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도깨비를 다시 만나다(1)
생전 처음 보는 고급 술집을 방문한 기분은 정말 최악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차를 타지 않고 일단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 더러운 기분을 털어 버리기 위해서는 거리를 거닐며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제임스 권은 왜 저렇게 못나게 굴까?
왜 자신이 가진 많은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을 뺏기 위해 저런 비겁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는 걸까?
내가 사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제임스 권의 마지막 말이 왠지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너처럼 능력 좋은 작곡가를 내 마음대로 이용해 먹을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그걸 왜 이용 안 해? 안 하는 게 바보 아냐?’
이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거리를 걸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왜 그러는지 약간 이해가 될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무 순진한 건가?’
연예계가 이런 살벌한 곳이란 이야기는 예전부터 들은 적이 많았다.
누가 누구에서 어떤 일을 당했다고 하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는 술자리의 안주 삼아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였는데, 당시에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같아 그리 공감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오늘 제임스 권은 그런 나에게 연예계의 어두운 단면을, 아니 감춰진 더러운 단면을 제대로 맛보게 해 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행히 그동안 느끼지 못하고 살았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이곳은 원래 이랬던 곳이었다는 것을 오늘 제임스 권 덕분에 제대로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상당히 많은 거리를 걸어왔다는 것을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편의점 상호가 적힌 간판이었다.
‘기분도 울적한데, 맥주나 한 캔 할까?’
문득 시원한 맥주를 머릿속에 떠올린 나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테이블에 오랜만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가능할지 재빠르게 살피는 중이었다.
다행히 편의점이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지금 현재 시각도 제법 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지금 쓰고 있는 모자를 더 푹 눌러쓰고 편의점 앞에 놓인 가장 바깥쪽 테이블에서 앉아 조용히 마시면 아무런 방해 없이 맥주 한 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바로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맥주 한 캔을 사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미리 봐둔 테이블에 앉아 맥주캔의 뚜껑을 과감히 땄다.
정말 오랜만에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거라 묘하게 흥분되는 기분까지 느끼며 맥주를 마셨다.
맥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은 언제나 짜릿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캬하~”
나도 모르게 맥주가 주는 시원함에 격한 탄성을 내뱉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귀 안으로 파고들었다.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마시는 맥주만큼 맛있는 맥주는 쉽게 찾기 어렵죠, 안 그래요?”
나는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발견한 목소리의 출처.
그는, 아니 어떤 존재는 어느새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발견하고 눈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헉!”
신음에 가까울 정도의 탄성을 내지르며 놀라는 나를 보며 내 앞에 앉아 있던 존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제법 오랜만에 본 거 같은데… 경기하실 정도로 많이 놀라시는 것보다는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어 주시면 더 고마울 거 같기는 한데… 아마 그건 힘들겠죠?”
아주 해맑게 웃으며 내게 질문을 던지는 존재를 보는 내 표정은 여전히 놀람을 넘어 경악하고 있다는 설명이 어울릴 만한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내 앞에 나타난 사람, 아니 존재가 바로 내게 엄청난 능력을 선물해 준 도깨비였기 때문이다.
* * *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님 덕분에 난 태어나서 두 번째로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는 경험을 해야 했다.
물론 첫 번째는 당연히 도깨비님은 흉가에서 처음으로 만났을 때였다.
그땐 너무 놀라서 기절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그때의 만남이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확실히 그때 이분을 그곳에서 만났던 건 꿈속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놀라움과 신기함이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는 나를 향해 도깨비님이 웃으며 입을 여셨다.
“후후, 우리 서준 님이 잘하고 계신 건 항상 지켜보고 있어서 알고 있었답니다. 다만 몇 가지 전할 내용이 있어 부득불 오늘 서준 님을 다시 찾아오게 되었지요.”
전할 내용?
도깨비님의 말을 듣고 그게 뭘까 하는 궁금증이 곧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궁금하시죠? 후후, 지금 바로 설명해 드릴 테니 잘 들어 주셨으면 좋겠네요.”
절대 평범하지 않은 신비로운 존재인 도깨비님이 나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행차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
난 궁금한 마음에 도깨비님을 얼굴을 집중해서 쳐다봤다.
“제가 이서준 님께 도움을 드린 이유는, 이서준 님이 지금 하고 계신 것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좋은 노래를 많이 불러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어요.”
도깨비님은 나를 향해 빙긋 미소지으며 질문했다.
“도깨비라는 존재가 뭐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세요?”
도깨비가 뭐 하는 존재냐고?
갑작스러운 질문에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기에 나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답을 살짝 던져 보았다.
“…신?”
내 대답을 들은 도깨비님은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답변이었는지 다시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후후, 괜찮은 대답이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신입니다. 다만 특별한 임무를 맡고 있는 신이죠.”
“특별한 임무요?”
“네, 그렇습니다. 제가 맡고 있는 임무는 서준 씨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을 지키는 일이죠. 쉽게 말해서 수호신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할 거 같네요.”
도깨비님이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니…….
흔히 민간에 전해져 온 설화 속의 도깨비님은 그저 장난기 많은 귀신 같은 존재였는데, 실제로는 수호신이셨던 모양이다.
그때 도깨비님은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내 생각과 어울리는 답을 해 주셨다.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는 제가 심심해서 가끔 사람들과 어울린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다 보니 많이 각색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제가 어떤 일을 하는 신인지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죠. 그리고 제가 신이다 보니 이서준 님의 생각까지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서준 님의 마음을 읽으며 말해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헉!
생각까지 읽는다니…….
과연 신이란 존재답게 전지전능한 능력을 탑재한 모양이다.
“그렇죠.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 신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하하.”
“…….”
갑자기 생각하는 것까지 부담스러워졌다.
“그냥 평소처럼 하세요. 절 의식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요? 반대로 생각하면 오히려 더 편한 거 아닌가요? 서준 님이 말씀을 안 하셔도 제가 알아서 대답하잖아요. 후후.”
그런가요?
근데 그렇게 말씀을 해 주셔도 쉽게 적응이 힘든 옵션이네요.
“제가 서준 님에게 그런 능력을 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다시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지시는 도깨비님.
난 조금 고민하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다.
“…제가 소원으로 원해서 들어주신 거 아닌가요?”
내 질문에 도깨비님은 다시 방긋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죠. 우리가 내기를 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그것보다 더 필연적이랍니다. 운명이란 단어로 이해하셔도 좋을 듯하네요. 사실 서준 씨가 산에서 길을 잃고 절 만나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것은 하늘에서 우리를 만나게 해 준 거니까요.”
운명이란 단어까지 등장하는 도깨비님의 어려운 설명에 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말에 더욱 집중했다.
“본래 이서준 씨는 사람들에게 많은 행복과 위로를 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얽히고설켜 그런 능력이 발현되지 못하고 본인 내부에 단단히 봉인된 상태였는데, 제가 그걸 풀어 드린 겁니다. 그러니 우연히 갖게 된 힘은 아니니 쓰시는 데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사실 아무 노력 없이 행운으로 얻은 능력 같아 그런 능력으로 돈을 벌고 명성을 얻는 것에 대한 약간의 부담감 같은 것을 마음 한구석에 늘 가지고 있었다.
뭐 죄책감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감정을 항상 가지고 있었는데, 도깨비님은 그런 내 마음을 미리 아시고 이런 위로 섞인 말을 해 주시는 것 같았다.
그런 도깨비님의 마음 때문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분명 가지지 못했던 것을 얻게 된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니 그에 따른 의무도 생길 수밖에 없고요.”
의무?
내가 능력을 얻게 된 덕분에 얻게 된 숙제 같은 것인가?
“숙제도 좋은 표현이지만, 숙제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가지고 있던 능력을 계속 사용하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대가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 같네요. 원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다 인연이라는 운명적 끈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죠.”
“그 말씀은…….”
“네, 사용하는 능력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지금의 능력을 잃으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순간 놀랐다.
지금 도깨비님의 말에 따르면 내가 작곡과 노래를 계속 잘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설마 내 목숨 뭐 이런 무서운 건 아니겠지?
도깨비님은 걱정하는 나를 보며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건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존재들이나 원하는 것이고요, 후후,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전 그런 걸 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조금은 안심이 되는 설명이었다.
날 안심시켜 준 고마운 도깨비님은 마치지 못한 설명을 계속 이어 갔다.
“서준 씨가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위로해 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지금처럼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노래나 듣다가 눈물을 나게 만들어 마음속에 잔뜩 쌓여 있던 슬픔을 훌훌 털어 버리게 해 주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거죠.”
“…그 말씀은 지금처럼 열심히 노래 만들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면 된다는 말씀인가요?”
“네, 맞아요. 지금처럼 그렇게 하시면 돼요. 다만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건 더 하셔야겠죠. 예를 들어 연기 같은 것도요.”
“네? 연기요?”
갑자기 등장한 연기라는 단어에 난 화들짝 놀랐다.