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연기시킬 생각은 없는가요?
그리고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준명 선배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은진 누나가 그랬지. 이 형들이 자기 노래를 불러 주면 음원 수입이 장난이 아니라고,’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팬덤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비스트 보이즈이기 때문에 음원 수입도 아주 글로벌하게 들어온다는 농담 섞인 설명을 이미 은진 누나한테 들었던 터라 구미가 확 당기긴 했다.
‘부모님 아파트도 사 드리고 또 내가 살 집도 사면 좋을 거 같긴 한데…….’
내년이면 동생 수정이도 서울로 올 게 분명했다.
든든한 오빠인 내가 경제적으로 괜찮아졌기 때문에 성적이 좋은 수정이가 서울로 진학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성적대로 대학에 간다면 서울에 있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 중 하나에 진학을 할 테니 그에 관한 대비도 미리 준비해야 할 상황이었다.
수정이가 서울로 온다면 보호자인 내가 데리고 있어야 할 테고, 그러려면 지금 숙소보다는 내 개인 집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남매가 함께 살 집을 구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 벌고 있는 수입도 장난 아니게 많은 금액이었지만, 서울의 집값 또한 더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을 때 더 벌어야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가 더 있다면 준명 선배랑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점이다.
내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이 형님들의 컴백 무대가 보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런 경우에 반드시 좋은 노래가 나왔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내 생각은 비스트 보이즈의 컴백 곡 작업을 한번 해 보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알겠다는 대답 전에 분명하게 확인해야 할 내용이 있었다.
“근데, 선배님. 컴백 앨범 컨셉 같은 것 생각해 놓으신 거는 없어요?”
“딱히 정해 놓은 건 없어. 곡이 제일 중요한데 아직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드는 곡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컨셉이야 곡이 정해지면 자연스럽게 정해지지 않을까?”
정한 컨셉이 없다는 바라던 답변을 들었지만, 좀 더 확인해야 할 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최근에 ‘우리 집으로 가자’가 크게 히트했잖아요. 그 노래 작사, 작곡이 선배님 아닌가요?”
“응, 맞아. 내 노래야.”
최근 비스트 보이즈에게 데뷔 이후 처음으로 기이한 일이 하나 생겼는데, 몇 년 전에 발표한 노래가 갑자기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역주행을 한 것이다.
너튜브에 한 팬이 올린 직캠 영상 때문에 이 노래의 매력을 몰랐던 사람들이 다시 이 노래를 제대로 듣게 되었고 그 덕분에 역주행 현상이 일어났다.
본래 가수들은 잘된 노래가 있으면 다음 앨범에도 그와 비슷한 컨셉의 노래를 반복하게 되는 나쁜 관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점을 콕 집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 노래가 되게 잘되었으니 이번 컴백 앨범에도 비슷한 장르의 곡으로 활동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 질문에 준명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글쎄… 잘된 노래라고 해서 그대로 따라 하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가 나올 거 같은데… 너무 식상하게 느껴지잖아. 근데 넌 우리가 ‘우리 집으로 가자’와 비슷한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선배의 말을 듣고 난 웃음이 났다.
내가 원하던 대답을 선배가 마지막까지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하,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선배를 슬쩍 떠본 것처럼 되었네요. 사실은 저도 선배님처럼 생각해요. 선배님들 정도의 경력을 가진 가수라면 비슷한 거는 반드시 피하는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해요. 부르신 곡들이 많으니까 대중의 귀도 선배님 노래에 익숙하잖아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만약 컴백한다면 오래 시간 동안 기다려 준 팬들을 위해서도 ‘우리 집으로 가자’를 자주 불러 드려야 할 거 같기는 해. 이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활동을 못 했어. 그때 못 한 활동을 몇 년이 지난 후에 해야 하는 셈이지. 그러니 더더욱 다른 컨셉의 곡이 필요하겠지.”
“그렇겠네요.”
이야기는 아주 순조롭게 풀려 가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더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선배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는데요. 제 개인적으로 선배님들이 무대에서 제일 잘 노는 곡이 ‘손 들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유형의 힙합 댄스곡으로 다시 무대에 서는 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힙합 댄스곡?”
내 말을 들은 준명 선배는 방금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본인들이 무대에 다시 서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던 선배는 이윽고 나를 보며 말했다.
“나쁘지 않은 거 같아. 사실 우리 그룹의 정체성이 바로 신나게 즐기며 듣는 노래거든.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그런 스타일의 곡을 거의 부르지 않았던 거 같기는 하네. 컴백하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되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괜찮은 생각 같아.”
준명 선배는 내 의견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준명 선배와의 이야기를 그 정도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일단 지금은 내가 곧바로 곡 작업을 할 여유가 없으니 며칠 동안 곡을 먼저 만들어 본 후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약속한 후 헤어졌다.
준명 선배와의 미팅을 마무리하고 난 다시 날 기다리던 밴에 올랐다.
이번에는 헤어샵에 가서 준비한 후 뮤직비디오 촬영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와중에도 나는 스마트폰 어플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멜로디 작업을 해 보았다.
생각이 날 때 미리 작업을 해 두어야 나중에 편하기에 자투리 시간까지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그런 모습이 신기했는지 은비가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럴 때 보면 오빠 완전 자판기 같아요.”
갑작스러운 자판기 드립에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자판기? 무슨 자판기? 혹시 커피?”
“하하, 아니죠. 오빠는 노래 자판기요. 갑자기 이런 노래를 뚝딱 만들잖아요.”
“아, 내가 노래 만드는 모습이 자판기 같다는 뜻이야?”
“네, 자판기에 돈 넣고 버튼 누르면 커피나 캔 음료가 나오잖아요. 오빠도 누가 노래 만들어 달라고 하면 그냥 뚝딱 만들어 버리니까 자판기와 비슷한 존재가 되는 거죠.”
“그래도 자판기는 너무했다. 비인간적이잖아.”
“오빠가 노래 만들 때 보면 사람처럼 안 보여요.”
은비와 내가 자판기의 비인간성에 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 조용히 있던 실장님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요즘 바쁜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선배의 부탁이라서 거절 못 한 거면 내게 말해. 내가 준명 씨 기분 안 나쁘게 잘 말해 볼 테니.”
“아, 아니에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해 본다고 한 거예요. 혹시 만들어 봤는데 별로면 그냥 바로 못 하겠다고 할게요. 그때 실장님이 나서 주세요.”
“그래 그러자. 진짜 그런 상황이 되면 내게 꼭 말해야 해.”
“네.”
든든한 식구들이 나를 챙겨 주는 모습에 흐뭇해졌다.
이 기분이면 오늘 오후에 진행될 뮤직비디오 촬영도 분명 잘될 거 같았다.
* * *
뮤직비디오 감독인 이진섭은 다시 뮤직비디오 촬영에 나섰다.
이서준과는 이번이 두 번째 작업을 함께하는 것이고, 이세린과는 처음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모니터를 째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카하, 좋다. 그렇지, 그렇게 바라봐. 더 애절하게 더 더… 오케이 컷! 아주 좋았어요.”
이번 신도 분명 잘 나온 거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이진섭 감독이었다.
오늘은 유난히 NG도 별로 안 나서 촬영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절약된 바람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져도 촬영에는 지장이 없을 듯했다.
“잠시 휴식! 딱 20분만 쉬고 다음 신 촬영 들어갈게요.”
감독 이진섭의 달콤한 외침에 전 스탭의 얼굴이 동시에 밝아졌다.
역시 열심히 일하다가 쉴 때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었다.
“감독님, 제가 샌드위치 사 왔는데 좀 드세요. 너무 맛있어요.”
이세린이 자신을 챙기는 말을 하자 이진섭은 입이 찢어질까 걱정될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 점심 먹은 게 체해서 지금은 먹는 걸 조금 자제해야 해. 우리 세린 씨가 내 몫까지 많이 먹어 줘.”
“어머, 우리 감독님 아프시면 어떡해요? 약 좀 챙겨 드려야겠네.”
아주 살갑게 가지고 다니는 응급약 가방에서 소화제를 꺼내 건넨 이세린은, 이번에는 천천히 걸어오던 이서준을 향해 다정하게 외쳤다.
“서준아, 샌드위치 먹을래? 저번에 네가 맛있다고 한 그 샌드위치인데…….”
“진짜요? 선배 얼른 갑시다. 말만 들어도 침 나와요. 그때 너무 맛있었거든요.”
“그지? 자, 그럼 샌드위치 먹으러 갈까요?”
“넵.”
같이 작업을 해서 그런지 유난히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대기실을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이진섭의 눈동자 앵글에 잡히자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상상을 떠올렸다.
‘저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로맨스물을 한번 찍어도 아주 좋은 그림이 나올 거 같은데…….’
모든 걸 촬영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직업병이 분명할 것이다.
속이 더부룩해서 이세린이 챙겨 준 소화제를 먹으려고 물을 찾았다.
그러나 평소 촬영장에서 걷다가 발에 차이는 것이 생수통인데, 막상 마시려고 찾으니 어쩐 일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애타는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도중, 그를 향해 내밀어지는 온정의 손길이 있었다.
“이거 드십시오.”
아주 시기적절하게 생수통을 건네는 사람은 이서준의 매니저인 조상구 실장이었다.
“아, 고맙습니다.”
이진섭은 고마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생수통을 받았다.
조상구 덕분에 약을 먹은 이진섭에게 조상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촬영은 어떻습니까?”
“촬영요? 아주 좋습니다. 원래 예상했던 시간보다도 촬영이 훨씬 빨리 끝날 거 같아요. 오늘 두 주인공이 무척 좋은 연기를 보여 주고 있거든요.”
그의 대답을 들은 조상구의 눈에 작은 의문이 생겨났다.
“이세린 씨야 원래 연기자 생활도 했으니 잘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거지만… 우리 서준이도 잘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의 물음에 이진섭은 진심으로 엄지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서준이는 아직 좀 어색한 부분들이 있죠. 그러나 내가 지시하면 이해하는 게 남달라요. 한마디로 척하면 바로 착이라니까요. 그리고 눈빛이 예술입니다. 원래 연기자가 저런 눈을 가지면 정말 복이 터진 거죠. 눈빛만으로도 반은 먹고 시작하는 거니까…….”
이진섭은 말 나온 김에 촬영이 끝나면 꺼내려고 했던 말을 했다.
“사실 오늘 촬영이 끝나고 제가 우리 실장님께 찾아가서 드리려고 생각했던 말이 있는데… 회사에서 서준이 연기시킬 마음은 전혀 없습니까?”
그의 물음을 들은 조상구는 약간 당황했다.
지금 이진섭 감독은 그에게 진심으로 연기 제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서준의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문득 확인하고 싶어졌다.
“감독님은 우리 서준이가 연기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연기를 잘하냐 못하냐를 그렇게 간단히 제가 정의할 수는 없죠. 연기란 것도 정말 어렵고 복잡한 것이거든요. 그러나 소질이 있냐 없냐 정도는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진섭은 어느새 열정적인 모습으로 조상구를 설득하고 있었다.
“연기에 소질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건 확실해요. 그래서 이왕이면 제 작품에 캐스팅하고 싶네요.”
“감독님 작품요?”
“네, 제가 이번에 15부작 드라마 감독으로 들어갑니다. 공중파는 아니고 케이블 방송입니다만 최근 드라마로 여러 번 성공한 그 방송국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배역은 무게감 있는 조연입니다. 주인공이 아니라 섭섭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오늘 제가 점심 먹다가 그랬던 것처럼 빨리 먹는 밥이 체하는 법입니다. 이번에 좋은 결과 얻으면 분명히 여러 캐스팅 기회가 생길 거고요.”
이진섭의 제의를 들은 조상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거짓말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이서준이 연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니저로서 경력이 무척 긴 편이지만, 매니저 생활 초기를 제외하고 최근까지 주로 가수 매니저로서만 일해 왔기에 자연스럽게 가수로서의 이서준만 생각했지 연기자 이서준을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