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love letter(2)
보람찬 하루였다고 말하는 이서준을 보며 조상구 실장은 오늘 두 사람의 콜라보 작업이 꽤 진척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자신이 구상했던 이세린과 이서준의 멋진 콜라보 무대를 실제로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자신은 이서준의 매니저로서 어떤 무대에 두 사람을 어떻게 세우는 것이 가장 빛나 보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시작할 때였다.
‘방송국에 한번 들어가야겠네. 그리고 오랜만에 방송국 사람들하고 술자리도 좀 가져야 할 거 같고.’
예전부터 오랜 시간 동안 좋은 인연으로 지내온 사람들이 지금 현재 방송국에서 요직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과 이야기해 보면 제법 괜찮은 프로그램에 이서준을 출연시킬 수 있을 거 같았다.
물론 요즘은 무슨 법이 만들어진 이후로 옛날처럼 대놓고 하는 접대 문화는 방송가에서도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전 유명 방송 PD가 연예 기획사 사람에게 부정 청탁을 받고 방송을 조작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전 국민에게 보도되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자신과 그들은 과거의 인연과 같은 끈끈한 정으로 이어진 사람들이니 굳이 청탁 같은 부탁은 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무대를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하긴 요즘은 이 녀석이 잘 나가서 내가 방송을 만들어 주기보다는 잘라 내는 게 더 많으니…….’
요즘 방송가에서도 이서준의 주가는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막말로 노래 되고 얼굴 되는데, 거기다가 방송도 매우 잘하는 편이라 방송국의 여러 PD가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원래 ‘토크 버스킹’에서 이서준이 맡은 역할은 말보다는 노래와 연주를 하는 역할이었는데, 이제는 거의 김제영과 동등한 진행자 역할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멘트를 많이 했다.
최근에 김제영과 이서준이 재밌고 재치 있는 말을 주고받는 짤이 온라인상에 유명했는데, 이 짤은 토크 버스킹을 광고하기 위해 방송국에서 특별히 제작한 홍보용 영상이었다.
이 영상에는 이서준의 재기 넘치는 모습이 많이 담겨 있었는데, 이것만 봐도 그가 방송 프로그램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이서준은 순진한 녀석이었고, 또 똑똑한 녀석이었다.
평소 때의 약간 어리버리해 보이는 겉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오판하는데, 보이는 겉모습만으로 쉽게 생각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서준의 진면목 때문에 놀랄 일이 점점 많아지는 조상구였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 보니 오늘 배영숙 팀장과 햄버거를 사러 갈 때 나눴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몇 시간 전.
조상구와 배영숙은 자신의 가수들이 먹을 햄버거를 사기 위해 함께 가게로 향했다.
요즘같이 배달 앱 하나면 어떤 음식이든 주문할 수 있는 편리한 시대에 배영숙은 무엇 때문인지 본인이 직접 햄버거를 사러 가야 한다고 말했고, 딱히 할 일이 없어 무료했던 조상구도 어쩌다 보니 동행하게 된 것이다.
“양파는 많이 넣어 주시고요, 토마토도 많이 넣어 주세요. 그리고 양상추는 조금만 넣어 주시면 돼요. 그리고 여기 치즈는 어떤 걸 쓰나요?”
수제 햄버거집에 와서 햄버거를 만드는 사장님 옆에 딱 붙어 온갖 잔소리를 퍼붓는 배영숙의 모습이 무척 신선하게 보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햄버거를 포장해서 다시 작업실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에 조상구가 배영숙을 보고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햄버거를 사 오는 일 정도는 다른 직원에게 시켜도 될 텐데, 직접 움직이시네요.”
그의 물음에 배영숙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우리 세린이가 의외로 몸이 약해서 먹는 건 제가 직접 챙겨야 해요. 저번에 제가 일이 생겨 다른 직원에게 맡겨 놓고 신경을 못 썼더니 아주 엉망인 음식을 세린이에게 먹이고 있더라고요. 그걸 본 뒤부터는 시간만 되면 세린이가 먹을 건 웬만하면 제가 직접 챙겨요. 사람이 건강하려면 먹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조상구 실장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세린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그 애정의 깊이가 너무 잘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난히 사이가 좋은 연예인과 매니저로 소문난 이유가 다 이런 점들 때문일 것이다.
“팀장님은 이세린 양을 진심으로 챙기시는 것 같네요. 너무 보기 좋습니다.”
“매니저가 자기 가수 챙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하하하.”
배영숙은 조상구의 칭찬에 멋쩍은지 웃어 버렸다.
그리고 조상구는 그런 배영숙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조상구의 눈빛 때문일까?
아니면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 통하는 면이 많아 그랬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늘 처음 만난 조상구에게 속에 있던 진솔한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 그녀였다.
“제 인생은 세린이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어요. 세린이를 만나고 제 삶이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그냥 딱히 할 게 없어 시작한 일이 로드 매니저인데, 세린이와 일하면서 매니저 일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생겼어요. 그래서 그 이후부터 많이 노력했고요. 근데, 노력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처음 로드 매니저 말고 총괄 매니저를 맡았을 때, 부끄러워서 말 못 할 정도의 어이없는 실수도 정말 많이 했어요.”
이쪽 업계에서 일 잘하는 사람으로 소문난 배영숙이 처음에는 실수를 많이 했다는 말이 의외였다.
“그래서 한 번은 세린이를 향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네 일을 나보다 일을 더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면 어떻겠냐고요. 그랬더니 세린이가 저보고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뭐라고 했는데요?”
“일 잘하는 사람보다 믿을 수 있는 언니랑 일하는 게 훨씬 행복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저를 보며 실수해도 좋으니 제발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누군가에게 제가 믿음을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그다음부터 잠도 못 자 가면서 엄청나게 노력했죠. 세린이가 날 믿으니 그 누구보다 일 잘하는 프로 같은 매니저가 되자, 뭐 그렇게 결심한 거죠. 그렇게 노력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회사나 이쪽 바닥에서 서서히 인정도 해 주더라고요. 뭐 할지 모르던 백수던 제가 세린이 덕분에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거죠.”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숨겨진 사연이 있다는 것에 조상구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아마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환상적인 케미스트리를 보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배 팀장님의 명성은 저도 예전부터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자신의 아티스트가 제대로 커 나가게 확실하게 케어를 해 주신다고요. 근데, 그런 명성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군요. 오늘 제가 많이 배웁니다.”
조상구의 말이 쑥스러웠는지 배영숙은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사람 민망하게 하세요? 그리고 유명한 조상구 실장님을 앞에 두고 제 주제에 명성 이야기를 해도 되나요? 이 바닥 명성만 놓고 보면 제가 실장님한테 상대가 안 되잖아요. 제 명성이 지역구 수준이라면 조 실장님의 명성은 전국구 수준인데…….”
“다 지나간 옛날이야기입니다.”
조상구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배영숙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조상구 실장을 향해 말했다.
“근데, 이서준 씨도 괜찮은 사람이란 소문이 정말 많던데요. 같이 일하는 스텝들이 좋은 소리를 많이 하나 보더라고요.”
그녀의 말을 들은 조상구도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네, 아주 좋은 녀석이에요. 재능도 뛰어난데 겸손하고 착하니까요.”
조상구의 말을 들은 배영숙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조상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랑 세린이가 이 바닥에서 좋은 콤비라는 이름을 얻은 것처럼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조상구 실장님과 이서준은 이 바닥에서 어떤 콤비가 되어 있을까요? 혹시 그런 생각 해 보신 적 있나요?”
“아뇨…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네요.”
“외국의 유명한 마이클 존슨과 그의 매니저 대니 로버트와 같은 영혼의 단짝이란 별명으로 불리시는 건 아니겠죠?”
“하하하, 서준이는 몰라도 제가 대니 로버트 같은 훌륭한 매니저가 못 되니 아쉽게도 우리 두 사람을 두고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 줄 가능성은 전혀 없을 거 같네요.”
“에이, 괜히 겸손한 척하시는 거 아니에요?”
“겸손한 게 아니라 솔직한 겁니다.”
조상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배영숙의 말을 부인했다.
어느덧 조상구의 상념은 끝나고 다시 차를 운전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배영숙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그는 조수석에 앉아서 계속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이서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준아.”
“네, 실장님.”
“혹시 말이야… 나 대신 다른 사람과 일하게 되면 넌 어떨 거 같아?”
“다른 사람요?”
“응, 나 말고 다른 사람.”
“음… 어쩔 수 없죠. 실장님이 사정이 생겨서 그만두시는 거잖아요.”
“…그렇지. 사정이 있어 그만두게 되는 거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살짝 섭섭한 기분이 드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잠깐 가졌던 섭섭한 감정은 다음에 이어진 이서준의 말 덕분에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사정이 바뀌어 실장님이 저랑 다시 일할 수 있게 된다면 꼭 다시 저랑 일하셨으면 좋겠어요. 요즘 계속 드는 생각인데, 실장님이랑 있으면 제가 정말 편하거든요.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게 미리 챙겨 주시니까 너무 좋아요. 그래서 작업도 더 잘되는 거 같고요. 가능하다면 실장님과 계속 일하고 싶은 게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근데 실장님이 하실 일이 많아서 계속 저랑 함께하실 수는 없겠죠?”
자신과 일하는 게 너무 좋다는 말에 운전에 집중하는 듯한 조상구 실장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향했다.
이서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럼, 내가 우리 대표님에게 직접 부탁할까? 네가 나랑 계속 있고 싶어 하니 다른 일 못 하겠다고 말이야.”
“이야, 그렇게 말씀하셔서 진짜 그렇게 되면 너무 좋죠. 저도 대표님 보면 부탁해 봐야겠네요. 우리 실장님 다른 데 못 가시게 말이에요.”
이서준의 거듭된 말에 더욱 진한 웃음을 짓는 조상구였다.
그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기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 * *
나와 세린 선배가 함께 만드는 가제 ‘love letter’의 작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가사 작업이 끝나자마자 내가 가사에 어울릴 만한 코드를 다음 만남까지 만들어서 가지고 왔고, 선배는 내가 짜 온 코드를 듣더니 곧바로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두 사람의 협력으로 작곡은 아주 빠르게 끝이 났고, 이어서 편곡까지 순식간에 끝나 버린 것이다.
다음 작업은 녹음이었다.
녹음은 우리 회사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녹음 시설들이 우리 회사 쪽이 좋았기 때문이다.
일단 악기 녹음 작업부터 시작했다.
이번에는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다 보니 내가 직접 연주하는 것보다 전문 세션을 불러서 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내 노래 작업 최초로 세션을 불렀다.
그러나 내가 좀 이상해진 걸까?
도무지 그들의 연주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전문 세션 연주자들이 연주를 못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이 그 비싼 돈을 받으며 이곳저곳 불려 다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굳이 설명한다면 느낌의 차이랄까?
내가 원하는 느낌이 조금 부족했다.
세린 선배는 아무리 녹음된 버전을 들어도 내가 말하는 느낌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녹음을 해야 했고, 내 녹음 버전과 기존의 세션 연주자들의 녹음 버전을 두 번 세 번 비교해 보더니 그제야 내가 말하는 차이점을 느끼는 듯이 보였다.
“네 말이 맞네. 이러면 그냥 네가 연주해야겠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에구, 돈만 버렸네. 좋은 연주자를 이렇게 옆에 놔두고 말이야.”
결국, 악기 녹음은 내 연주 버전으로 대체하였다.
세린 선배는 부스 밖에서 들으면서 나름대로 조언을 해 주었다.
연주를 끝내고 부스 밖에 나오자 선배는 한 가지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는지 내게 물었다.
“근데, 악기는 정말 최소한으로 갈 거야? 요즘 악기 종류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운드를 풍성하게 만드는 게 세계적으로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작업할 때 이렇게 적은 악기 수로 녹음을 진행해 본 적이 처음이라 불안해.”
선배의 말을 들은 난 일단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빠르게 녹음된 악기 소리를 조합했다.
그리고 완성된 반주를 선배에게 들려주었다.
그걸 들은 선배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
“아, 이래서 요즘 악기 수를 줄이는구나. 신선한 느낌이 있네. 내가 이전에 하던 작업과는 느낌이 많이 달라.”
“선배는 어느 게 좋아요?”
“솔직히 말하면 이게 낫다. 내 다음 앨범에도 이번처럼 악기 수를 최소로 해서 작업해 봐야겠어.”
“저도 그렇게 해 보시는 걸 권해 드립니다.”
반주 녹음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제 노래 녹음해야지.”
“네, 노래해야죠. 선배 준비됐어요?”
“응, 준비됐어.”
“그럼 해 볼까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