크 버스킹이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우연히 함께한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며 일반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김제영은 인터뷰가 가능한 사람들을 눈치로 살핀 후 마이크를 가져갔다.
처음에는 인터뷰하는 것을 주저하던 관객들도 김제영의 재밌는 입담과 노련한 진행으로 하나, 둘씩 인터뷰에 응하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을 인터뷰를 하던 김제영은, 어느덧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한 여학생 앞에서 말했다.
“제가 오늘 여기서 여러분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주제가 위로라고 했었죠? 우리 예쁜 여자분은 혹시 제게 위로받고 싶은 사연이 있을까요?”
잠시 주저하던 여학생은 최근에 속상했던 일 한 가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예전부터 좋아하던 같은 반 친구에게 용기를 내서 사귀자고 고백했어요. 근데 걔가 제 마음을 안 받아 줬어요.”
“아이고, 너무 속상했겠네요. 지금 보니 너무 예쁜 친군데 그 남학생은 왜 우리 학생의 고백을 안 받아 줬을까요? 전 전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여학생의 속상한 마음을 위로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김제영은, 다시 여학생을 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아저씨가 우리 학생 위로해 주고 싶은데, 아저씨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의 말에 여학생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기 서준 오빠가 저를 위한 노래 한 곡만 불러 주시면 힘이 날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김제영은 뭔가 씁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죠. 위로도 못생긴 저보다는 저기 앉아 있는 잘생긴 오빠가 해 주는 게 더 위로가 되죠? 뭐, 좋습니다. 저기 서준 씨, 이 여학생을 위한 노래 한 곡 불러 줄 수 있어요?”
이서준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마이크를 잡았다.
“제 생각에는… 우리 여학생이 정말 예쁘다는 걸 그 남학생이 어려서 잘 모르는 거 같거든요. 조금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근데 우리 학생 이름이 뭐죠?”
“최현지요.”
“우리 현지 학생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미래의 멋진 남자친구를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미래의 남자친구가 우리 현지 양을 보고 반하는 내용을 노래를 불러 드리면 현지 양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때요, 현지 양?”
“너무 좋아요.”
그때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다시 든 김제영.
그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이서준에게 물었다.
“노래 제목이 뭐예요?”
“예쁘다입니다.”
“…혹시 그것도 네 노래?”
“…네.”
김제영은 이제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서준을 바라봤다.
“…회사에서 도대체 무슨 교육을 한 거야? 무슨 신인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기 노래를 홍보해?”
어이없는 수준을 넘어서 황당해하는 그를 보며 이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다른 노래를 할까요?”
그러나 이미 잔뜩 기대하는 소녀가 눈에 보인 이상 다른 노래를 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냥 하세요.”
“넵.”
왠지 신나 보이는 이서준의 모습에 김제영은 여전히 그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준은 그런 김제영의 반응에도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날이 너무 좋아 걸었지. 따스한 햇살에 기분이 좋았어.♪
♩그러다 문득 너를 보게 됐지. 햇살보다 밝게 빛나던 너를.♪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설레는 남자의 마음이 아주 잘 느껴지는 그런 곡이었다.
이서준의 노래를 듣고 있던 사연의 주인공은 마치 자신이 노래 속의 여자 주인공인 된 것처럼 무척 설레는 표정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녹화를 지켜보던 박지훈 PD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까지 녹화는 자신의 방송용 감에 따르면 대성공이었다.
메인은 처음이지만 자신도 올해로 방송국 생활을 한 지가 어느덧 3년이 넘어가는 터라 지금의 감은 분명히 들어맞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너무 잘하네.’
그는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이서준을 바라봤다.
노래를 잘하는 것은 원래부터 알았다.
그러나 중요 출연자로서 방송 중에 한마디도 안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잘해 주고 있었다.
이대로 녹화가 계속된다면 정규 편성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져도 충분히 될 정도로 녹화는 아주 잘 진행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다시 인터뷰하는 식으로 녹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 인터뷰 상대를 물색하던 김제영은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눈을 가진 20대 여성에게 마이크를 가져다 댔다.
“혹시 요즘에 위로받고 싶으신 일은 없으셨나요?”
그의 물음에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있긴 한데…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그런 그녀를 보며 김제영은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시기 어려우면 안 하셔도 돼요. 부담 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다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면 한번 해 보셔도 좋을 거 같아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생각보다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끼실 거예요. 그리고 속에 담고 있던 고민을 꺼내는 용기를 한번 내 보시면 생각보다 고민 덩어리가 아주 작아진 걸 느끼실 겁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고민을 털어 놓는 용기를 내 보시면, 생각보다 따뜻한 위로에 마음이 포근해지실 거예요.”
주저하던 그녀는 김제영의 이러한 말에 마음이 변하고 있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이 당신의 고민을 듣고 함께 공감하실 준비가 다 된 거 같아요. 어때요? 용기 한번 내 보실래요?”
김제영의 말에 용기가 생긴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부산에 살고 있는 이정희라고 합니다. 현재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청춘들처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계신 중이군요.”
“네. 근데 얼마 전에 시험이 있었는데, 또 잘 안 되었어요. 무려 3년째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올해만 벌써 9급 공무원 시험이며 경찰 공무원 시험 등 여러 차례 떨어졌어요. 처음에는 공부한 기간이 짧아 그렇다는 핑곗거리라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핑계를 댈 만한 이유도 없어 너무 힘드네요.”
그녀의 말에 녹화 중인 장소에 앉아 있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올해 시험에 떨어지고 더 힘든 이유가 항상 저를 지켜 주던 아빠가 없어서예요. 아빠가 작년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만약 지금 제 곁에 계셨다면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라는 말로 절 위로해 주셨을 텐데… 이제는 그런 위로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슬프네요.”
가슴이 찡한 사연에 노련한 진행자인 김제영 역시 할 말이 없는 듯 숙연한 눈동자로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조용히 기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서준이 치는 기타 소리였다.
이서준은 기타를 치며 마이크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가 정희 씨에게 이런 노래를 불러 주고 싶으실 거란 생각이 듭니다.”
♩♪♪♩
이서준의 본격적인 연주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그가 무슨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주 유명한 노래라서 이 노래의 반주까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함께 노랠 부릅시다.♪
어느덧 버스킹 장소에 앉은 모두가 따라 부르기 시작한 노래.
이 노래는 대한민국 가요사에 몇 안 되는 레전드 중에 한 명인 권인석의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노래였다.
가수 본인이 외로운 자신을 직접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작곡한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노래이기도 했다.
이서준은 자신의 노래를 통해 방금 사연을 말한 주인공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노래했다.
♩떠난 사람에게 노래해 주세요. 진심으로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저 담담하게 부르고 있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이 찌릿해지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듣고 있던 사연의 주인공인 이정희는 어느새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고 있었다.
“흑흑…….”
그런 그녀 옆에는 진행자 김제영이 앉아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해 주고 있었다.
어느새 노래가 끝났다.
그리고 진행자인 김제영이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여기 함께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 진심으로 정희 양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정희 양도 그게 느껴지죠?”
김제영의 말에 이정희는 눈물을 너무 흘려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기에 김제영은 조금 웃는 모습으로 모두를 향해 말했다.
“자,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 우리 정희 양을 위해서 힘을 내라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 줄까요?”
그렇게 시작된 박수와 응원.
짝짝짝짝.
“힘내요.”
“저도 시험에 떨어졌어요. 우리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함께 합격해요.”
힘내라는 응원의 말을 외치는 사람도 있었고, 그녀처럼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함께 힘을 내며 합격하자는 바람을 외쳤다.
그런 응원의 말들에, 울던 그녀는 어느새 눈물 대신 작은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사람들에게 말했다.
“위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보고 있던 박지훈 PD는 속으로 확신했다.
‘이 프로 뜬다.’
그의 방송용 감은 이번에는 자신이 만든 이 프로그램이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을 거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