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미니 앨범(2)
아빠는 그런 연경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에 우리 딸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쉬운 사람도 없을 거다. 넌 고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항상 너무 티가 나. 너 앞으로 사회생활 잘하려면 그런 부분들은 고쳐야 할 거야.”
부모라서 더 잘 느낄 수도 있지만, 실제 연경을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숨기기 어려워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터라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되는 아빠의 말이었다.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연경을 향해 이번에는 조용히 미소짓고 있던 엄마가 천천히 입을 여셨다.
“가수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고백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연경이 네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엄마와 아빠는 네 표정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어. 그러니 우리는 네가 힘들어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노래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단다. 이번에 회사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가수 키우는 회사가 거기만 있는 건 아니잖니.”
“그래, 맞아. 설혹 너를 받아 줄 소속사를 구하지 못해도 좋아. 그냥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애들도 있잖아. 그런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 행복하면 우리는 아무 상관 없어.”
연경은 그제야 부모님이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엄마와 아빠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가까운 삶을 살며 행복하길 바라고 계셨다.
부모님의 커다란 사랑이 느껴지는 말들이어서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연경은 엄마의 말에 그냥 ‘네’라는 대답을 선뜻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런 배짱이 같은 삶을 살 때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족의 힘듦은 외면하고 자신의 꿈만 좇으며 살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사는 것은 옳지 못한 거란 생각했다.
그래서 이왕 가수 활동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이번 기회에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부모님께 제대로 전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엄마, 아빠. 말은 고맙지만 나 이제 가수는 그만할 거에요. 가수로 데뷔하는 꿈도 이뤘으니 더 이상 미련 없어요. 그리고 아빠는 날이 갈수록 당뇨병이 더 심해지고 있고, 연석이도 내년이면 대학생이 되어요. 그러니 이제는 나도 꿈만 보고 사는 철없는 짓은 그만해야죠. 언제까지 꿈속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
딸의 말을 들은 아빠의 눈빛은 복잡해졌다.
자신의 딸이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꿈을 좇는 삶을 철없는 행동이라 말하는 딸의 조숙한 말이 자기가 부족해서 나온 말처럼 느껴져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딸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것이 싫었다.
“네가 뭐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지 아빠도 잘 알아. 그리고 그게 다 이 아빠가 못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니에요, 아빠. 그게 왜 아빠 탓이야? 아빠가 우리 가족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모두가 아는데 왜 그런 소리를 해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연경의 말을 들은 아빠는 고마운 마음에 테이블 위에 놓인 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자신의 딸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 줘서 아빠가 너무 고마워. 아빠가 고마운 김에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 네가 집안일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사는 건 절대 아빠를 위하는 게 아니야. 집의 일은 그냥 아빠를 믿고 기다려 줘. 그리고 너는 그냥 네가 행복한 삶을 살아. 그게 바로 아빠를 위하는 길이야.”
아빠는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예전에 네가 JYK 연습생으로 들어가고 연습생 부모님들 앞에서 공연을 보여 준 적이 있었어. 분명 너도 기억이 날 거야.”
연경 역시 기억이 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아빠는 그 전까지 네가 가수를 지망하는 게 못마땅했단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현실의 높은 벽에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네가 기획사 오디션을 보는 걸 만류하지 않았거든. 근데 네가 떡하니 붙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 역시 큰 고민에 빠졌단다. 난 그때 네가 분명 화려한 연예인을 동경해서 따라 하는 그 나이 대의 치기 어린 행동을 하고 있는 줄 알았거든.”
아빠의 고백과 같은 옛이야기를 듣고 연경은 속으로 많이 놀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 한 번도 자신이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반대한 적이 없는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속으로는 저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셈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네가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된 거지. 그때 내가 본 네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단다.”
아빠는 말을 하다 보니 그때의 귀여운 연경이 모습이 점점 생생히 되살아 나는 듯한 기분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후 말했다.
“살 뺀다고 그렇게 힘들어하던 네가, 어릴 때 내가 사 온 초코케이크를 보고 기뻐하던 어린 시절의 너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더구나. 그래서 그때 깨달았지. 네가 정말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아빠의 말이 계속될수록 연경은 점점 입을 열기가 힘들어졌다.
부모님의 큰 사랑의 무게감 때문에 목이 멨기 때문이다.
그런 딸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아버지는 진심을 담긴 마지막 말을 딸에게 전했다.
“아빠가 가장 행복한 건 네가 돈을 벌어서 집에 보태는 것이 아니야. 내가 많이 부족해서 집이 지금은 조금 어렵지만,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네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게 날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러니 딸… 네가 계속 원하는 걸 하도록 해. 아빠와 엄마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아빠의 말을 들은 연경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눈물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는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감하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된 것이다.
옆에 앉은 엄마는 울고 있는 딸을 조용히 안아 주었고, 아빠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그래서 연경은 그동안 참아 왔던 눈물을 모두 쏟아 낼 수 있었다.
* * *
현재 가요계에서 가장 최정점에 가까운 가수 중 한 명인 이세린의 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하품이 나올 정도로 따분한 의외의 일상을 보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집과 작업실, 이 두 곳에서만 살다시피 하는 그녀는 오늘도 두 곳 중 한 곳인 작업실에서 곡 작업에 한창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 띤 얼굴로 조용히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녀의 정체는 배영숙 팀장이었다.
이세린과는 로드 매니저로 첫 인연을 맺은 후 지금의 팀장직에까지 오른 입지적인 경력으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배영숙 팀장은 언제나처럼 귀여운 이 회장님(?)을 놀리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렇게 이세린과의 거리가 한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기타를 연주하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제는 나 놀라게 하는 장난은 졸업할 때도 되지 않았어? 도대체 내가 몇 살이 될 때까지 이런 아이 같은 장난을 계속 칠 거야?”
그녀의 말을 들은 배영숙은 멋쩍은 얼굴에 이세린을 향해 말했다.
“어, 내가 다가오는 거 알았어?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배영숙 팀장의 물음에 이세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언니가 저 뒤에서부터 그렇게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다가오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정말 나 모르게 다가오려면 코부터 막아.”
“야, 코 막으면 숨은 어떻게 쉬냐? 너 놀리려다가 숨이 막혀 죽을 수는 없잖아?”
“그럼 그런 유치한 장난을 안 하면 되지.”
배영숙 팀장은 까칠하게 구는 이세린을 뒤에서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네가 놀라는 표정이 얼마나 귀여운지 넌 모르지? 그 표정을 내가 어떻게 포기하냐? 그러니 장난은 절대 포기 못 해.”
“으이그,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하하, 간지러우니까 떨어져.”
“싫어.”
자신을 사랑하는 배영숙의 마음이 담긴 장난에 까칠한 표정을 짓던 이세린도 결국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세린과 몸으로 인사를 나눈 배영숙은 그녀가 좋아할 만한 소식부터 얼른 전했다.
“JYK에서 연락 왔어.”
“헉! 진짜?”
“응. 저쪽에서도 우리의 제안에 좋다는 의사도 보내왔고.”
배영숙 팀장의 말을 들은 이세린은 갑자기 상기된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곧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럼 나 이서준 씨랑 만나야 하는 거야?”
“그럼 만나야지. 안 만나고 콜라보 작업이 되겠어?”
“안 되지. 그럼 어쩔 수 없이 만나야겠네. 근데 언니 나 옷부터 갈아입을까? 지금 입고 있는 긴 치마는 너무 아줌마처럼 보이지 않아?”
“야, 오늘 만날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옷 타령이야. 약속 시간하고 만날 장소도 정하지 않았잖아.”
“아, 맞다. 그것도 그러네. 그럼 지금은 이 옷 그냥 입고 있어도 되겠다.”
당황하면 약간 어리버리해지는 것도 이세린의 오래된 특징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배영숙의 얼굴에는 이채가 생겨났다.
“근데, 너 이상하다. 왜 그렇게 당황해? 이서준하고 콜라보하는 일이 네가 그렇게 당황할 일이야? 다른 가수와 콜라보 작업을 이번에 처음으로 하는 것도 아니잖아.”
배영숙 팀장의 말을 들은 이세린은 본인 스스로도 많이 당황한 자신이 이상한지 잠시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는 잠시 그 이유를 고민해 보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너무 기대가 커서 그런가 봐.”
“기대가 크다고?”
“응. 그 사람이 만든 노래를 듣다 보면 순간순간 감탄하게 될 때가 정말 많거든. 이 노래의 어떤 부분에 어떻게 저런 리듬을 넣을 생각을 했을까? 저 멜로디는 어떤 영감을 받아 만들었을까? 이렇게 직접 묻고 싶을 때가 너무 많았거든. 근데 그랬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기대가 안 돼?”
배영숙 팀장은 혼잣말처럼 계속 중얼거리는 이세린의 모습을 보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저런 모습이 뜻하는 바를 그녀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고, 저 금사빠가 또 훌러덩 빠져 버렸네.’
이세린은 어떤 대상이 멋져 보이거나 감탄하게 되면 그 대상에 금방 빠져 버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람에게 빠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그랬다면 연애한다고 바빠 지금과 같은 커다란 성공은 분명 못 이뤘을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불길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근데 이서준이 많이 잘생겼잖아.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은근한 매력이 풍기는 페이스던데… 설마 같이 작업하다가 둘이 정분나지는 않겠지?’
나이는 이세린이 이서준보다 2살이 더 많았지만, 요즘은 연상연하 커플이 많은 편이라 나이가 문제가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현재 이세린이 교제 중인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가 누군가와 예쁜 사랑을 키우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세린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인 배영숙 역시 진심으로 바라는 바였다.
그러나 이서준이란 남자가 이세린을 맡겨도 되는 괜찮은 남자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인지라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었다.
JYK에서 온 연락을 전하다가 갑자기 이세린의 연애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하는 배영숙 팀장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이세린은 이서준과의 만남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영숙 언니, 이왕 말 나온 김에 얼른 미팅 날짜와 시간부터 잡자. 그리고 장소는 내가 JYK에 가도 되고, 그 사람이 내 작업실에 와도 되겠지. 아, 아니다. 우리 회사보다 큰 회사 작업실을 썼으니 우리 회사 작업실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어느새 신이 나서 쫑알거리는 이세린의 모습에 배영숙의 쓸데없는 걱정은 더 깊어져만 갔다.
* * *
콜라보하기로 결정이 난 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어 나와 실장님은 이세린 선배의 회사로 향했다.
오늘은 스케줄도 없는 날이라 나 혼자 가도 된다고 했지만, 실장님은 그럴 수 없다며 따라나섰다.
찬식이와 은비는 오랜만에 달콤한 자유 시간을 주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차가 어느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와 굳이 비교하면 아담한 건물에 이세린 선배가 몸담고 있는 회사 사명이 적힌 간판이 보였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루비엔이네요.”
내 말을 들은 조 실장이 웃으며 루비엔이라 회사에 대해 설명해 줬다.
“원래는 문 닫을 뻔한 회사였지. 이세린 앞에 키우던 보이그룹이 잘 안됐거든. 천만다행으로 이세린이 터지는 바람에 회사가 살았어. 그리고 역시 이세린 덕분에 자기 사옥까지 가진 회사로 성장했고.”
한 명의 가수가 성공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잘 알 수 있는 사례였다.
내가 몸담고 있는 JYK도 여러 선배들의 성공 덕분에 이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감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우리는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